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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올린 게시글: 2018-09-06, (목) 4:24 am 

가입일: 2015-01-01, (목) 10:13 am
전체글: 210
신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마티유 : 좋다. 그럼 그 원리(창조 원리)를 검토해 보자. 우선 그것은 창조의 의지를 전제로 하는가?

투안 ; 내 견해는 상수들과 초기 조건들이 그 자신을 의식하는 우주에 이르도록 의도적으로 조정되었다는 것이다. 그 원리를 신이라 부르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당신 자유다. 나에게 있어 그것은 인격화된 신이 아니라 차라리 자연에 편재하는 범신론 원리이다. 이것은 아인슈타인과 스피노자의 견해와 어느 정도 유사하다.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학자는 보편적 인과관계에 사로잡혀 있다. .... 그의 종교적 감정은 자연 법칙의 조화 앞에서 열광적인 경이감의 형태를 취한다. 자연 법칙은 너무나 우월한 지성을 드러내고 있어서 그것과 비교할 때 모든 체계적인 사유와 인간의 행위는 너무나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그는 덧붙여 말한다.
“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조화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신을 믿는 것이지, 인간의 운명과 행위에 관심을 갖는 신을 믿는 것이 아니다.”

사실 현대 과학은 과거 서구의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고전적인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던 몇몇 논거들에 반대하는 많은 증거들을 제시했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논거들 가운데 하나는 복잡성에 근거를 둔 것인데, 이는 오로지 창조자만이 이렇게 복잡하고 구조화된 우주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시계는 시계 제작공에 의해 만들어져야지, 그것이 스스로를 조립할 수는 없다. 책상에 잉크 병과 펜과 종이를 던져놓는다고 책이 쓰여질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논거는 현대 과학에 의해 손상을 받았다.
현대 과학은 고도로 복잡한 체계도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 법칙과 생물학의 법칙에 따르는 완전히 자연스러운 진화로부터 생겨날 수 있으며, 시계 제작공과 같은 신에 의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성 토마스 아퀴나스, 칸트가 이용했던 ‘우주론적’ 논거가 나온다. 그것은 모든 것이 원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원인들의 무한한 연쇄는 존재할 수 없다. 그 연쇄는 필연적으로 최초 원인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그것이 신이다.
양자역학은 ‘모든 것은 원인이 있다’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했다. 베르니 하이젠베르크는 1927년 그의 유명한 ‘불확정성의 원리’를 통해 불확정성은 소립자 세계에 내재하는 것이며 소립자들은 어떤 원인도 필요없이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물질화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소립자처럼 우주는 이론상 양자 파동 덕분에 최초 원인 없이 자연 발생적으로 진공에서 생겨날 수 있다.

마티유 : 어떤 이유 태문에 원인들의 연쇄가 시간과 복잡성 안에서 무한하지 않아야 할까? 그것이 자연의 어떤 법칙에 어긋날까? 우리는 얼마나 많은 원인들을 거슬러 올라가야만 “이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앞으로 무한하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으니 원인 없는 창조자를 채택하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투안 : 물론 우주론적 논거는 시간의 선조적線條的 개념에 근거를 두고 있다. 다른 철학자들은 최초 원인의 필요성을 제거하기 위해 순환적 시간을 내세웠다.
그래서 선조적 진행<-여기서 사건 A가 일어나면 그것은 B의 원인이 되고 B가 C에 이르는 진행이 계속 되풀이된다->대신 순환적 진행<-여기서 A는 B의 원인이 되고 B는 C의 원인이 되고 이번에는 C가 A에 이른다->이 나온 것이다.
뱀은 자기 꼬리를 물고, 순환이 종결된다. 더 이상 최초 원인이 필요없는 것이다.

마티유 : 또 다른 기묘한 생각이군! 최초 원인이라는 개념처럼 종결된 순환이란 개념은 단지 무한의 개념을 참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탈출구이다.
당신이 소립자가 원인 없이 물질화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인과법칙을 ‘A가 B를 낳는다’는 단순한 논리에 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상들의 상호의존성의 작용에 의해 B가 우주 전체의 존재에서<-무수한 원인과 변동하는 관계들로부터-> 기인한다면, 우리가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났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투안 : 신의 존재에 반하는 또 다른 과학적 논거는 원인과 결과라는 개념 자체가 우주에 적용될 때 그 의미를 잃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시간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원인은 결과를 선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데 빅 뱅 이론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은 우주와 동시에 나타났다. 만약 빅 뱅 이전에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은 우주를 창조했다.”는 말에는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우주를 창조하는 행위는 시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신은 시간 속에 있는가, 바깥에 있는가?
아인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시간은 절대적이지 않다. 그것은 탄력적이어서, 운동의 가속이나 블랙홀 주변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강력한 중력장에 의해 늘어나거나 단축된다. 시간 속에 존재하는 신은 더 이상 전능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시간의 법칙에 종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 바깥에 있는 신은 전능할 것이지만 더 이상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행동은 시간 속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신이 시간을 초월한다면, 그는 이미 미래를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미리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데, 어째서 악에 대항하여 인간이 벌이는 투쟁에 일부러 개입하려 하겠는가?

마티유 : 신이 불변이라면 그는 창조할 수 없고, 신이 시간 속에 존재한다면 그는 불변이 아니다. 이야말로 최초의 원인이라는 개념이 도달하는 모순들 가운데 하나이다. 무엇이 이러한 논거를 편들어 정당화하는가?
-첫째로 최초 원인이 있다면 그것은 불변이어야 한다. 왜냐고? 정의상 그것은 자기 이외의 또 다른 이유는 없어야 하기 때문에 다른 것이 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런데 변화는 최초의 원인의 일부가 아니었던 다른 원인이 개입될 것이다.
-둘째로 불변의 실체가 어떻게 어떤 것을 창조할 수 있겠는가? 창조의 행위가 있다면 창조자는 거기에 개입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그가 개입되어 있다면, 창조는 필연적으로 진행 단계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이러한 진행 단계에 개입된 사물이나 사람은 불변이 아니다. 신이 시간과 우주를 창조했다고 말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에 동의할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창조는 여전히 과정인 채로 있고, 그 과정은 시간적이든 아니든 불변성과 양립할 수 없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이 점을 파악했기 때문에, 시초라는 개념은 믿음의 행위를 수반한다고 말했다.
불교는 이와 대조적으로 시초가 틀림없이 존재했다는 입장에 매달리지만 않는다면 그러한 믿음의 행위는 불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투안 : 신의 존재에 반하는 강력한 논거들은 많다. 그러나 내가 믿는 조직 원리는 ‘고전적인’ 신과는 아주 다르다. 나는 우주가 시작될 때 우주를 정밀하게 조정하는 조직 원리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 인격화된 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티유 : 그러나 조직 원리에 대해 말할 때 너무 막연하게 말하면 안 된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토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투안 : 이러한 문제들은 끊임없이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을 괴롭혀왔으며, 내가 그에 대한 답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여기서 나는 형이상학적인 내기를 걸고 있다. 과학은 이 문제에 대해 답변할 수 있는 특별한 권위를 갖고 있지 않다.

마티유 : 그러나 어떤 것에 대해 아무런 할 말도 없는 상태에서 그것의 존재를 전제할 수는 없다. 조직 원리가 어떠한 특성도 없다면, 그것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오컴의 면도날을 갖고 그것을 제거할 수도 있다. 이러한 조직 원리는 자기 자신에서 생겨났는가 혹은 어떤 원인들에서 기인하는가? 그것은 영원한가, 또 전능한가?

투안 : 전지, 전능 등은 신의 특징이다. 우리가 이러한 창조 원리를 창조자인 신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 물리학자들은 신에 대해 말하지 않고 차라리 물리 법칙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묘하게도 이러한 법칙들은 보통 신에게 부여된 속성을 연상시키고,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이들의 연관관계를 보게 된다. 예를 들면 물리 법칙은 보편적이어서 가장 작은 원자에서부터 가장 큰 은하에 이르기까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어디서나 적용된다.
그 법칙은 그것을 발견한 사람에 따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절대적이다. 그 법칙은 시간을 초월한다. 시간이나 항상 변화하는 현상들에 종속된 세계를 묘사하고 있지만 그 자체는 결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을 초월한 법칙들에 의해 기술되는 시간의 우주 안에서 살고 있다. 그 법칙은 전능하다. 모든 것에, 그리고 어디서나 적용되기 때문이다. 끝으로 그 법칙은 전지하다. 물질적 대상이 자신의 특정 상태를 알려주지 않아도 작용을 가하기 때문이다. 그 법칙은 미리 ‘알고’ 이러한 상태에 적절한 반응을 ‘법으로 제정한다’. 따라서 물리 법칙들이 갖는 속성은 신의 속성과 같다.

마티유 : 아직도 나는 어떤 점에서 그러한 법칙들이 창조 원리나 조직 원리가 존재한다는 걸 가리킨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것들은 단지 상호의존성의 본질을 반영한다.

투안 : 상호의존성이라는 개념은 우주가 생명과 의식을 수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물리 법칙들과 초기 조건들이 극도로 정밀하게 조정되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그 개념이 “왜 무보다는 오히려 유가 존재하는가?”라는 라이프니츠의 존재론적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마티유 : 조직 원리가 존재한다고 설정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문제에 대한 답변을 주지 않는다. 그런데 창조 원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원리는 일종의 실체인가 혹은 우주의 기능적 모델을 생각해냈던 일종의 의식인가? 그것은 의도를 갖고 있는가?

투안 :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조직 원리는 의식적이고 지성적인 관찰자를 창조하기를 원했다. 나는 우리의 우주가 자신의 방식으로 진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마티유 : 만약 그 원리가 창조를 결정했다면, 그것은 전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창조의 욕망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당신이 다른 식의 근거를 대면서 그 원리가 실제로 창조하기를 결정하지는 않았다고 말해도, 당신은 그 원리가 전능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창조할 결심도 하지 않았는데 창조했기 때문이다.
그 원리는 또한 시간을 초월하거나 불변적일 수 없다. 우리가 본 것처럼 창조의 과정에서 그 원칙은 필연적으로 변화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창조의 욕망을 갖는 것에서부터 창조를 한 것으로 이행되었는데, 그래서 더 이상 같은 식의 욕망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창조는 창조적 활동이 있기 때문에 변화를 내포한다. 창조 이후 그 원리는 더 이상 동일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창조 이전에는 창조자가 아니었고 창조 이후에는 창조자였기 때문이다. 그 원칙은 이렇게 해서 불변성을 잃어버린다.
조직 원리에 대한 또 다른 곤란한 문제는 그것이 원인 없이 생겨났는지, 혹은 그 자신의 원인을 갖고 있었는지 하는 것이다.

투안 : 내 생각으로는 그 원리는 그 자체의 원인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다시 과학의 영역에서 벗어나고 있다. 이것은 단지 내 신념의 문제이다.

마티유 : 만약 그 원리가 그 자체의 원인이라면, 불교는 그 원리가 반드시 불변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는 변화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다른 것에 의해 만들어졌던 것만이 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다른 모순에 빠진다. 그 원리가 불변이라면, 그것은 창조일 수 없다.
불교는 영속적인 것은 일시적인 것을 만들어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그 원리가 창조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불변이 아니다. 창조는 변화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어떤 창조자라도 자신의 창조로 인해 이번에는 자기가 변화되어야 한다. 각각의 행위는 상호작용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어떤 원인도 일방적일 수 없다. 인과법칙은 반드시 상호적이다. 어떤 창조자라도 자신의 창조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또 하나의 매우 중요한 점은 어떤 것이 자기 이외에는 원인이 없다면 그것은 상호의존성의 개념에 따라 다른 것들과 상호작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불교는 어떤 것도 스스로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투안 : 그러므로 각각의 사건과 실체에는 원인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무한히 회귀한다.

마티유 : 이러한 형태의 무한은 물론 서양의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믿음에 어긋난다. 종교적인 관점과 과학적 관점은 궁극적인 ‘시초’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시초를 찾고자 하는 욕망은 우리의 정신이 보통 지각하는 것처럼 만물이 확고부동한 실재를 갖고 있다는 확신에 근거를 두고 있다.

투안 : 양자역학으로 인해 우주의 최초 원인이라는 개념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사물의 ‘시초’는 더 이상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다.

마티유 : 시초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면-나는 그것에 동의한다-, 조직 원리 또한 필요하지 않다. 조직 원리가 어떻게 시초 없는 현상들을 조직할 수 있었겠는가? 기껏해야 진행방식을 변화시킬 것이다.
조직 원리에 반대하는 또 다른 논거는 다음과 같다.
창조 원리가 현상 세계 전체를 조직한다면, 그 세계의 모든 원인을 포함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창조의 바깥에 어떤 것이 존재할 것이다.

투안 : 논리적이군.

마티유 : 그런데 인과법칙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 때 어떤 원인이나 조건들이 빠져 있다고 말한다. 씨가 싹을 틔우지 않는 것은 그 씨에 결함이 있든지 혹은 습기나 열기가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필요한 모든 원인들과 조건들이 모여 결합되지 않으면, 결과가 일어날 수 없다. 반대로 모든 조건들과 원인들이 존재할 때,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일어나야만 한다. 만약 결과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직도 어떤 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창조 원리가 그 안에 우주의 모든 원인들과 조건들을 포함하고 있다면, 항상 우주 전체를 창조해야만 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영속적인 빅 뱅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투안 : 그것은 단 한순간도 멈출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마티유 : 바로 그렇다. 멈춘다면 창조 원리가 더 이상 창조의 모든 원인들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원리에는 또 다른 원리<-이 두 번째 원리는 일부의 원인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첫 번째 원리가 종속된다->의 도움이 필요하거나, 그 창조에 제동을 거는 조절 원칙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어쨌든 그것은 자신의 전능을 상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두 개의 가능성밖에 없다. 모든 원인들과 조건들을 포함하지는 않아서 창조할 수 없든지, 모든 원인들과 조건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어서 지속적으로 창조하는 것이다.

투안 : 그것 또한 말이 안 된다.

마티유 : 어떤 사람들은 창조자가 세계를 점진적으로 창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반론에 맞선다. 그런 말 역시 우주는 다수의 원인을 갖고 있었고 창조가 시작될 때 창조자가 이러한 모든 원인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후에 창조자는 어디서 이러한 원인들을 얻을 것인가?
또 다른 사람들은 창조자의 행위는 시간을 벗어나 있으며, 과거에 세계를 창조했고 미래에 세계를 창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창조를 일련의 사건들로 보는 것인데, 그 사건들은 창조자의 관점에서는 사실상 동시적인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자신 안에 우주의 모든 원인을 담고 있고, 그 결과 우주 전체를 끊임없이 창조해야만 한다는 창조 원리가 내포하는 문제를 피하지 못한다. 게다가 우주에서 일어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사건들이 모두 창조자의 관점에서 동시적이라면, 이 우주는 절대적 결정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무지를 일소하고 깨달음에 도달할 것을 목적으로 인격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모든 활동이 헛되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반면에 시작도 끝도 없는 상호의존적인 관계들의 작용에 의해서 현상들이 나타난다는 것은 절대적 결정론을 벗어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관계의 원인과 조건들은 무제한적이어서, 유일한 최초 원인으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시초나 창조라는 개념 전체에 반대하는 마지막 논거는 다음과 같다.
만약 창조자가 모든 원인들만이 아니라 모든 결과들을 보유하고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창조에 대해서 언급할 수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이미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어떤 힌두교 철학자들은 창조자가 불변적인 상태에 있으면서도 창조의 각 단계에서 해당 원인이 된다고 말했다. 마치 춤추는 사람이 서로 다른 의상을 입고 갖가지 안무를 연출하면서도 동일한 사람으로 남아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창조자가 우주의 유일한 원인이라는 생각에 어긋난다. 유일한 원인이 다양한 결과를 낳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변화하는 양상들을 갖는 단일성은 진정한 단일성이나 불변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결과가 단속적斷續的으로 나타날 때, 그 원인이 영원하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조직 원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 불교의 대안적 사유를 요약하면, 인과법칙에 의해 생겨나는 현상들의 근본적인 비영속성 때문에 가상의 세계에서 각 순간은 영속적인 끝이자 시작이다. 절대적 진리의 관점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사건들은 그 고유한 실체를 갖고 있지 않는 한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진정한 시작도 진정한 끝도 없다. 어떠한 것도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끝나는 것에 대해 생각할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만물을 만들었지만 그 자체는 오직 자신에 의해 만들어졌던 창조 원리를 찾을 필요가 없다.

투안 : 그러므로 불교는 일신론적 종교들에 저항하여 창조자로서의 신의 개념을 단호히 부인한다. 그런데 그것은 일상적으로 불교가 내미는 관용의 이미지와는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당신은 이러한 입장을 어떻게 다른 신앙들에 대한 존중과 조화시키는가?

마티유 : 당신이 아무리 관용적이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형이상학적인 관점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본성과 자질에 가장 잘 맞는 인격적 변화의 방법들을 존중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신해 대해 생각하는 방식도 여러 가지이다.
달라이라마의 말씀을 인용하자.

“신을 인격적인 신성으로서가 아니라 존재의 기초로 생각하면, 자비심과 같은 자질들 역시 존재의 신성한 기초로 돌릴 수 있다. 그러므로 신을 이러한 의미로, 즉 존재의 궁극적 기초로 이해할 수 있다면, 불교의 사상과 수행의 몇몇 요소들을 비교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 구도, 과학, 휴머니즘, 불가지론을 혼합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관용의 목적이 아니다. 달라이라마는 이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개인적으로는 보편적인 종교를 찾을 것을 주장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그 차이들을 무시하면서 비교 연구를 너무 멀리까지 밀고 나간다면, 우리가 바로 그러한 결과에 이르게 될 것이다!”
-형이상학적 입장은 분명하게 표명되어야 한다. 그에 대해 애매함을 유지할 이유는 전혀 없다. 만약 잘못된 것이 있다면 그것을 입증하자. 불교는 형이상학적 입장이 잘못된 것이라고 증명된다면 그 잘못을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불관용은 어떤 진리에 너무나 확신을 갖고 있어서, 자발적이든 심지어 강제에 의해서든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강요하고자 하는 데 있다. 자신에게 적합한 것이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도 적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정도로 충분히 개방적인 마음을 가져야 한다.
“자기가 어떤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고 해서, ‘이것은 네게 맛이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먹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의 체질에 따라 자기의 육체적인 건강에 가장 좋은 것을 섭취해야 한다.”
정신적인 수행의 차원에서 신을 믿는 것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창조자와 함께 나누는 친밀감을 주고, 그들이 사랑과 이타주의를 함양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에 대한 신의 사랑에 참여하도록 격려할 수 있다. 또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 상호의존성과 인과법칙에 대한 깊은 이해는, 깨달음에 도달하려는 욕망과 연결될 때 사랑과 자비심을 키우는 더욱 강력한 영감의 원천이 된다.

“어떤 사람이 구도의 길에 들어섰을 때, 그 수행은 자신의 정신적 발전과 자질과 정신적 성향에 가장 적합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을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마음이 따뜻하고 온전하고 착하고 친절한 사람으로 만들어줄 내면적인 변화, 내면적인 고요함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정신적인 양식을 추구할 때 고려해야만 하는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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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편은 <모래알 속의 우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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