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yber; Lotus-America Buddhist College

<Lotus University - America Buddhist College>

* 잦은 질문    * 찾기

현재 시간 2018-01-20, (토) 7:56 am

댓글없는 게시글 보기 | 진행 중인 주제글 보기

모든 시간은 UTC + 9 시간 으로 표시합니다

새 주제 게시글 주제글에 댓글 달기  [ 1 개의 게시글 ] 
글쓴이 메세지
전체글올린 게시글: 2017-10-30, (월) 12:19 am 

가입일: 2015-01-01, (목) 10:13 am
전체글: 189
교차로에서(2)
과학과 불교가 서로 대화를 나눌 이유가 있는가?

투안: 나는 오래 전부터 과학계에 대해 실망스럽다고 생각해왔던 문제가 있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열아홉 살에 칼텍에 갔는데, 그 당시 칼텍은 세계 과학의 메카였다. 나는 거기서 과학의 위대한 최고 권위자들인 노벨상 수상자들과 그 외의 과학 아카데미 회원들을 만났다. 순진하게도 나는 그들이 갖고 있는 능력과 창조성만큼이나 그들이 인생과 인간관계라는 또 다른 영역에서도 뛰어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지독한 실망감을 맛보았다. 일상생활에서는 최악의 인간이면서도 위대한 과학자일 수 있고, 자기 전문분야에서는 천재일 수 있다. 이러한 괴리는 대단한 충격을 주었다. 나는 불교나 다른 형태의 구도들이 과학이 미칠 수 없는 곳, 특히 윤리의 영역에서 과학을 보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학사를 살펴보면 과학자로서는 위대했지만 인간관계의 영역에서는 그다지 모범적이지 못한 사람들의 예를 많이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아인슈타인과 더불어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인 뉴턴이 그런 사람이다. 그는 런던 왕립학회에서 독재자로 군림했으며, 라이프니츠가 독자적인 방식으로 미적분을 생각해 냈는데도 자기에게서 미적분의 발명을 도용했다고 그를 부당하게 비난했으며, 경쟁자인 왕실 천문학자 존 플램스티드를 혹독하게 대했다. 이보다 더 한심스러운 예도 있다. 독일 물리학자인 필립 레나르트와 요하네스 슈타르크는 둘 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데, 나치즘과 나치즘의 반유대인 정책을 열광적으로 지지했고, ‘유대 과학’에 대한 ‘독일 과학’의 우수성을 부르짖었다.

간혹 과학적 천재성에 도덕성과 윤리성을 겸비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러한 경우는 유감스럽게도 너무 드물다. 미국의 <타임>지가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인물로 선정했던 아인슈타인의 경우가 그렇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아인슈타인은 전쟁에 반대하는 청원서에 서명함으로써 과감히 독일 황제의 분노에 맞섰다. 독일 나치즘의 대두에 직면하여 그는 열광적인 유대 민족주의자가 되었지만 유대 국가를 입안하는 과정에서 아랍인들의 권리 문제를 제기했다. 미국에 망명한 그는 열렬한 평화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에 대항하는 군사적 개입을 지지했다. 그는 연합군이 핵무기 개발에서 독일을 꺾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가 최초의 원자탄 제조를 위한 맨해튼 계획의 발단이 되었다. 하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폐허가 된 후에는 핵무기 확산 금지를 위해 강력한 투쟁을 벌였다. 그는 매카시즘에 반대했고, 모든 형태의 광신과 인종 차별주의를 공격하기 위해 자신의 막대한 영향력을 이용했다. 그러나 사생활에서는 그늘진 구석이 없지 않았다. 그는 집안에 무관심한 가장이었고 가끔 바람을 피우는 남편이어서, 첫 번째 부인과 이혼하고 그녀가 낳은 장애인 딸을 돌보지 않았다. 그 스스로가 말하는 것처럼, 그의 인격적인 차원에서는 일종의 균열을 엿볼 수 있다.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인생에 결정적인 전환이 일어나는데, 이후 나는 개인적이고 일시적인 일에는 점차 관심이 멀어져 나 자신의 모든 노력을 사물을 지적으로 이해하는 데 바치게 된다.”

마티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과학자를 비난하고 또 어떤 과학자에게는 찬사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재능과 인간적 가치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관계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확인을 통해 우리는 과학을 정당한 제자리에 돌려놓을 수 있고, 더욱 폭넓은 삶의 전망 안에서 과학의 위치를 설정할 수 있으며, 과학의 올바른 이용이라는 문제를 더욱 날카롭게 제기할 수 있다.

구도란 인격적인 변화의 과정이며, 단순히 과학을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다. 구도야말로 정말 과학계의 문제이다. 인격적인 변화란 거기에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바치는 사람에게도 쉬운 일이 아닌데, 하물며 이러한 변화의 부차적인 중요성만 인정한다면 성공의 가망성은 더욱 희박해진다. 삶의 핵심에 자리잡아야할 것을 부차적인 자리로 내몰거나 임의로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격하시키는 일은 과학적 기획의 전반에 걸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과학의 의도는 명백하지 않고, 수단은 정확히 평가되지 않으며, 결과는 양면성을 갖는다. 근본적으로 긍정적이고 분별 있는 동기 없이 가능성의 한계를 탐구하는 일이 바람직하거나 꼭 필요한 것에 대해 검토하는 것보다 많다.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자신이 할 일은 탐구하고 발견하는 것이며, 발견한 것을 이용하는 문제는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입장은 망상이자 의도적인 눈감기이며, 더 나쁘게 말하면 자기기만에 속한다. 지식은 권력을 부여하고, 권력은 책임감, 즉 자신의 행위에서 나오는 직접적인 결과이든 간접적인 결과이든 그 모든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감정을 요구한다. 훌륭한 의도를 갖고 추진되었던 과학적 연구가 그것을 의심스러운 목적으로 이용하는 정치가나 군인, 사업가들의 수중에 들어가는 일을 흔히 볼 수 있다. 어떤 연구는 ‘오용’될 가능성이 많다고 예상되는데도 그 연구의 정당성을 의심하는 과학자들은 거의 없다. 대체로 그들이 의심하는 때는 원자탄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일단 피해가 발생한 후이다. 심지어 어떤 과학자들은 기초연구는 중립적이라는 등의 핑계를 내세우며, 세균무기나 고통을 주는 그 밖의 도구들을 개조하는데 공공연히 협력한다.

투안: 과학자가 사정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살인과 대량 파괴 도구를 개발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베트남 전쟁 중 나는 미국의 몇몇 위대한 과학자들-그들 중에는 노벨상 수상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이 신무기를 개발할 목적으로 미국 국방성이 구성한 ‘제이슨 국(局)’의 연구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고 대단히 충격을 받았다. 나는 우수한 두뇌들이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무기를 고안하기 위해 매달 모일 수 있다는 사실에 격분했다.

마티유: 1936년부터 1976년 사이에 스웨덴 정부는 ‘열등한 인간’으로 판정된 6만 명을 거세했다. 1932년부터 1972년 사이에 앨리배마 주(州)의 400명의 미국 시민들-그들은 모두 가난한 흑인들이었다-이 매독의 장기적인 진행 과정을 연구한다는 목적만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실험용 마멋으로 이용되었다. 환자들은 무료로 제공하는 진료와 또 다른 사소한 혜택(그 중에는 장례비조의 5,000달러가 포함되어 있었다.)을 약속받고 정기적으로 보건소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사실 그들은 어떠한 치료도 받는 적이 없었다. 단지 치료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매독이 진행되는 과정을 연구하는 것이 관건이었으며, 그 연구를 이끌었던 훌륭한 의사와 과학자들은 연구 결과를 그들 못지않게 존경받는 의학지에 실었다. 그 병으로 28명의 환자들이 죽었고, 부수적인 합병증으로 100명이 죽었으며, 40명의 부인들과 19명의 아기들이 감염되었다. 이 사실이 신문기자인 진 헬러에 의해 대중에게 폭로되자 연구는 갑자기 중단되었다. 이 연구에 연루된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유감을 표명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나치의 의사들이 아니라 자유국가의 시민인 관리들과 연구원들이 관련되어 있었다. 결국 희생자들에게는 하찮은 보상금만 돌아갔으며, 어떤 의사도 법정에 기소되지 않았다. 겨우 1997년이 되어서야 클린턴 대통령이 미국민의 이름으로 사과했다.

1978년 의사 히사토 요시무라는 ‘환경 적응학’에 관한 연구로 일본에서 가장 영예로운 훈장을 받았다. 요시무라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과 중국의 포로들을 대상으로 실험했던 731부대의 부대장이었다. 환경 적응에 관한 그의 연구는 포로들을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담근 다음 그들의 사지가 얼기 시작하는 순간을 측정하기 위해 그들을 망치로 치는 것이었다. 또 다른 실험으로는 중국 어린이들에게 탄저병 세균에 감염된 초콜릿을 나누어준 다음 얼마 후에 그들이 죽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있었다. 이러한 예들은 물론 인류의 운명을 개선하기 위해 과학이 기울였던 엄청난 노력과 비교하면 예외적인 것이지만, 어쨌든 과학이란 그 자체의 고유한 윤리를 갖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투안: 나는 과학자들이 자기 연구의 결과에 대해 방관할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들은 책임을 져야 한다. 특히 군인들이 전쟁을 하기 위해, 정치가들이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사업가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환경을 파괴하면서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그들의 연구를 이용할 때는 말할 것도 없다.

마티유: 부유한 국가들은 종종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내는 위선적인 일을 하는데, 무기 거래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세계 무기의 95%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5개 상임이사국에 의해 제조되고 판매된다. 이 일도 역시 윤리와 책임감이 완전히 붕괴된 것이다.
부유한 국가들이 자원을 낭비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60억 달러면 전 세계인의 기초 교육을 보장할 수 있는 금액이다. 그런데 매년 유럽과 미국에서 향수를 사는 데 120억 달러가, 전 세계적으로 마약 소비에 4,000억 달러가, 군사비로 7,000억 달러가 지출되고 있다.

투안: 그렇지만 인간의 지성을 나무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양식에서 벗어난 행동들 때문에 기초 연구를 비난할 수는 없다. 이 두 가지는 단지 도구에 불과하다.

마티유: 물론이다. 연구 결과를 해롭게 혹은 쓸데없이 사용하는 것은 결국 윤리의 빈약함을 반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변명이 되지는 않는다. 과학 연구를 응용한 것들 가운데 몇 가지(예를 들면 유전학과 원자력)가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 윤리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전문 위원회들이 반성할 일기긴 하지만, 일상생활에 있어 그 위원회들이 내리는 결정은 영향력이 미미하다. 정치적 기회주의와 신성불가침한 시장의 법칙이 지배력을 갖고 있다.
미국 제약회사인 글락소가 매우 좋은 예인데, 그 회사는 만약 남아프리카의 정부들과 타이 정부가 에이즈의 삼중요법 약품을 누구나 살 수 있는 가격으로 생산한다면 그 정부들을 법정에 기소하겠다고 위협했다. 이렇게 해서 글락소는 수백만 명의 환자들이 몇 년 더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박탈했다. 이것은 이타주의를 명백하고 파렴치하게 거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부유한 국가에서는 에이즈 연구를 위한 자금이 부족하지 않으며, 가난한 나라에서 이러한 약품을 대량으로 생산하게 내버려둔다 해도 글락소의 총 매상고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환자들은 미국 제품을 살 돈이 없기 때문이다.
공식적인 추정에 따르면 내가 살고 있는 네팔에서 인구의 5~10%가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는데, 아무도 삼중요법에 의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약품들은 심지어 수입조차 되지 않고 있다. 글락소가 독점권을 가지고 있는 요법은 한 달에 약 500달러가 드는 반면, 근로자의 한 달 평균 임금은 15달러이다. 나는 정직한 과학자라면 이 정도로 역겨운 사업 전략에 대해 혐오감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단순히 말하면 그것은 인명구조 태만죄에 해당된다.
또 다른 충격적인 예는 인류의 생활환경이 대기 오염가스로 인해 심각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 명백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대기 오염가스 방출을 제한하는 일에 대해 완전히 무능하다는 것이다. 각 개인의 결단에 의지한 전 세계적인 운동만이 이러한 현상에 제동을 걸 수 있다. 불교와 같은 비교조주의적인 정신적 태도가 유효한 기여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마 이러한 상황에서일 것이다.

투안: 어떤 방식으로?

마티유: 내가 말하는 ‘비교조주의적인’ 태도는 순진하게 과거의 삶의 양식으로 돌아가자는 명분을 내세워 ‘발전’을 비난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간 경제 성장이나 기술적 업적에 의해 평가되는 발전이 우리의 행복에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하지도 않는 태도를 의미한다. 우리의 목적이 만족스런 삶을 사는 것이라면, 그러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도 있고 없어도 무망한 것들도 있다. 우리는 불교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우리의 목적과 활동에 우선순위를 매기고 우리의 삶을 통제할 수 있다. 행복과 고통의 메커니즘에 대한 불교의 분석은 이기주의와 이타주의가 빚어내는 서로 다른 결과를 분명히 보여준다.

투안: 그것이 어떻게 윤리에 이르게 되는가?

마티유: 사실 윤리의 기초는 매우 단순하다. 그 자체로 선한 것과 악한 것은 없다. 단지 우리와 타인들에게 주는 행복과 고통에 의거해서 선과 악이 있는 법이다. 다른 사람들의 행복이 우리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이타적인 태도를 채택할 때 판단의 가장 확실한 지침이 된다. 이렇게 되면 일상생활 속에서 어떤 행위가 더욱 많은 행복을 만들고 어떤 행위가 더욱 많은 고통을 덜어 줄 것인지 훨씬 더 쉽게 알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도덕이론이나 미리 설정된 규칙보다는 직접적인 체험이다. 이것은 동기에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 대상을 식별하여 인식하는 정신(識)은 놓이는 장소에 따라 그곳의 색깔을 띠는 수정에 비유된다. 그것은 중립적이다. 우리의 의도야말로 행위의 겉모습이 어떻든 진정한 성격을 결정한다.
증오, 탐욕, 자만심 혹은 질투에 사로잡혀 행동하는 사람들을 비난하자는 것도 아니고, 이러한 파괴적 감정을 피할 수 없는 삶의 요소로 용인하자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감정들을 노력하면 제거할 수 있는 병의 증상들로 대하는 것이다. 불교의 태도는 간단히 말해서 매우 실용적이다. 과학 연구는 우리에게 정보는 주지만, 정신적 성장이나 내면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반대로 정신적이고 명상적인 해결 방법은 우리가 세계를 지각하고 세계에 작용을 가하는 방식을 심오하게 변화시킨다. 예를 들면 양자물리학에서처럼 의식이 현상 세계의 총체적 현실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인격적인 경험을 통해서 우리의 의식이 이러한 총체적 현실의 일부를 이루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렇게 이론적인 지식에서 직접적인 경험으로 이행하는 것이 윤리의 문제를 푸는 열쇠이다. 윤리가 우리의 내면적인 자질을 반영하고 행동의 지침이 될 때, 우리의 생각과 말, 행위에서 자연적으로 나타나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투안: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이론과 경험이 합치되는 것이다.

마티유: 물론이다. 이론이 합치되어야 경험의 힘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자신의 의식이 실재 전체와 본질적으로 얽혀 있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발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의 정신은 이러한 발견이 함축하고 있는 결과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하며, 우리의 삶은 그로 인해 변화되어야 한다. 성숙한 불교 수행자는 자신이 세계와 상호의존적임을 지각할 때 그것이 모든 중생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자비심으로 나타나고, 자신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변형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를 들면 달라이라마를 만났던 사람들은 그와 함께 보냈던 잠깐 동안의 시간이 사랑과 자비심에 대한 수백 회의 연설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는 걸 알고 있다.
발견과 변화의 불교적 방법은 보통 점진적인 성격을 갖는다. 말씀을 듣고[聲聞] 공부하는 것[獨覺]부터 시작하여 지적 성찰로 이어지고, 명상을 통해 사물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행동을 우리 존재 안에서 통합함으로써 절정에 달한다. 이 경우에 명상한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지각과 친숙해지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현명한 사람들을 거의 배출하지 않고 있다. 우리 사회는 위대한 사상가들로 구성된 윤리위원회를 만든다. 그러한 위원회에 인간적 자질을 갖추지도 못한 사람들을 포함시키는 짓 따위는 내가 살고 있는 티베트 사회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을 것이다. 또 구도의 가르침에 있어 뛰어난 정신적 스승들이 이기주의적이고 화를 잘 내고 거드름을 피우고 허영심이 많고 나쁜 가장(家長)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아무도 그런 사람들을 찾아가 상의할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투안: 서양에서 ‘현자들의 위원회’의 회원 선정 기준은 그들의 직업적인 성취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인간적인 자질은 그보다 덜 중요하다. 그런데 진정한 현자는 정신과 마음의 자질을 가장 높은 수준으로 갖추고 있어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정신적 접근방법이 삶의 행동방침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일하는 분야에서 윤리 영역에 속하는 많은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21세기에 더욱 확산될 것이다. 예를 들면 핵무기의 확산, 환경 파괴, 유전자 복제, 유전자 조작 등이다. 또 어쩌면 어떤 유형의 인간을 선택하는 문제가 제기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연구를 통제해야만 하는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깊이 생각해야 한다. 창작과 연구의 자유도 역시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상상력은 구속받지 않고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상력은 죽어버린다. 예를 들면 중국과 구(舊)소련에서 전체주의적 체제가 과학 활동에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미칠 수 있는지 우리는 이미 보았다. 구소련의 린센코 사건은 충격적인 예이다. 프로핌 린센코는 스탈린과 공산당의 지지를 받아 모든 반대를 억압할 수 있었기 때문에, 1932년부터 1964년에 걸쳐 어떤 실험적 증거도 없이 유전자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강요했다. 그로 인해 소련의 생물학과 유전학 발전이 수십 년이나 늦추어진 것이다.

마티유: 최근 들어 중국은 혈연집단의 연구 결과 티베트인과 중국인 사이의 연고관계가 밝혀졌다고 말하면서, 그들이 티베트에 대해 종주권을 갖는다는 주장을 정당화하려고 했다. 이것은 프랑스가 영국 국민의 혈액세포가 프랑스 국민의 혈액세포와 비슷하다고 입증하면서 영국에 대해 소유권이 있음을 주장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투안: 또 한편으로 몇몇 유형의 연구가 예기치 않게 탈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사회는 알아야 한다. 유전자 ‘조작’은 이른바 ‘우수한’ 인종을 보존하고 ‘비정상인’ 혹은 ‘열등한’ 인간을 도태시켜야 한다는 우생학자들의 주장을 다시 부상시킬 수도 있다. 트랜지스터를 발명하여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윌리엄 쇼클리는 아이큐에 근거한 불임수술 계획을 추진하면서 말년을 보냈다.
내 생각에 과학자는 그 연구로 인해 비롯되는 도덕적 문제들을 충분히 검토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연구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결정기준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나는 당신과 마찬가지로 불교에서 말하는 이타주의와 보편적 책임감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고 믿는다. 과학자는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지 않도록 자기 연구의 방향을 잘 잡아야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를 실천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과학자가 자기 연구의 파급효과를 올바르게 평가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예를 들면, 아인슈타인이 특수 상대성이론에 대해 작업하면서 물질과 에너지의 등가성을 발견했을 때, 그는 이러한 발견이 원자탄으로 이어지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주민을 몰살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티유: 또 다른 예로 복제양 돌리에 대한 지나치게 격렬한 항의를 들 수 있다. 유전학이나 원자물리학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가가 문제이다. 미국 대통령 출마자였던 애들레이 스티븐슨은 1952년에 한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연은 중립적이다. 인간은 자연에서 세계를 사막으로 만들거나 사막에 꽃을 피울 수 있는 능력을 얻어냈다. 악은 원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의 정신에 있다.”

과학은 생명을 보호할 수도 있고 생명을 파괴하기 위한 무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러한 생각은 과학 연구의 자유를 제한하자는 것이 아니라-이는 바람직하지도 않을뿐더러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연구자들과 정책 결정권자들의 정신적인 자질에 더욱 큰 중요성을 부여하자는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지적 능력, 부, 물리적인 힘, 아름다움, 권력에도 해당된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그 자체로는 중립적인 도구이지만 좋은 목적이나 나쁜 목적에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수행의 가장 중요한 측면 가운데 하나가 이타주의의 계발인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


상위
   
 
이전 게시글 표시:  정렬  
새 주제 게시글 주제글에 댓글 달기  [ 1 개의 게시글 ] 

모든 시간은 UTC + 9 시간 으로 표시합니다


접속 중인 사용자

이 포럼에 접속 중인 사용자: 접속한 회원이 없음 그리고 손님 1 명


이 포럼에서 새 주제글을 게시할 수 없습니다
이 포럼에서 그 주제글에 댓글을 달 수 없습니다
이 포럼에서 당신이 게시한 글을 수정할 수 없습니다
이 포럼에서 당신이 게시한 글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 포럼에 첨부파일을 게시할 수 없습니다

찾기:
이동:  
cron
POWERED_BY
Free Translated by michael in phpBB 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