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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올린 게시글: 2017-11-09, (목) 1:41 am 

가입일: 2015-01-01, (목) 10:13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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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비존재(2)
우주에는 시초가 있는가?

투안: 18세기의 위대한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시몽 드 라플라스에 대한 유명한 일화를 기억하는가? 그가 자신이 쓴 <천체 역학론>을 나폴레옹에게 증정했을 때, 황제는 그가 ‘위대한 건축가’인 신에 대해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고 나무랐다. 라플라스는 “전하, 저는 그러한 가정이 필요하지 않습니다.”라고 응수했다.
그러나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왜 우주가 존재하는가? 왜 법칙이 존재하는가? 왜 빅뱅이 있었는가?” 우리는 라이프니츠의 유명한 질문으로 넘어간다.
“왜 무가 아니라 오히려 유가 존재하는가? 왜냐하면 무가 유보다 더욱 단순하고 쉽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물들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상정한다면, 왜 그것들이 저런 식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존재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마티유: 우리는 나가르주나의 유명한 말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공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지혜의 완성론>은 명확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사물은 비어 있는 것이고, 비어 있기 때문에 사물은 나타난다(色卽是空 空卽是色).”라고 말한다.
불교에 따르면 공이란 현상들의 궁극적 본질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현상들이 무한히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도록 하는 잠재력이다. 단순하게 비유하면, 대륙이나 나무나 숲은 공간이 제공되었기 때문에 발현될 수 있다. 만약 하늘이 돌로 만들어져 있다면, 그다지 대단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약 실재와 속성이 불변적이고 영속적이라면, 조금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상들이 나타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물에 그 자체의 실재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사물은 무한히 발현될 수 있다.
만물이 그 자체로 비어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사물들이 상대적인 혹은 관습적인 진리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그만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현상에 실재성이 결여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되는 대로 우연히 발생하지 않는다. 이것이 불교의 공이다. 공은 무가 아니라 영속적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현상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투안: 그렇다. 그러나 사실 많은 사람들이 공의 개념을 무에 결부시키고 있으며, 19세기에 불교는 허무주의라는 비난을 받았다.

마티유: 그것은 심각한 오해이다. 우리는 잘못된 두 가지 극단적인 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허무주의와 유물론적 실재론이다. 불교에서 ‘불멸주의’라고 부르는 이 유물론적 실재론은 확고부동한 구성요소들로 이루어진 불변의 물질이 존재한다고 가정함으로써 세계를 구체적인 사물로 만든다. 게다가 라이프니츠는 “왜 무가 아니라 오히려 유가 존재하는가.”를 자문했을 때 정말로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삼은 것이다. 불교의 중도(中道)에 따르면, 아무 것도 없는 것(허무주의)도 아니고 어떤 것이 있는 것(유물론적 실재론)도 아니다. 그러므로 라이프니츠에게 반대로 이러한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상들이 가능한데 왜 무가 있어야만 하는가?” 상호의존적인 현상들의 본질은 일반적인 상식과 어긋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존재한다고도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적 능력에는 한계가 있어서 일상적 개념을 통해서는 실재의 진정한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 관습적 사유를 초월하는 직접적인 앎만이 비이원적(非二元的) 방식에 의거해서 현상 세계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 비이원적 방식에서는 주체와 객체라는 개념이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투안: 그럼 우리의 세계가 어떻게 나타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불교에서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불교는 우주론을 갖고 있는가?

마티유: 물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교의로서 제시되지 않는다. 오늘날 그 설명의 몇몇 부분은 시대에 뒤떨어졌지만 여전히 명상 수행에 결부된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 그것들은 불교에 의해 채택되었던 당시의 관념에 일치하지만 부처 자신이 그것이 절대적 진리라고 가르친 바는 없다. 이러한 우주론은 ‘실재’에 대한 불교의 분석과 모순되지는 않지만, 우주의 형성에 대한 관념은 상대적 진리와 가상의 세계에 속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래서 불교는 상대적 관점에서 우주가 ‘공간 입자들’에서 형성되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물질의 조각이 아니라 잠재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간 입자들에서 다섯 가지 ‘기(氣)’ 혹은 에너지(산스크리트어로는 ‘prana')로 가득 찬 ’진공‘이 생겨났다. 이러한 에너지들은 오색(五色)의 빛 형태로 나타나고, 그 빛들은 차차 다섯 가지 원소인 공기, 물, 흙, 불, 공간으로 물질화되었다. 이것들이 결합하여 일종의 ’수프‘, 즉 원소들의 바다를 만드는데, 이 바다가 최초 에너지에 의해 휘저어져 천체와 대륙, 산, 마지막으로 생명체들을 만든다. 이것이 무수하게 존재하는 우주들 가운데서 하나의 우주가 형성되는 방식이다. 여기에는 최초의 창조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최초의 원인도 받아들여질 수 없기 때문이다.

투안: 비유적인 언어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설명은 현대 과학의 생각과 놀랄 정도로 비슷하다. 이 두 가지 관점은 신들의 사랑과 증오의 결과로 세계의 탄생을 이해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과학과 불교에서 동시에 볼 수 있는 ‘충만한 진공’의 개념에 특히 흥미를 느낀다.

마티유: 물론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과학은 존재하는 독립적인 대상으로서의 우주에 대해 말한다. 반면 불교에서는 우주란 의식에서 독립한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 우리는 주체와 객체가 서로를 형성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객체는 주체 없이 존재하지 못하고 주체는 객체 없이 존재하지 못한다.
불교는 순환적 우주(그렇지만 스토아주의자들의 우주처럼 주기적인 것도 반복적인 것도 아니다)를 염두에 둔다. 각각의 순환은 형성, 지속, 파괴, ‘발현되지 않는’ 상태(두 우주 사이의 중간에 있는 진공)에 상응하는 네 시기로 이루어진다. 공간 입자들은 한 우주가 다음 우주로 넘어갈 때의 지속성을 보장한다. 이러한 순환은 시작도 끝도 없다.

투안: ‘순환적 우주’라는 개념은 현대 우주론에서도 나타난다. 우리의 우주가 충분한 물질을 포함하고 있다면, 이러한 물질의 중력은 어떤 한 순간에 우주가 팽창하는 것을 중단시키고 은하들이 멀어지는 운동을 역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빅뱅의 반대인 빅크런치(big crunch), 즉 ‘대축소’가 일어날 것이다. 별들은 강렬한 열기 안에서 증발될 것이고 물질은 소립자로 분해될 것이다. 우주는 내부적으로 파괴되면서 극도로 작고 온도와 밀도가 높은 상태에서 자신의 삶을 끝낼 것이다. 시간과 공간은 다시 모든 의미를 잃을 것이다. 자기 안으로 붕괴되는 우주는 불사조처럼 자신의 재에서 다시 태어나, 어쩌면 새로운 물리 법칙을 가지고 새로운 순환을 시작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우리가 방금 말한 것처럼 현대 물리학은 플랑크의 시간을 파악할 수 없고, 그러한 초온도와 초밀도를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마티유: 불교의 견해에 따르면, 한 순환의 종말은 최후의 불길로 나타난다고 한다. 점점 더 강렬해지는 일곱 개의 불길이 가시세계를 태울 것이라고 한다. 그때 우주는 진공 속으로 다시 흡수되는데, 그로부터 새로운 순환이 나타날 수 있다.

투안: 현대의 우주론에 따르면, 만약 우주가 다른 순환들을 시작한다면 그 순환들은 모두 서로 다를 것이다. 우주는 점점 더 많은 에너지를 축적하게 될 텐데, 그 결과 각각의 새로운 순환은 이전의 순환보다 더욱 오래 지속될 것이고 우주의 최대 크기는 점점 더 커질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방금 말했던 비반복적으로 순환하는 우주라는 개념과 유사하다. 그러나 우주가 충분한 물질을 내포하고 있지 않아서 중력이 우주의 팽창을 중단시키지 못하면 우주는 시간이 끝날 때까지 밀도가 낮아지게 될 것이고 순환하지 못할 것이다. 종말에 이르면 별들은 자기가 가진 핵연료를 모두 태워버리고 꺼질 것이다. 그것들은 더 이상 창공을 밝히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세계는 기나긴 어두운 밤 속에 잠기게 될 것이다. 열은 차츰 사라질 것이고, 온도는 절대 온도 제로에 절대로 도달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에 점점 더 근접할 것이다. 생명을 유지시킬 수 있는 에너지가 더 이상 없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생명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매우 먼 미래에 우주는 단지 복사선과 소립자들의 광대한 대양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지식에 따르면, 팽창운동이 역전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우리가 관찰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물질이 필요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주에 내포된 물질의 양을 알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조금도 방사를 하지 않으면서 그 주위에 미치는 중력효과에 의해서만 나타나는 엄청난 양의 ‘암흑물질(적어도 전체의 90퍼센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빛이 없어서 천문학자는 문자 그대로 암흑 속에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
멀리 떨어진 은하들에 있는 초신성(폭발하는 별)들에 대한 최근의 관찰은 우주의 폭발이 감속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만약 오로지 중력의 힘만 작용한다면 이것이 맞을 것이다-실제로는 가속상태에 있음을 알려주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가속적인 팽창은 우주에 제5원소라고 불리는 신비스러운 ‘암흑 에너지’가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옳다고 판명된다면, 우주는 영원히 팽창할 것이다. 만약 빅크런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순환을 시작할 새로운 빅뱅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주가 언제나 더 빠르게 팽창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빅크런치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멀리 떨어진 초신성들의 속성은 아직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이러한 결론은 지금으로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나는 우주 배경복사의 온도가 변동을 보인다는 최근의 관찰 역시 ‘암흑 에너지’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마티유: 시초 없는 변형의 연속으로 묘사되는 우주는 단지 물질의 우주만이 아니다. 의식 역시 시초가 없다. 불교에서 물질과 의식의 이원성, 이른바 심신(心身)의 문제는 물질과 의식이 내적으로 고유한 독립적인 실재를 갖지 않는 이상 잘못된 문제이다. 현상들과 의식에 최초 원인이 결여되어 있다는 문제는 불교가 ‘불가해한’ 것이라고 부르는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우리의 지적 능력이 해결할 수 없는 신비 앞에서 이해할 수 없다고 침묵하고 체념할 필요는 없다. 어떤 것들은 다만 우리의 일상적인 관념으로 볼 때 이해될 수 없을 뿐이다. 이러한 시초의 개념이 불가해한 이유는 시초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추론적 정신이 모든 개념을 넘어서 시초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시초의 과정에서 멀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사유방식은 시초와 동일한 과정에서 출현했기 때문에 인과성의 연쇄 ‘바깥에’ 위치하여 그 자신의 기원을 규정할 수 없다.

투안: 그 말은 마치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定理)처럼 들린다. 독일의 유명한 수학자인 쿠르트 괴델이 생각해낸 정리에 따르면 어떤 체계의 내부에 머물러 있는 한 그 체계가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음을 증명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 체계의 바깥으로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그 체계-예를 들면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체계-의 일부인 이상 우리는 그 체계를 아는 데 항상 제약을 받게 된다. 어쨌든 현대 과학은 시간이 시작된 이후로 의식과 물질이 공존할 수 있다는 가정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

마티유: 이 불가해한 성격은 현상들을 독자적인 ‘진정한’ 실제로 보게 만드는 물화적(物化的) 본능을 없애는 데 도움을 준다. 현상의 궁극적 본질은 ‘존재’와 ‘비존재’라는 지적 개념 너머에 있기 때문에 불가해한 것으로 규정될 수 있는데, 그렇다고 이것이 무지와 동의어는 아니다. 정반대로 순수한 자각, 마음과 현상의 궁극적 본성에 대해 모든 개념을 넘어서 비이원적인 방식으로 아는 것, 이것이 깨달음의 특징이다.
더욱 내면적인 명상의 차원에서 현상의 발현을 분석하는 불교의 몇몇 가르침(탄트라)에 따르면, 현상의 최초 본질은 주체와 객체의 개념,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넘어서 있다. 그러나 현상 세계가 최초 본질로부터 나타날 때 정신은 이러한 통일성을 시야에서 놓치고 의식과 세계 사이에 잘못된 분별을 세운다. 그때 이 자아와 비(非)자아 사이의 분리가 고착되고, 이렇게 해서 무지의 세계(윤회전생)가 생겨난다. 이러한 윤회전생의 탄생은 특정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할 때마다 무지가 세계를 구체적 사물로 만드는 방식을 반영할 뿐이다.
/////////(존재와 비존재-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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