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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올린 게시글: 2015-02-11, (수) 2:27 am 

가입일: 2015-02-07, (토) 2:00 am
전체글: 7
불교를 믿는 목적으로 해탈(解脫)과 성불(成佛)을 이야기 한다.
그렇다면 해탈이란 무엇이고 성불이란 무엇일까?

해탈이라는 말과 성불이라는 말은 불교의 오랜 역사에서 비롯되었다.
해탈은 남방불교인 소승불교에서의 목적이며 성불은 북방불교인 대승불교에서의 목적이다.
해탈과 성불의 차이점을 보기 위해서는 해탈 이전의 문제, 즉 성불 이전의 문제를 보아야 한다.

왜 해탈을 해야 되는가 하는 것이다. 해탈이라는 것은 윤회로부터의 해탈이다.
윤회라는 것은 속박이고 얽힘이다. 집착에 얽히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탈이라는 것은 무소착(無所着) 즉 집착하는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해탈하기전의 윤회의 과정은 인과의 과정에서 살아가고 있는 세계이다.
그런데 윤회의 세계 중에서 가장 좋은 세계는 천상(天上)이다.
그래서 세속적인 불교의 목적중의 하나가 바로 생천(生天) 즉 천상에 나는 것이다.

초기불교의 목표는 재가불자들은 내생에 생천하는 것이고 출가한 비구, 비구니는 해탈하는 것이었다.
요즘은 생천이라는 말보다 극락왕생(極樂往生)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대승에서 비롯된 것이다.
육도를 윤회함에 있어 좋은 일을 많이 하면 육도 중 가장 좋다는 천상에 나게 되고,
나쁜 일을 많이 하면 육도 중 가장 나쁘다는 지옥에 나게 되는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것이 모두 바깥으로부터 온다는데 있다.
바깥 환경으로부터 얻어진다는 것이다.

내가 좋은 환경을 맞이하기 위해서 노력하면 좋은 환경이 온다.
그러나 이것은 바깥으로부터 온 것이므로 다시 바깥으로 가게 되어있다.
이것이 무상이다 유루법(有漏法)이라고도 하는데 새는 그릇에 아무리 물을 가득 채워놓아도 새어서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윤회이며 인과이며 중생세계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을 보고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발견한 것이 해탈이다.

이런 것은 부처님 이전에도 다 있었다.
가장높은 곳인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에 태어나셨지만 그 세계도 완전치 못함을 알고 내려오셔서 다시 정진하여 해탈을 얻으신 것이다. 해탈은 풀려난다는 말이다.

지옥에 가는 것도, 천상에 가는 것도, 좋은 것도 그만두고, 나쁜 것도 그만두고 일체의 것에서 끝나는 것이다.
그것을 적멸이라 하고 이것을 해탈이라 한다. 초기경전에서 해탈을 네 구절로 묶어둔 내용이 있는데,

‘아생이진(我生已盡)이라, 나의 태어남은 끝났다.’
‘범행이립(梵行已立)이라, 내가 할 일은 다 했다.’
‘소작이작(所作已作)이라, 내가 만들어야 할 것은 다 만들었다.’
‘불수후유(不受後有)라, 다시는 내생을 받지 않는다.’이다.

좋은 것도 구하지 않고 나쁜 것도 구하지 않는 것이다.
구하지 않으면 그것이 자유이고, 평화이며 윤회는 끝이 나는 것이다.
모든 되풀이되는 것은 구함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구하고 나면 그 구한 것은 없어지고, 그래서 또 구하고 또 없어지기를 반복하므로 영원히 구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영원히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멈추어야 한다.
이렇게 되는 이유가 어떤 관찰에서부터 시작되는가 하면 바로 무아(無我)이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구했는가?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이다. 그런데 그것이 망상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나라는 허상에 매여서 이렇게 구하고 또 구해서 끊임없이 고통을 반복했음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깨닫고 보니 ‘나’라는 것이 없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무아이다.

나를 위해서 구했지만 가만히 들여다 보니 ‘나’라는 것이 없는 것이다.
‘나’라는 것이 있으려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고,
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모두가 시시각각으로 변해간다.
일생을 살면서 나의 모습은 계속 변해가고 있기 때문에 ‘나’라고 할만한 모습이 없는 것이다.

지금의 내 모습 역시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모습일 뿐이다.
‘나’라는 것을 깊이 관찰해보면 ‘나’라는 것은 없는데 생각으로 '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아상(我相)이라 하고 아집(我執)이라고 한다. 무아(無我)를 철저히 보면 더 이상 구할 것이 없다.
이것이 해탈인데 무아를 보지 못하므로 끊임없이 구하여 돌고 도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윤회와 해탈의 모습이다.
해탈이라는 것은 구하지 않는 것이지 따로이 다른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것이 따로 있다면 이것 역시 묶이는 것이다. 일체의 구함이 없는 무구(無垢)의 세계가 바로 해탈이다.
또 구함이 없는 것이라 해서 구함이 없는 것을 구한다면 이것 또한 속박이다. 여기까지가 소승불교라 하겠다.

그런데 이것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 있다. 해탈 다음엔 무엇이 오는가?
부처님께서는 해탈에 대한 내용을 설명하시지 않으셨다. 하지만 후일 제자들이 그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부처님께서 해탈하신 이후 설법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다니시기도 하고 머무르시기도 하시면서,
엄청난 힘이 나왔는데 그 힘이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문제로 출발한 것이 바로 대승불교이다.
그러므로 대승불교는 부처님께서 해탈하신 이후의 불교이다. 해탈 후에는 반야(般若)이다.
그래서 반야는 무아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몸이라는 것은 파초(芭蕉)와 같은 것이라 하였다.
껍질은 있지만 알맹이가 없는 파초와 같다고 하여 파초허질(芭蕉虛質)이라고도 했다.
몸은 그만큼 허하고 부실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생각을 가지고 사는데 그 생각은 이 생각 일어났다가 저 생각이 일어나고 저 생각 일어났다가,
이 생각이 일어나므로 아지랑이와 같이 허망하다.

몸은 허깨비와 같고 생각은 아지랑이와 같이 허망한데 거기서 지혜를 얻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불이다.
육체만 보면 허깨비이고 파초고 아지랑이와 같지만 그기에서 반야가 나타나면 어마어마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해탈한 다음에는 해탈한 정신으로 사셨는데 그것을 해탈지견(解脫知見)이라고 한다.
그 해탈지견이 바로 반야이다.

중생의 생각은 허망할 뿐이고 인간의 육체는 허해서 없어진다.
그러므로 생각을 믿어서도 안되고 육체를 믿어서도 안된다.
이렇게 환상과 같고 허망한 생각만 일어날 뿐인데,
여기서 깨달음의 지혜가 나타나면 어마어마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반야이다.

깨달음을 얻으면 반야의 세계는 밝은 것도 아니고 어두운 것도 아니고,
긴 것도 아니고 짧은것도 아니고 등등 무수히 많은 말씀이 전해져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반야인가 한다면 그것은 생각일 뿐이다.

길다느니 짧다느니 죽는다느니 산다느니 하는 것은 모두 망념이고 관념이다.
관념을 잘 정리해놓은 것이 개념이고 개념을 체계화 한 것이 학설이고 논문이다.
망상을 체계화 하고 입자화 한 것이 개념이다. 개념도 전문화가 되면 조작적 개념이라 한다.

과학계는 과학계 나름대로 문학계는 문학계 나름대로 개념을 조작한다.
개념조작을 잘하는 사람들이 신학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오늘의 조작으로 모자라서 내일의 조작이 나온다.
그래서 신용어들이 계속 나오고 학설은 계속 변해가는 것이다. 본래 관념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반야는 모든 관념에서 해방되고 관념을 초월한 것이다. 그래서 무념이라 한다.
육조단경에는 무념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육조단경은 반야바라밀의 금강경을 보고 깨달은 후 설한 것이므로, 육조단경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은 금강경이다. 그래서 무념이라는 말을 많이 쓴 것이다.

형상을 관찰한다는 것은 자기의 생각으로 보이는 것인데, 자기의 생각으로 형상이 관찰되어진것을 모르고, 완전히 자기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집착하는 것이 중생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이일체상 즉명제불(離一切相 卽名諸佛)이라, 일체의 상(相)을 떠나면 부처다.’
‘제상비상이면 즉견여래(諸相非相 卽見如來)라,
모든 형상이 상이 아님을 본다면 바로 여래를 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상은 개념 즉 망념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상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자신의 허망한 생각으로부터 해방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무념이고 반야이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개념으로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에 설명이 안되는 것이다.
무념이 망념을 뚫고 들어갈 수가 없다. 스스로 망념을 깨지 않는다면 방법이 없는 것이다.

옛 선지식이 반야의 세계를 설명하기 힘듦을 말하기를,
‘태허공(太虛空)으로 입을 만들고 초목와석(草木瓦石)으로 종종광방광(種種光放光)하여,
진미래겁(盡未來劫)토록 밤낮없이 설명해도 반야의 세계를 알려줄 수 가 없다.’고 하였다.
이것이 반야의 세계요, 무념의 세계요, 깨달음의 세계요, 성불이다, 이것을 견성이라 한다.

견성은 무아로부터 오는 것이다. 내가 없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서부터 반야를 개발하면,
억만겁이 지나도 달라지는 것이 없고 세상 어디에도 비유할 바가 없다.
그 기쁨을 어디에 비유할 것이며, 그 광명을 어디에 비유하겠는가?
그분이 바로 석가여래요, 그분이 바로 아미타불이 아닌가?’

깨우치고 나서 반야를 노래한 것이 많이 있는데,
임제선사께서는 ‘무위진인(無位眞人) 즉 지위가 없는 참사람’이라 하셨다.
우리는 다 지위가 있지만 반야에서는 지위가 없고 개념이 없다는 것이다.
일체개념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깨달음이다.

무위진인을 깨닫지 못하고 아집에 사로잡혀서 몸뚱이를 자기자신으로 보는 수준이 있는데,
그것을 임제록에서는 ‘적육단신(赤肉團身) 즉 붉은 고깃덩어리의 몸’이라 표현하였다.
깨달으면 무위진인이지만 깨닫지 못하면 적육단신인 것이다.
성불을 하기위해서는 무상을 철저히 느껴야 한다.

이 몸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초로의 인생임을 철저히 느껴서 깨우침을 구해야,
밤낮없이 정진해서 망상덩어리를 뚫고 나갈 수 있다.
깨우치기도 전에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짐작으로만 해서는 절대 안되는 것이다.
목숨을 걸어놓고 그냥 한길로 들어가야 망상이 녹아진다.
그것이 무위진인(無位眞人)이 되고 확연대오(廓然大悟)가 되고 견성성불(見性成佛)이 되는 것이다.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라는 말도 있다, 한번 뛰어서 부처의 자리에 올라간다는 말이다.
이 몸을 가지고 지위가 없는 참사람을 본다는 것이다.
아무리 봐도 금방 없어지는 몸이고 어떠한 생각도 그냥 생겨났다 사라지는 허망한 생각이고 허망한 육신인데,
그것에서 반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옛 선인들은 이를 두고 ‘쓰레기더미에서 보석을 얻은 것’이라 하였다.

이 몸을 가지고 있다가 죽어봐야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것에서 깨우침을 얻고 나면 쓰레기더미에서 보석을 얻은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성불이고 반야이다.
반야를 얻으면,
죽으면 어떻게 하나, 살면 어떻게 하나, 오면 어떻게 하나, 가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근심이 다 없어진다.
마치 고약한 악몽을 꾸던 사람이 꿈에서 딱 깨어나면 일체가 다 없어지듯. 그것이 바로 성불의 세계이다.

‘일조소진세간풍(一朝掃盡世間風)이라 하루아침에 세간의 바람을 쓸어버렸다’는 말인데 옛 스님의 오도송이다. 그것이 성불이고 그것이 반야인 것이다. 망념으로 살다가 반야로 살면 그것이 성불이다.

지금 우리의 생각을 우리는 철저히 믿는데 믿을 것이 못된다. 지금의 생각은 몇 년이 지나면 틀림없이 바뀐다.
그것을 알아야 한다. 지금 생각할 수 있는 생각의 근거는 밖에서 온 것이다.
밖에서 온 것은 손님이고 손님은 떠나게 되어있는 것이다.

보고, 듣고, 느낀 것에서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것을 다 빼고 나면 없는 것이다.
보고, 듣고, 느낀 것 없는 것에서 나타나는 것이 반야이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전부 밖으로부터 온 것이다, 밖에서 온 것은 밖으로 간다.
손님은 반드시 떠나는 것인데, 손님이 와 있는 동안은 가족 같지만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이 허망한 것이다.

지혜를 얻고 난 다음에는 자비로 돌아가는 것이다.
부처님의 종착역이 자비이다. 자비 밖에 할 것이 없다.
자신의 문제는 일체 없기 때문에,
아직도 참사람을 모르고 허망한 생각과 허망한 육체에 매여서 온갖 고통을 당하고 있는
중생들을 이끌어주고 살펴주고 깨우쳐주는 자비를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승불교는 무상에서 시작해서 반야로 자비로 돌아가는 것이다.
무상을 느끼고 도를 닦아야 한다. 무상을 느끼지 못하고 도를 닦는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면서 자신의 몸이 영원할 것이라 믿는 이에게는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마음 참정신을 찾아서 일체 근심걱정이 없어지고 나면 그 다음 할 일은 자비밖에 없다.
그래서 자비는 지혜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을 설명하기를 화엄경에서는 보현행원(普賢行願) 즉 원력을 세워서 자비행을 닦는 것이라 하였고,
법화경에서는 관세음보살보문품이다. 관세음보살보문품을 보면 전부 자비행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풍이고 부처님의 역사이다.

불교의 가는 길이 있는데, 그 길을 초기불교에서는 윤회에서부터 해탈하는 것이고,
대승불교에서는 무상을 느끼고 그 무상에서부터 반야를 체험하고 그 반야에서부터 자비행을 닦는 것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좋은 일이라는 것이 복을 구하는 구복(求福)행위이다. 또 수행자들은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대승불교에서는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도 부처님같이 자비행 공덕행을 닦으면,
구경성불(究竟成佛)하게 된다는 것이다.

관세음보살보문품을 자꾸 읽고 자비행을 닦으려고 애를 쓰고,
보현보살행원품을 자꾸 읽고 그렇게 원력을 세워서 공덕행을 닦으려고 애를 쓰면 전부가 구경성불하게 된다.
이것이 중생무변서원도의 원력이다.

공덕을 한번 심는 것이 바로 흙더미에서 보석을 캐어내는 것이다.
이몸을 가지고 닦지않고 아무리 가꾸어봐야 이 몸은 반드시 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몸이 가기 전에 공덕을 자꾸 닦으면 그 공덕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 분이 바로 아미타불이다.
아미타불은 보신불로 그 공덕의 보답으로 이루어진 몸이라 한다.

본래의 참사람은 바로 비로자나불이다.
광명변조(光明遍照)라 하여 그 광명이 온 우주에 찼고,
불신(佛身)이 충만어법계(充滿於法界)라 부처님의 몸이 법계에 가득하다는 것이 비로자나부처님이다.
온갖 곳에 다니면서 자비행을 하시는 분이 천백억화신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부처님들의 수인에서도 나타나듯 비로자나부처님의 근원과 이상을 나타내는 것은 수인(手印)이고,
혼자 생활할 때에는 고요히 선정에 드는 선정인(禪定印)이다.

쓸데없는 것을 너무 많이 보지 말고, 쓸데없는 것에 너무 시달리지 말고,
때때로 가만히 자기자리를 지키고 앉아있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나를 찾고 나를 키워야 한다.

일이 있을 때는 열심히 일하고 일해서 남는 것이 있으면 나눠주고,
할 일이 없을 때에는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 옛 도인들의 모습이다.

우리도 부처님같이 자꾸 공덕행을 닦아서 구경성불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아지랑이와 같이 허망한 생각과 파초와 같이 허약한 이 몸일지라도 이렇게 불법을 만났을 때,
자꾸 공덕을 닦으면 그렇게 성불을 해서 우리도 부처님과 같이 넓은 세상을 만날 수 있으니까!

이렇게 사람된 기회를 잃어버리지 말고 열심히 공덕을 닦아서 다 함께 구경성불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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