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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올린 게시글: 2017-10-21, (토) 3:36 am 

가입일: 2015-01-01, (목) 10:13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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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불교의 대화를 마치고
과학자의 결론<첫 번째 일치의 견해>

대담을 마치면서 나는 불교적 사유가 현상 세계를 분석하는 방법에 대해 더욱더 경탄을 금치 못했음을 먼저 말해야겠다. 이 기획을 시작하면서 나는 회의적인 편이었다. 나는 무엇보다 자신을 인식하고 정신적으로 발전해서 더 나은 인간존재가 되도록 지침을 주는 불교의 실천적인 측면을 이미 알고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달리 말하면 내가 아는 불교는 무엇보다도 우선 깨달음으로 이끄는 길, 본질적으로 내면을 바라보는 명상적 접근법이었다.
나는 과학과 불교가 실재를 탐구하는데 근본적으로 다른 방법론을 갖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과학의 경우 지적 능력과 이성이 중심 역할을 한다. 분류하고 범주화 하고 분석하고 비교하고 측정함으로써 과학자들은 고도로 추상적인 수학의 언어로 자연의 법칙을 표현한다. 직관이 과학에서 배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일관적인 수학의 구조 속에서 정식화될 수 있을 때만 유용하다.
반대로 명상적 접근법에서는 직관-혹은 내적인 경험-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현실을 해체하려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파악하려고 한다. 불교는 실험과학의 토대를 이루는 측정도구나 정교한 관찰에 의존하지 않는다. 불교의 진술은 양적이라기보다는 질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래서 나는 과학과 불교를 비교하는 것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확신이 전혀 없었다. 나는 불교가 근본적으로 현상 세계의 본질에 대해 별로 할 말이 없지 않을까 염려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교의 주요한 관심사가 아닌 반면, 과학에 있어서는 핵심에 속하기 때문이다. 만약 사실이 그러했다면 우리는 결코 공동의 영역을 발견하지 못한 채 평행선을 달리는 두 가지 이야기로 끝을 맺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난 대화가 진행됨에 따라 나는 곧 내가 가졌던 우려가 근거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불교는 세계의 본질에 대해 성찰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심오하고 독창적인 방법으로 성찰했다. 불교의 목적은 현상 세계를 그 자체로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는 물질 세계의 진정한 본질-공, 상호의존성-을 이해함으로써 무지의 안개를 걷어내고 깨달음을 향한 길을 열 수 있기 때문에 세계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다.
우리의 토론은 서로를 풍요롭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토론에서 새로운 질문과 참신한 관점들, 그리고 더 깊은 연구와 해명이 필요했고 아직도 필요한 예상치 못한 종합이 생겨났다.
이번 대담은 현재 진행 중인 과학과 불교가 나누는 대화의 일부를 이룬다. 이 대담에서 내가 배웠던 가장 중요한 점은 실재에 대한 과학과 불교의 두 시각 사이에 분명한 수렴과 동조가 있다는 사실이다. 현상 세계에 대한 불교의 어떤 관점들은 현대 물리학의 기초를 이루는 개념들, 특히 현대 물리학의 지주를 이루는 두 개의 대이론인 양자역학-무한히 작은 것에 대한 물리학-과 상대성이론-무한히 큰 것에 대한 물리학-의 개념들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불교와 과학은 각각 실재를 고찰하는 방법들이 근본적으로 다르기는 하지만, 이 차이는 극복할 수 없는 대립이 아니라 오히려 조화로운 상보성에 이른다. 이는 불교와 과학 모두가 진리를 탐구하며, 진실성과 엄정함, 그리고 논리를 기준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우선 불교의 중심 교의들 가운데 하나인 ‘현상들의 상호의존성’을 검토해보자. 어떤 것도 스스로 존재하지 않으며, 스스로의 원인이 아니다. 하나의 사물은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다. 상호의존성은 현상들의 발현에 필수적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세계는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어떤 현상이든 다른 현상들과 연관될 때만 생겨날 수 있다. 실재는 국소적으로 한정될 수도 분할될 수도 없으며, 전체적이고 총괄적인 것으로 고려되어야만 한다.
지금 물리학의 몇몇 실험들로 인해 우리는 이러한 총체적인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원자나 소립자의 세계에서 EPR 실험은 현실이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상호작용을 하는 두 개의 광자가 단 하나의 실재의 일부로서 계속 활동한다. 그 양자 사이의 거리가 얼마이든 그것들은 어떤 정보 전달도 없이 순식간에 상호 연관되어 운동한다. 거시세계에 있어 그 총체성은 푸코 진자에 의해 입증되었다. 이 추의 운동은 그것이 속한 국소적인 환경이 아니라 우주 전체에 달려 있다. 우리의 작은 지구 위에서 일어나는 것은 무한히 광대한 우주 안에서 결정된다.

상호의존성이라는 개념은 사물이 절대적인 방식으로 홀로 결정될 수 없고 오로지 다른 사물들과 관련이 되어야만 규정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갈릴레이가 처음으로 말했고 아인슈타인에 의해 완성된, 물리학에서 운동의 상대성 원리를 결정하는 것이 이러한 개념이다. “운동은 무(無)와 같은 것이다.”라고 갈릴레이는 말했다. 그가 의미했던 것은 어떤 물체의 운동이 절대적인 방식으로 정의될 수 없으며 오로지 다른 물체의 운동과 관련되어서만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창문을 모두 다 닫고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기차에 타고 있는 승객은 어떤 실험이나 측정을 해봐도 기차가 움직이는지 정지해 있는지를 알도리가 없다. 그것을 알려면 창문을 열고 밖의 풍경이 뒤로 움직이는 것을 보아야만 한다. 외부에 준거가 없는 한, 운동은 운동 없음과 마찬가지이다.
불교는 사물이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며 오로지 다른 것들과 관련해서만 존재한다고 말한다. 상대성원리 역시 기차의 운동은 지나가는 풍경에 관계해서만 존재한다.

시간과 공간 또한 뉴턴이 부여했던 절대성을 잃어버렸다.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이 관찰자의 운동, 그리고 그를 둘러싼 중력장의 밀도와 관련해서 상대적으로만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블랙홀’ 주변에서는 1초가 영원으로 늘어날 수 있다. 불교와 마찬가지로 상대성원리도 이미 지나간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라는 개념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나의 미래는 다른 사람의 과거, 제3자의 현재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우리의 상대적인 운동에 달려 있는 것이다. 시간은 흐르지 않고 단지 거기 존재한다.

상호의존성의 개념은 우리를 공이라는 개념으로 인도하는데, 그것은 무(無)가 아니라 내적으로 고유한 실체의 부재를 의미한다. 모든 것이 상호의존적인 이상, 아무 것도 자체적으로 규정될 수 없으며 스스로 존재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 자체의 힘으로 스스로 존재하는 내적으로 고유한 속성의 개념은 폐기되어야 한다.
또다시 양자물리학은 놀랍도록 유사한 발언을 한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에 의하면 우리는 더 이상 속도나 위치처럼 잘 규정된 속성을 갖는 실재적 실체로서 원자나 전자를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이제 그것들을, 사물과 사실이 아닌 잠재성으로 이루어진 세계의 일부로 간주해야 한다. 물질과 빛의 본질 자체가 상호의존적인 관계들에 종속된다. 다시 말해 그것은 더 이상 내적으로 고유하지 않고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본성은 더 이상 단일하지 않고 이중적이고 상호보완적이다. 우리가 ‘입자’라고 부르는 현상은 그것을 관찰하지 않을 때는 ‘파동’이 된다. 그러나 측정을 하거나 관찰하면 곧 다시 입자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입자의 내적으로 고유한 실재, 관찰하지 않을 때도 존재하는 실재에 대해 말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포착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사건’을 의미하는 ‘samskara'라는 불교적 개념과 마찬가지로 양자물리학은 우리가 갖고 있는 물체의 개념을 측정, 다시 말해 사건에 종속시킴으로써 근본적으로 그것을 상대화했다. 게다가 양자의 불확정성이 이러한 실재의 정확한 측정에 근본적인 한계를 부과한다. 입자의 위치나 속도에 있어 언제나 어느 정도의 불확실성이 존재할 것이다. 물질은 자기의 실체를 상싫산 것이다.

상호의존성이라는 불교적 개념은 공의 동의어이고, 공은 또 비영속성의 동의어이다. 세계는 무두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하는 사건들과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이루어지는 거대한 흐름과 같다. 도처에서 일어나는 지속적인 변화라는 개념은 현대 우주론과 일치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천체의 불변성과 뉴턴의 정태적 우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작은 원자에서부터 은하, 별, 인간을 포함하여 우주 전체에 이르기까지 만물은 운동하고 변화하며 비영속적이다.

우주는 최초의 폭발에서 받은 추진력 때문에 팽창한다. 이러한 역동성은 상대성이론의 방정식에 의해 설명된다. 빅뱅이론과 더불어 우주는 역사를 갖게 되었다. 우주는 시작과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가지고 있다. 우주는 지옥과 같은 열이나 혹한의 추위 속에서 언젠가 소멸될 것이다. 우주의 모든 구조들-혹성, 별, 은하, 은하단-은 영원히 운동하면서 거대한 우주의 춤에 참여한다. 그것들은 자전과 공전을 하면서 서로 가까워지거나 멀어진다. 그것들 역시 역사를 갖는다. 태어나서 진화하고 죽는다. 별들은 수백만 년, 심지어 수십억 년에 걸친 삶의 주기를 갖는다.

원자나 소립자의 세계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거기서도 모든 것은 비영속적이다. 입자들은 그 본질을 바꿀 수 있다. 쿼크는 계열이나 ‘향’을 바꿀 수 있으며, 양성자는 양전자와 중성미립자의 방출과 더불어 중성자가 될 수 있다. 물질과 반물질은 서로를 소멸시키면서 순수한 에너지가 될 수 있다. 어떤 입자의 운동은 다른 입자로 변형될 수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달리 말하면 어떤 물체의 속성이 물체로 변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에너지의 양자적 불확정성 덕분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은 유령 같고 순간적인 삶을 갖는 무수히 많은 ‘잠재적인’ 입자들로 가득 채워진다. 무한히 짧은 삶과 죽음의 순환 속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이 입자들은 비영속성의 예를 완벽하게 예시한다.

따라서 실재는 다양한 방식으로 파악될 수 있으며, 내부로 향하든 외부로 향하든 서로 다른 접근법들이 동일한 진리에 이를 수 있다. 불교는 이러한 일치를 보고 놀라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현상 세계가 오로지 의식이라는 필터를 통해 관찰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또한 의식 자체가 외부 세계와 상호의존적인 이상, 현상들의 근본적인 성격은 부처의 깨달은 정신과 무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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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린 주안 투안(Trinh Xuan Thuan)
베트남 하노이 출신으로 사이공의 프랑스 고등학교를 다닌 뒤 미국 칼텍과 프린스턴 대학에서 수학했다.
버지니아 대학의 천체물리학 교수인 그는 <은밀한 멜로디> <우주의 운명> <혼돈과 조화> 등을 저술하였고, 과학과 철학이 만나는 분야에서 그가 보여준 개방적인 사고와 명쾌한 논지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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