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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올린 게시글: 2017-10-24, (화) 4:40 am 

가입일: 2015-01-01, (목) 10:13 am
전체글: 215
교차로에서(1)
과학과 불교가 서로 대화를 나눌 이유가 있는가?

투안: 1960년대는 천체물리학의 황금기로, 우주 배경복사(빅뱅의 잔류 열기)의 검출과 펄서(대부분 중성자로 이루어진 별)의 발견, 퀘이사(우주의 경계에 위치한 천체들로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발한다)의 정체 확인 등과 같은 위대한 발견들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내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 인공위성에 의한 태양계 탐구는 절정에 달했다. 나는 우주탐사선 마리너 호에서 처음으로 전송된 화성 표면의 영상이 교실의 텔레비전 화면에 떴을 때 느꼈던 경탄을 아직도 기억한다.
메마른 불모지인 화성 사막의 영상은 화성에 지적 생명체가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19세기의 천문학자들이 보았다고 믿었던 운하는 모래폭풍에 의해 생겼던 시각적 착각에 지나지 않았음이 판명되었다.
이러한 지적인 흥분상태에서 천체물리학자가 되는 것은 불가피한 나의 일이었다. 이후 나는 최첨단 천체망원경 덕분에 끊임없이 우주를 관찰했고, 우주의 본질과 기원, 그 진화와 일생에 대해 성찰했다.

마티유: 나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연속성 속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내 마음을 끄는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과정 중에 일어났다.
나는 몇 년 동안 훌륭한 분들을 모시고 사는 엄청난 행운을 누렸다. 그것은 단순하면서도 직접적이고 심오한 체험이었는데, 말로는 그 감정을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스승의 정신적 완벽성을 알아볼 수는 있지만 머리에서 떠오르는 말-이를테면 지혜, 이해력, 선량함, 고귀함, 소박함, 엄정함, 성실함 등-로는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각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살면서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에 너무 늦지 않게 헌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과학 연구도 흥미 있기는 했지만, 작품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구성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점묘화에 조그만 색점(色點) 하나를 찍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과연 인생의 좋은 시간들을 바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을까?
반명에 불교에서는 출발점과 도달해야할 목적지, 사용해야할 수단들과 극복해야할 장애물들이 명확하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것이 대개의 경우 이기주의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이러한 이기주의는 우리의 진정한 본성과 세계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무지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우리는 고통스러워한다. 우리에게 가장 긴급한 일은 그러한 상황을 끝내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은 사랑과 자비심을 키우고,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따라가면서 무지의 뿌리를 잘라내는데 있다. 사람들은 며칠 혹은 몇 년이 지나면서 확실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변화는 희망이나 공포에서 벗어난 소중한 기쁨을 가져다준다.

투안: 왜 과학자와 대화하는 것인가?

마티유: 실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은 불교철학의 중요한 과업 가운데 하나인데, 과학은 우리 세계의 본성에 대해 강력한 통찰력을 많이 제공하기 때문이다.

투안: 연구를 하면서 나는 끊임없이 실재, 물질, 시간, 공간 등의 개념에 대해 자문하게 된다. 이러한 개념들과 대면할 때마다 불교가 이러한 개념들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실재에 대한 과학적 관점이 불교의 실재 관념과 어떻게 일치할 수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두 가지 관점은 서로 만나는가 대립하는가, 아니면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답할 만한 불교에 대한 지식이 나에겐(경전을 공부한 일이) 없다.

마티유: 현상의 배후에는 확고부동한 실재가 존재하는가?
현상세계, 즉 주변에서 우리가 ‘실재’로 보는 세계의 기원은 무엇인가?
생물과 무생물, 주체와 객체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시간, 공간, 자연법칙은 실재로서 존재하는가?
2,500년 전부터 불교의 형이상학자들은 줄곧 이러한 문제들을 검토했다. 불교의 문헌에는 논리학에 관한 논문, 지각이론, 현상 세계의 다양한 차원을 분석한 글, 의식의 다양한 양상과 우리 마음의 궁극적 본성을 탐구하는 심리학적 논문들이 넘쳐날 정도로 많다.

투안: 당신은 불교를 일종의 마음의 과학으로 제시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마음의 과학은 관찰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수학적 언어로 표현하는 자연 과학과 같은 의미에서의 과학일까?

마티유: 과학의 확실성은 반드시 물리적인 측정이나 복잡한 수학적 등식에 달려 있지 않다.
하나의 가설은 내면적인 경험에 의해 검증될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엄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불교의 방법에는 분석에서 시작되고 종종 ‘사고(思考) 실험’에 의존한다. 그것은 정신 속에서 수행되는 가설적 실험으로, 비록 물리적인 현실에서 실행될 수 없다 하더라도 반박할 수 없는 결론에 이른다. 이러한 기법은 과학에서도 광범위하게 이용되고 있다.

투안: 옳은 말이다. 사고(思考) 실험은 특히 물리학에서 대단히 유효하다.
아인슈타인과 다른 위대한 물리학자들은 물리학의 원리를 증명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몇몇 물리적 상황을 해석할 때 나타나는 역설적인 결과들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 사고(思考) 실험을 이용했다.
예를 들면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의 본질을 연구하기 위해서 자신이 빛의 입자 위에 올라타 있다고 상상했다. 또 중력에 대해 성찰하기 위해 자신이 진공 속에서 자유 낙하하는 엘리베이터 안에 있다고 상상했다.
나는 현대 물리학에 의해 탐구된 문제들이 뜻밖에도 불교의 통찰력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불교는 기술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으면서도 왜 현대 과학, 특히 물리학과 천체물리학에 관심을 갖는가?

마티유: 불교의 주요 관심사는 물론 현대 과학이 아니다. 그러나 불교는 최근의 물리학이 제기한 문제들과 비슷한 문제들을 제기해왔기 때문에 현대 과학의 발견들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분할할 수 없는 독자적인 입자들이 세계를 이루는 ‘기초 재료(블록재)’가 될 수 있는가? 그 입자들은 궁극적인 실재성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우리가 실재를 이해하는 것을 돕는 개념에 불과한 것인가?
물리 법칙은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그 자체로 존재하는가?
피상적인 유사성을 과장하지 않으면서 과학과 불교 사이의 차이와 합치점을 연구하는 것은 세계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불교는 무엇보다도 직접적인 체험에 기초를 둔 탐구이기 때문에, 경직된 교의에 얽매이지 않는다. 불교는 실재에 대한 어떠한 견해라도 그것이 확실하다고 이해된다면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다. 불교의 주요 목표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사물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과 그것들이 나타나는 방식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것이다.
부처는 제자들에게 맹목적이고 독단적인 신앙의 위험에 대해 경계하라고 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황금 원석을 돌에 문지르고 망치로 두들기고 녹이면서 그 순도를 조사하는 것처럼 내 가르침의 유효성을 검토하라. 단순히 나에 대한 존경 때문에 내가 말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말고, 그것이 옳다는 것을 진정으로 알게 될 때 받아들여라.”
그러나 단지 지식을 축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내 스승인 키옌체 린포체는 이렇게 말했다.
“위세와 명성을 얻어려는 목적만으로 지식을 긁어모으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오로지 동냥을 받기 위해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와 같이 똑같은 정신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식은 자신을 위해서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나 아무런 효용성도 갖지 못할 것이다. 속담에 “사람들은 지식이 많을수록 더욱 잘난 체한다.”는 말이 있다. 우리 내면에 깊이 뿌리박힌 부정적 성향을 없애기 전에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겠는가? 거만한 마음을 키우는 것은 마을 사람들을 모두 잔치에 초대하는 거지처럼 허풍에 불과한 것이다.

명상적인 삶이 성공했음을 나타내는 표시들은 많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몇 달이나 몇 년 후에 틀림없이 자신의 이기주의가 줄어있고 이타주의가 성장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집착, 증오, 거만함, 질투가 예전만큼 강하다면 시간을 허비한 것이고, 길을 잘못 들어온 것이고, 다른 사람들을 속인 것이다.
반대로 자연과학으로 인해 얻은 지식은 건설적이든 파괴적이든 세계에 어떤 작용을 가할 수 있지만, 상대적으로 자신에 대해서는 별 효과를 갖지 못한다. 과학지식은 본래 선성(善性)이나 이타주의와 결부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자체로 도덕적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명상과학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는 그 동안 너무나 많은 고통을 만들어온 근본적인 환상을 없애기 위해 마음 자체가 마음을 연구한다.

투안: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부처의 가르침이 본질적으로 실천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 인생의 주요 목적은 우주의 기원이나 물질적 본성이라는 문제로 고심하기보다는 우리 스스로를 개선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마티유: 어떤 사람이 단순한 호기심에서 부처에게 우주의 기원이 무엇이냐고 묻고 정신적 발전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또 다른 질문들로 그를 괴롭혔을 때, 그는 침묵을 지켰다.
불교는 무엇보다도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의 지식들, 특히 매우 흥미롭기는 하지만 이러한 목적에 비추어 별 소용이 없는 지식과 두움을 주는 지식 사이에 자연적인 등급을 매긴다.

투안: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티유: 그것은 최고의 지식 상태로, 무한한 자비심과 결합되어 있다. 그것은 단순히 정보의 축적이나 현상 세계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깨달음은 상대적 존재 양식(사물들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과 궁극적인 존재 양식(그 현상들의 진정한 본질)의 이해이다. 이것은 외부세계와 동시에 우리의 마음을 포함한다. 이러한 앎은 무지에 대한 근본적인 해독제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무지가 의미하는 바는 단순한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사물들이 영구적이고 확고부동하며 우리의 자아가 정말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실재’에 대한 그릇된 관념이다. 우리는 이러한 관념 때문에 덧없는 쾌락과 고통의 완화를 항구적인 행복과 혼동한다. 우리는 자아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에 집착하고 자아에게 해로워 보이는 것에는 반감을 갖는다. 이렇게 해서 점차 혼란이 생기고 점점 증대하여 결국 완전히 자기중심적인 방식으로 행동하기에 이른다. 무지는 반복되고 내면의 평화는 파괴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앎이란 고통의 궁극적인 치유책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별들의 밝기나 별들 사이의 거리를 아는 것이 유용성을 갖고 있더라도, 그것은 어떻게 해야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투안: 그래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해왔다. 불교는 ‘우리의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발전과 일상의 삶에서 우리의 행동에 대해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 지식은 무시한다.
우주와 우주의 운명에 대한 지식 혹은 시간과 공간의 본질에 대한 지식이 어떻게 우리가 열반에 도달하는 것을 도울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마티유: 우주론에 대해 부처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던 사람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부처는 한 웅큼의 나뭇잎을 들고는 방문객에게 물었다.
“내 손의 나뭇잎들이 더 많습니까, 숲속의 나뭇잎들이 더 많습니까?”
“물론 숲속의 나뭇잎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면 좋습니다. 내가 손에 들고 있는 나뭇잎들은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지식을 상징합니다.”
부처는 이런 식으로 몇몇 질문들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세계는 무한한, 이를테면 숲속의 나뭇잎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연구 영역을 제공한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것이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이라면, 그 목적에 전념하면서 우리가 추구하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지식들만 모으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그러나 무지를 일소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실재’라고 부르는 외부 세계와 자아의 본성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경험에서 나온다. 이 때문에 부처는 그러한 이해를 그의 가르침의 중심 주제로 삼았던 것이다.

그는 또한 우리가 현상을 지각하는 방식과 그것의 진정한 본성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 강조했고, 잘못된 지각으로 인해 해로운 결과를 강조했다.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끈을 뱀으로 오인하는 것은 근거 없는 공포를 낳는다. 그러나 끈에 빛을 비추고 그 진정한 본질을 알자마자 두려움은 사라져버린다. 불교의 탐구는 개별적인 자아와 세계의 외적인 현상들이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자아’와 ‘타자들’ 사이의 구분이 순전히 환상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불교는 실재의 진정한 상태를 ‘공(空)’ 혹은 고유한 실체의 부재라고 부른다. 가장 커다란 오류들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지각하는 것에 확고부동한 실재성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확고부동한 실재라는 관념은 2,000년에 걸쳐 서구의 철학적*종교적*과학적 사유를 지배해왔다.

투안: 그렇다. 19세기까지 고전 과학은 사물이 고유한 실체를 갖고 있으며 엄격한 인과법칙에 의해 지배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발전한 양자물리학은 물질의 기본적 구성 요소가 명확하고 고유한 실체를 갖고 있다는 관념을 심각하게 뒤흔들어놓았으며, 이 세계가 엄격한 인과법칙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에 의혹을 제기했다.
공의 불교적 개념은 양자역학이 보여주는 실재에 대한 개념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공의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좀더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는가?

마티유: 불교에서 공이 사물의 궁극적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주변에서 보는 사물, 즉 세계의 현상들에 독자적이고 영속적인 실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불교를 해설한 최초의 서구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공은 결코 현상들의 부재 혹은 비존재(非存在)가 아니다.
불교는 어떤 형태의 허무주의도 신봉하지 않는다. 실재하는 실체만 떼어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비존재만 떼어 그것에 말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지혜의 완성론(般若心經)>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공에 대해 집착하는 사람들은 고칠 수 없다고 한다.”
왜 고칠 수 없는가? 공에 대한 명상은 사물의 본질에 대한 잘못된 관념과 확고부동한 실재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치유책이기는 하지만, 이 치유책 자체가 믿음의 대상이 된다면 허무주의에 빠지기 때문이다.
<지혜의 완성론(般若心經)>은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은 존재에도 비존재에도 머무르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다.

우리가 공이라고 부르는 실재의 진실한 상태를 이해하기 위해 불교에서는 분할할 수 없는 물질의 입자가 존재하지 않음을 이해하려고 한다. 불교에 따르면 사물의 본질적인 비실재성을 이해하는 것은 구도의 필수적 부분이다. 그리고 현대 과학은 이를 해명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우리의 정신과 세계에 대한 지식은 서로를 깨우치고 서로에게 힘을 준다. 이 두 가지 지식의 궁극적인 목적은 고통을 근절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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