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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글 제목: <모래알 속의 우주> 1
전체글올린 게시글: 2018-09-19, (수) 3:27 am 

가입일: 2015-01-01, (목) 10:13 am
전체글: 215
현상들의 상호의존성과 불가분성(不可分性) / (1)

상호의존성이라는 개념은 실재의 본질에 대한 불교적 시각의 핵심이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관한 무한한 함축성을 담고 있다.
이 상호의존성이라는 개념은 양자역학의 불가분성이라는 개념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이 두 개념은 단순하고도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끔 이끈다.
하나의 ‘사물’ 혹은 하나의 ‘현상’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주의 현상들은 어떤 방식으로, 그리고 어는 정도까지 상호연관되어 있는가?
사물들이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사실을 바탕으로 삶에 대한 어떤 결론을 끌어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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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안 : 앞에서 배웠듯이, 불교는 창조원리와 평행우주의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불교는 우주가 생명과 의식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물리상수들과 초기조건들이 놀랍도록 정밀하게 조정되는 것을 ‘현상들의 상호의존성’으로 설명한다.
이제 그 개념에 대해 좀더 자세하게 설명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마티유 : 그러자면 먼저 ‘상대적 진리’라는 개념으로 돌아가야 한다.
불교에 따르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각은 고립된 원인과 조건에서 나오는 별개의 현상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상대적인 진리’ 혹은 ‘미망’이라고 불린다. 우리의 일상 경험은 사물들이 마치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내적으로 고유한 동일성을 갖고 있으며,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실체를 갖고 있다고 믿게 만든다. 그러나 현상들을 이렇게 바라보는 방식은 우리 정신이 만드는 한낱 구성물에 불과하다. 실재에 대한 이러한 시각에서 구성물은 상식적으로 보이지만 분석을 하면 허구성이 드러난다.

대신 불교는 만물이 다른 것들과의 관계 안에서만 존재한다는 개념, 상호인과성의 개념을 채택한다. 어떤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다른 요인들과 맺는 관계와 의존성을 통해서이다. 불교는 세계를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가 서로에게 관여하는 사건들의 거대한 흐름으로 간주한다. 우리가 이러한 흐름을 지각하는 방식은 우주의 몇몇 양상을 실체화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서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독자적인 실체가 존재한다는 환상을 만든다.

부처는 강론에서 실재를 진주들의 진열로 묘사했다. 각각의 진주에 다른 진주들이 비추어진다. 또한 진주들이 장식하고 있는 궁전이나 우주 전체도 비추어진다. 그것은 실재를 구성하는 각 요소들 안에 실재 전체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비유는 우주의 어디서든 전체에서 분리된 단 하나의 실체도 존재할 수 없다는 상호의존성의 개념을 훌륭히 예시한다.

투안 : ‘사건들의 흐름’이라는 개념은 현대 우주론에서 말하는 실재에 대한 이해방식과 유사하다. 가장 작은 원자에서부터 시작하여 우주 전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움직이고 진화한다. 어떠한 것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마티유 : 사물이 움직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특정한 각도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그것을 ‘사물’로 지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상에 불과한 속성을 세계에 부여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현상은 단지 상황에 따라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불교는 보통 사람이 지각하는, 그리고 과학자가 탐지하는 관습적 진리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인과법칙이나 물리법칙, 수학법칙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불교는 사물의 근본으로 다가가면 우리가 세계를 보는 방식과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확언할 뿐이다. 우리는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은 내재적으로 고유한 실체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투안 : 어떻게 사물의 궁극적 본질이 상호의존성에 결부되는가?

마티유 : ‘상호의존성’이라는 말은 ‘함께-나타남을 통해 존재하다’라는 의미를 갖는 산스크리트 말인 ‘pratitya samutpada'의 번역이다. 이 말은 두 가지 보완적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우선 ’저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생긴다‘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이것은 사물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기는 하지만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셈이다. 그리고 ’이것이 만들어진 후에 이것은 저것을 만든다‘라고 해석될 수도 있는데, 이는 어떠한 것도 그 자체의 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만물은 어떤 방식으로든 세계와 상호의존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현상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의존적으로’ 일어나며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 세계에 주어진 사물은 그것이 연관을 맺고, 조건을 주고받으며, 지속적인 변화 상태에서 함께-존재하고 함께-작용할 때만 나타날 수 있다. 현상들의 ‘존재’ 방식은 오로지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 있다.
우리는 ‘사물’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관계가 생긴다는 개념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는데, 역기서는 사정이 다르다. 현상의 특징은 오직 관계를 통해 규정된다.

상호의존성은 불교가 현상들의 비영속성과 비어 있음[空]으로 간주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비어 있음은 우리가 ‘실재’의 결여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이다.
7대 달라이라마는 이러한 생각을 한 편의 시로 요약했다.

우리는 상호의존성을 이해하면서 공을 이해하고
우리는 공을 이해하면서 상호의존성을 이해한다.
이것이 중도에 머무르는 시각이며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라는 무서운 절벽들 너머에 있는 시각이다.

상호의존성이라는 개념을 규정하는 또 하나의 방식은 ‘탄트라’라는 용어로 요약된다. 그것은 연속성의 개념과 ‘모든 것은 전체의 부분이어서 어떤 것도 각자 분리되어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우리는 상호의존성이라는 개념이 실재라는 개념을 손상시킨다고 생각하지만, 불교적 사유방식에서는 얄궂게도 상호의존성이 실재가 나타날 수 있도록 한다.
다른 모든 실체들과 독립하여 존재하는 실체의 개념을 생각하자. 불변적이고 독자적인 이러한 실체는 어떤 것에도 작용을 미치지 못할 것이고, 어떠한 것도 그것에 작용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현상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상호의존성이 요구된다.
이러한 논거는 물질을 구성하는 별개의 입자들이라는 개념을 논박한다. 상호의존성은 또한 자연적으로 의식을 포함한다. 주어진 대상의 실재는 그 대상을 의식하는 주체에 의존하고 있다. 슈뢰딩거는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했다.

“우리는 이를 의식하지도 못하고, 또 엄밀히 말해 고의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이해하려 하는 자연의 영역에서 인식의 주체를 배제한다. 우리는 세계에 속하지 않는 관찰자의 역할을 떠맡기 위해 한 걸음 물러선다. 세계는 이러한 절차를 통해 객관적 세계가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상호의존성 혹은 ‘의존적 기인(起因)’의 가장 미묘한 양상은 현상의 ‘지칭 기저(指稱 基底)’와 그 현상의 ‘지칭’에 관계한다. 어떤 현상의 위치, 형태, 크기, 색깔 혹은 가시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또 다른 특징들은 단지 그 ‘지칭 기저들’의 하나에 불과하다. 이러한 지칭은 현상에 별개의 실재를 부여하는 마음의 구성물이다.
일상 경험에서 어떤 대상이 나타날 때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명목상의 존재가 아니라 그 진정한 존재이다. 그러나 이 ‘대상’을 좀더 면밀히 분석해보면 그것이 많은 원인들과 조건들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독자적인 동일성을 따로 분리해낼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우리가 그 현상을 경험하는 이상 그 현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그 현상이 그 자체의 고유한 실재에 일치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내리는 결론은 대상이 존재하지만, (이렇게 해서 사물에 대한 허무주의적 이해방식을 피해간다) 그 존재방식은 순전히 명목적이고 관습적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또 하나의 반대되는 극단인 유물론적 실재론-이것은 불교에서 ‘영원주의’라 불린다-을 피해간다)
독자적인 존재를 갖고 있지 않지만 또한 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현상은 인과성에 따라 작용과 기능을 가질 수 있으며, 긍정적인 결과나 부정적인 결과에 이른다. 그러므로 실재에 대한 이러한 이해방식에 따라 우리는 행위의 결과를 예상할 수 있고 세계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티베트 시의 한 구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떤 것이 공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절대적인 실재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의존적’으로 생겨난다는 것은 그것이 내부의 고유한 존재를 갖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환상과 비슷한 세계라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공과 의존적인 기원이 의미하는 바를, 바르고 확실하게 이해한다면,
공과 가상이 하나의 사물 안에서 모순 없이 함께 일어난다고 덧붙일 필요가 없다.

-과학적 실험-
투안 : 상호의존성에 대한 당신의 말에 나도 공감한다. 과학 역시 소립자의 차원과 거시세계에서의 실재가 불가분적이고 상호의존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소립자의 현상들이 상호의존적이라는 증거는 아인슈타인과 프린스턴에서 함께 일한 두 사람의 공동연구자 보리스 포돌스키와 네이선 로젠이 1935년에 했던 유명한 사고 실험에서 나왔다. 이 실험은 세 사람의 이름의 첫 글자를 따서 EPR(電子常磁性共鳴)실험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실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빛이(물질 역시) 이중적 성질을 갖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른바 ‘광자(光子)’, ‘전자’, 그리고 물질의 또 다른 입자들은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처럼 어떤 때는 입자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파동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의 직관에서 가장 어긋나는 이상한 양자역학의 발견들 가운데 하나이다. 더욱 이상한 것은 관찰자의 역할이 입자가 파동의 상태에 있는지 입자의 상태에 있는지에 대한 차이를 만든다는 발견이다. 우리가 그 입자를 파동상태에서 관찰하면 그것은 입자가 된다. 그러나 관찰되지 않을 때는 파동상태로 존재한다.
‘광자’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광자가 파동으로 나타날 때, 양자역학은 그것이 마치 호수에 돌을 던져 생겨나는 파문처럼 공간의 모든 방향으로 퍼져나간다고 말한다. 이 상태에서 광자는 고정된 위치나 궤적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광자는 어디에서나 동시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광자가 이러한 파동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정해진 순간에 광자가 어디에 있을지를 결코 예측할 수 없다. 기껏해야 그것이 특정 장소에 있을 확률만 추산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확률은 75퍼센트나 90퍼센트는 될 수 있지만 결코 100퍼센트는 되지 않을 것이다. 확고한 결정론자였던 아인슈타인은 양자세계가 확률이나 우연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주장을 하면서, 양자역학 이론과 실재에 대한 그 이론의 확률론적 해석에서 결점을 발견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가 EPR 실험을 구상한 것도 이러한 목적에서였다.

실험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우선 당신이 광자라고 불리는 빛의 입자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는 측정기구를 만들었다고 상상하자. 이제 하나의 입자가 두 개의 광자 A와 B로 자연히 나누어진다고 상상하자. 대칭의 법칙 때문에 이 두 개의 빛 입자는 항상 서로 반대되는 방향을 향해 움직일 것이다. 만약 A가 북쪽으로 가면 우리는 남쪽에서 B를 검출할 것이다. 여태까지는 그런대로 잘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양자역학의 기묘함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양자역학이 옳다면, 탐지기에 의해 포착되기 전에 A는 입자의 양상이 아니라 파동의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이 파동은 위치가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A가 어떠한 방향에서나 발견될 수 있는 확률이 어느 정도 존재한다. A가 입자로 변하여 북쪽으로 가고 있음을 ‘아는’ 것은 오로지 그것이 포착될 때이다. 그러나 포착되기 전의 A가 자신이 어느 방향을 취했는지 미리 ‘알지’ 못했다면, 어떻게 B가 A의 운동을 ‘짐작하고’ 동일한 순간에 반대되는 방향에서 포착될 수 있도록 자신의 운동을 조정할 수 있었을까? A가 즉각적으로 B에게 자기가 취했던 방향을 알려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에게 그렇게나 소중했던 상대성이론은 어떤 신호도 빛보다 빨리 운동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A의 위치에 대한 정보가 제 시간에 B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빛의 속도보다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 A와 B는 둘 다 빛의 입자들이어서 빛의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신은 텔레파시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이러한 사고 실험의 결과를 근거로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이 실재에 대해 완벽하게 설명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의 생각에 A가 즉각적으로 B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릴 수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렇다면 A는 자신이 어떤 방향을 취할 것인지를 알고 B와 분리되기 전에 이러한 정보를 B에 전달해야 한다. 그러므로 A는 현재의 관찰과는 독립적인 객관적 실재성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A가 어떤 방향에서나 존재할 수 있다는 양자역학의 확률론적 해석은 틀린 것이다. 양자의 불확정성은 그 뒤에 더욱 근원적이고 내재적인 결정론을 숨기고 있는 게 틀림없다. 아인슈타인은 입자의 궤적을 결정하는 입자의 속도와 위치는 관찰행위와는 무관하게 그 입자에 국한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국소적(局所的) 실재론’이라 불리는 것이다. 양자역학은 ‘숨겨진 변수들’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입자의 궤도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이 틀렸다. 결국 물리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이 EPR 실험에서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일이 일어났음을 보여주었다. 양자역학-그리고 실재에 대한 양자역학의 확률론적 해석-은 창안된 이래로 조금도 결함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양자역학은 실험에 의해 올바른 것으로 확인되었고, 원자와 소립자의 세계를 기술하기 위한 가장 훌륭한 이론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마티유 : EPR 효과가 실험적으로 검증된 것은 언제인가?

투안 : 한동안 EPR은 단지 사고 실험의 상태에 머물고 있었다. 아무도 그것을 어떻게 물리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지 몰랐다. 1964년 ‘유럽 공동 원자핵 연구소(CERN)'에서 작업하던 아일랜드 물리학자 존 벨이 ’벨의 불평등‘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수학적 정리를 고안해냈다.
아인슈타인이 생각한 것처럼 숨겨진 변수들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이 정리는 실험적 측정에 의해 입증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정리는 마침내 형이상학적 차원에서부터 구체적 실험의 차원에 걸친 논쟁을 일으켰다.
1982년 오르세이 대학에서 프랑스 물리학자인 알랭 아스페와 그의 팀은 EPR 효과를 검사하기 위해 광자의 쌍(雙)에 대한 일련의 실험을 하여, 벨의 불평등성이 예외 없이 위배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인슈타인은 틀렸고 양자역학이 옳았다. 아스페의 실험에서 광자 A와 광자 B는 12미터 떨어져 있었지만, B는 A의 운동을 항상 즉각적으로 ‘알고’ 이에 따라 반응했다.

마티유 : 그것이 즉각적이며, 빛의 입자가 A에서 B로 정보를 전달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투안 : A와 B를 포착하는 탐지기들에 연결된 원자시계로 각각의 원자가 도착하는 순간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 두 원자의 도착시간 차이는 수백억 분의 1초 이하이다. (그 차이는 대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현재 원자 시계의 정확도는 10⁻ⁱ⁰ 초보다 작은 시간을 측정할 수 있다.) 그런데 10⁻ⁱ⁰ 초 동안 빛은 A와 B 사이의 거리인 12미터보다 짧은 3센티미터의 거리밖에 돌파할 수 없다. 게다가 두 광자 사이의 거리를 증가시켜도 결과는 동일하다. 빛이 이러한 거리를 주파하여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는 게 확실한데도 A와 B의 운동은 항상 정확하게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가장 최근의 실험은 1998년 제네바에서 스위스인 니콜라스 기진과 그의 동료들에 의해 실행되었다. 그들은 광자 쌍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했다. 하나는 광섬유를 통해 제네바 북쪽으로 보냈고 다른 하나는 남쪽으로 보냈다. 측정기구 사이의 거리는 10킬로미터이다. 광섬유의 끝에 도달한 후, 각각의 광자는 하나는 짧고 하나는 긴 두 가지 경로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다. 그런데 모든 경우에 광자들은 정확히 동일한 선택을 한다는 것이 관찰되었다. 그 광자들은 평균적으로 두 번에 한 번은 긴 경로를, 나머지 한 번은 짧은 경로를 선택했는데, 그 선택들이 항상 동일했다. 스위스의 물리학자들은 이 두 광자가 빛을 통해서는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것들이 반응하는 시간 차이는 300억분의 1초 이하이다. 이렇게 무한히 작은 시간이 경과하는 동안 빛은 두 광자 사이의 거리인 10킬로미터 중 9센티미터밖에 주파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전 물리학은 A와 B의 선택은 그들이 소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완전히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것들은 항상 완벽하게 상호 관련되어 있다. B가 항상 즉각적으로 A가 행하는 운동을 ‘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 역설은 단지 우리가 아인슈타인처럼 실재란 분할되어 있고 각각의 광자들 내에 국한되어 있다고 가정할 때만 역설이다. A와 B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되든 A와 B는 불가분적 실재의 일부를 이룬다는 것을 인정할 때 이 역설은 사라진다. A는 B에 신호를 보낼 필요가 없다. 두 광자(혹은 적어도 측정기구가 광자라고 지각하는 현상들)는 불가사의한 상호작용에 의해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어디에 있든지 두 번째 입자는 지속적으로 첫 번째 입자의 실재를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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