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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올린 게시글: 2017-10-19, (목) 3:22 am 

가입일: 2015-01-01, (목) 10:13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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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불교의 대화를 마치고
승려의 결론

과학과 구도(삶의 바른 길-정신수행)를 결합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실패하게 되어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구도를 일종의 속임수라고 생각하거나, 과학이 지나치게 물질주의적이라 하기도 하고, 그래서 이 두 분야가 서로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과학과 구도 사이에서 공통점 찾기를 거부하는 것은 결국 앎과 실험, 주체와 객체, 물질과 의식 사이에 넘어설 수 없는 경계가 있음을 받아들이는 셈이 된다. 이러한 장벽들을 화해시킬 수 방법은 무엇일까!
명상적 접근 방법은 과학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서로 다른 지식의 영역들과 거기에 이르기 위해 사용되는 방법들에 우선순위를 부여하고자 한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양이 아니라,
“우리는 왜 살고 있는가?”, “우리는 왜 죽는가?”
“우리는 왜 고통을 받고 있는가?”, “우리는 왜 행복한가?”
“우리는 왜 사랑하는가?”, “우리는 왜 미워하는가?”라는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다.
이러한 물음들을 통해 우리가 탐구하는 대상이 이러한 물음들에 어떤 답을 줄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정말 우리가 거기에 바치는 모든 시간만큼 가치가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과학에서 이러한 질문은 기초연구와 응용이라는 두 영역과 관련된다.
기초연구는 자연을 ‘객관적’으로 기술하고 설명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것이 아무리 훌륭한 기획이라 하더라도, 별들의 화학적 구성 연구나 곤충 분류에 대해 가질 수 있는 호기심은 우리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들과 비교할 때 역시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의미 있는 대부분은 사랑, 우정, 애정, 즐거움, 자연 경관의 아름다움, 내면의 평화, 이타주의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외부현상들에 초점을 맞추는 기초과학은 이러한 문제에는 대체로 등한시되거나 다른 방도로 연구된다.
과학의 응용은 주로 우리의 건강, 평균수명, 행동의 자유, 안락한 생활과 관련된다. 평균수명은 상당히 늘어났다. 의료의 전반적인 질은 계속 향상되고 있다. 우리가 누리는 물질적 자유와 육체적 안락함, 그리고 우리가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계속 늘고 있지만, 그 대신 우리 삶의 몇몇 다른 측면들은 악화되었다. 우리는 오염시킬 수 있는 것은 거의 모두 오염시켰고, 지구와 지구주민들은 새로운 재해들에 직면하고 있다.
기술과 경제의 지속적인 발전이라는 신조가 진실로 떠받들만한 것인가?
우리는 이러한 신조가 어떻게 가능한 것과 바람직한 것 사이에 혼란을 일으키는지에 대해 세심하게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과학은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기를 바라는 희망을 모두 포기하고 나서야 비로소 가장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자연현상 연구에 집중하면서, 과학은 자연현상을 발견하고 측정하고 설명하고, 그것들에 작용을 가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들을 찾아냈다. 지금 이러한 종류의 지식은 너무도 방대해서 우리는 가끔 과학이 삶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들에 답을 제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과학은 이미 연구영역과 능력의 범위를 명확히 설정했기에, 그런 물음들에 답변할 수 없는 것을 실패로 볼 순 없다.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거나 우리 주위에 평화를 이루는 것은 결코 과학의 목적이 아니었다.
과학은 ‘관찰 가능한’ 것들을 연구하고, 물리 이론들은 관찰된 현상들을 대체로 정확하게 설명한다. 닐스 보어는 “과학의 목표는 우리 경험의 폭을 넓히고 그것을 정리하는 것”이며 “자연을 기술하는 목적은 현상들의 진정한 본질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 경험의 다양한 양상들 사이의 관계를 가능한 한 밝혀내는 것이다.”라고 썼다.
그러므로 예전에도 그랬듯이 과학이 언젠가는 자연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환상인 듯하다. 일반적으로 과학의 방법론은 현상들을 기술하고 실험적 작용을 예측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해석체계에 이를 뿐이다.
과학은 결국 실재의 본질이 예전에 생각되던 대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여러 장애물들에 직면해왔다.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에 의해 밝혀진 이러한 장애물들이 불교와 대화의 장을 열도록 과학의 등을 떠민 것이다.
현상들의 궁극적인 본질과 깨달음을 향한 단계인 의식의 궁극적인 본성을 검토한다는 점에서, 불교는 거시세계가 겉으로는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소립자의 세계로 들어가자마자 확고부동한 실재성이 사라지는 딜레마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과학자들에게 몇몇 답변들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는 훨씬 더 앞으로 나아간다. 왜냐하면 불교는 그 결론을 삶에 대한 실용적인 태도로 옮기기 때문이다.

기술이 생각하는 과학은 세계를 이용하고 언젠가 세계를 지배하려는 꿈을 추구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간단히 말해 기초과학은 이론적인 지식이고, 기술은 공리주의적인 지식이며, 명상(정신수행과학)은 해방의 지식이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아무런 갈등 없이 서로를 보완할 수 있다고 본다. 이점은 불교의 가르침의 중심에 놓여있는 의식의 본성과 현상들의 상호의존성에 이를 때 그러했다.

의식의 본질은 여전히 흥미진진한 주제이다. 그것은 완전히 두뇌로 환원될 수 있는가? 그것은 물질에서 발생하는 하나의 현상인가? 아니면(불교가 말하는) 단지 선행하는 의식의 순간들에서 생겨나 물질적 매체 없이 지속되는가?
불교의 명상가들은 진짜 내성적 실험에 따라 규명했던 의식의 여러 차원들에 대해 말한다. 그들의 방법론은 과학의 경험적 접근방법에 근거하여 작업하는 연구자들에 의해 연구될 만하다. 최근에 이르기까지 정신의 작용을 탐구해왔던 대부분의 과학자들에 의해 행해진 명상실험이 없었기 때문에 의식의 본성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불교의 관점에서는 마음 자체를 탐구하기 위해서 마음을 훈련시키는 것이 훨씬 더 신뢰할 만하고 유익하게 보인다. 그렇게 하는 것이 두뇌에 상응하는 활동을 외부에서 모니터로 추적하는 것보다 심적 사건들과 궁극적인 본질에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 우리는 ‘소거적 유물론자’의 빈약한 논거에 빠져드는 것을 피할 수 있다. 그들은 주관적으로 경험되는 심적 상태는 그것이 신경과학의 언어로 환원될 수 없다는 이유에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반면 우리는 신경생물학자들과 명상가들을 결집시키는 감격적인 연구계획을 구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주의 조직원리에 대해 논하면서 우리가 기원의 문제에 접근할 때 어쩔 수 없이 형이상학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수아 자콥이 말했듯이, “한 가지 영역은 모든 과학적 조사에서 완전히 제외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세계의 기원이다.”라고 한 점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시초의 문제를 고려할 때 분석을 받은 후에도 유효한 유일한 형이상학적 접근법은 ‘시초의 부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다른 모든 가능성은 불가피하게 원인 없는 원인이라는 개념, 변화하는 부동성(不動性), 혹은 유(有)가 되는 무(無)에 이르게 된다. 결국 라이프니츠 의 질문(‘왜 무가 아니라 오히려 유가 존재하는가?’)은 유물론적 실재론의 관점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이 질문은 현상이 내적으로 고유한 실재를 가지고 있음을 전제한다. 조직원리가 있음을 내세우는 것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그럴 경우 질문은 “왜 무가 아니라 오히려 조직원리가 있는가?”가 된다. 불교에 따르면 이 질문은 “왜 차라리 무가 아니라 현상들의 발현이 존재하는가?”라고 다시 진술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답변은 “모든 것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이 비어있기 때문이다.”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내적으로 고유한 실체를 갖는 확고부동한 실재는 결코 있었던 적이 없다. 깨달음이란 단지 사물에 내적으로 고유한 실재를 부여하는 무지의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투안(천체물리학자)은 대담에서 “최근의 천문학적 관측에 의하면 우주는 우주의 팽창운동을 정지시키거나 역행시킬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물질을 내포하고 있지 않은 듯하다. 그래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는 순환적 우주의 개념이 배제되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아직도 요원하다. 과학자들은 이에 대한 새로운 생각들을 계속 제시하고 있다. 프랑스의 대중 과학 잡지인 <과학과 삶>은 2000년 1월호를 ‘빅뱅 이전’이라는 주제에 할애했다. 거기서 뛰어난 과학자들이 우주와 우주 생성론에 관해 그들이 갖고 있는 혁신적인 견해를 제시했다. 안드레이 린데는 빅뱅이 매순간 발생하는 연속적인 계단식 우주에 대해 말한다. 마틴 리즈는 끊임없이 재생되는 여러 개의 우주로 구성된 ‘다우주(multivers)'에 대해 거론한다. 또 가브리엘레 바네차노는 빅뱅이 우주의 시초가 아니라 단순히 우주 역사의 주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라고 여긴다. 이러한 각본들(아마 이런 것들은 앞으로도 더 많이 나올 것이다.)이 그렇게나 서로 다르고 모순적이고 때로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우주 생성론이 우주의 시초를 다룰 때 얼마나 불확실한지를 보여줄 뿐이다.

불교의 관점에서 볼 때 시초에 대한 서양의 강박관념은-그것이 종교든 철학이든 과학이든- 현상들의 실재에 대해 서양이 갖고 있는 뿌리 깊은 믿음과 관련이 있다. 사물은 우리가 보듯이 정말로 ‘존재하며’, 그렇기 때문에 결국 시초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방법으로 인해 과학자들은 양자역학의 결과들과 우리에게 안도감을 줄 수 있는 세계관을 화해시킴으로써 사물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인 이해를 문제 삼는 것을 피할 수 있도록 복잡한 묘기를 부리지 않을 수 없다.
물리학자들이 몇몇 고전적인 표현들(예를 들면 내재적인 속성들을 갖는 물체들의 고유한 존재)을 유지하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은 그들 자신이 발견했던 현상들과 어쩔 수 없이 충돌한다. 이러한 난관들은 그들이 단지 과학의 특정 학파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타성에서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상의 실재성과 그것을 관찰하는 주체의 실재성에 대한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일어나는 훨씬 더 뿌리 깊은 저항에서 기인한다.
미셸 비트볼의 견해에 따르면 현대 물리학에 대한 철학적 논쟁은 “실재론적 해석이 이론 물리학에서 이용 가능하기만 하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채택하라.”는 철칙에 지배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물리학자들이 양자역학에서 논리적 결론을 끌어낸다면, 그들은 쉽게 자신들의 세계관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스티븐 와인버그가 “종교만이 선한 존재들로 하여금 악을 행하게 할 수 있다.”라고 발언할 때, 우리는 그만큼 교조적인 방식으로 “구도만이 악한 존재들에게 선을 행하게 만들 수 있다.”고 대답해줄 수 있을 것이다.
종종 과학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잔혹함은 별개의 문제로 하더라도 우리는 과학만이 정상적인 사람들에게 체면을 가장하고 나쁜 일을 할 수 있는 구실을 제공할 수 있다고 덧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와인버그의 태도만큼이나 극단적인 태도를 취하는 일이 될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활동의 가치는, 심지어 과학과 종교라는 존경할만한 활동들의 가치조차도 전적으로 우리가 갖는 동기에 달려 있다.

나는 내가 ‘명상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원칙적으로 직관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용어는 명상의 직접적인 체험을 기술하기에는 너무 모호한데, 그것은 확실한 인식에 근거를 두지 않는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을 것이다. 명상의 어떤 단계에 이르면 이성을 넘어서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명상이 이 단계를 넘어서면 이성에 어긋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명상은 단지 이성의 한계를 넘어설 뿐이다.
투안은 이 과정을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 비유했다. 그러나 불교의 철학과 명상은 굳이 웅대한 이론 체계를 세우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그것들이 정말 강조하는 것은 내면적 변화라는 확실한 결과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키옌체 린포체는 다음과 같은 충고를 했다.
“지혜의 징표는 자기 통제이며, 사람이 자신의 정신적 체험을 통해 성숙해졌다는 징표는 갈등을 일으키는 감정들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혜롭게 되고 학식이 깊어졌을 때는 그만큼 고요하고 평화로우며 규율을 준수해야 할 것이다. 게으르고 교만하며 오만에 가득차서는 안 된다. 당신이 정신적인 수련을 통해 부정적인 감정들을 억제하고 있는가를 계속 확인하라. 만약 어떤 수련이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다면, 그 수련이 당신의 이기심과 혼란을 가중시키고 부정적인 생각들을 더 많이 일으킨다면, 차라리 그 수련을 그만두는 것이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에게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험보다 훨씬 많은 경험을 가진 완벽한 스승이 우리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가르침을 신뢰해야 하겠지만-마치 바다에서 고참 선원의 충고를 따라야 하듯이- 단지 존경하는 누군가가 어떤 진리를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진리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부처님 말씀의 가치는 우리가 스스로 그것을 검증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프랑수아 자콥은 “과학자에게 있어서-나는 명상가에게서도 그렇다고 덧붙인다- 위험은 자신의 학문, 즉 자신이 가진 지식의 한계를 가늠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자신이 믿는 것과 아는 것을 섞어버리게 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자신이 옳다는 확신을 만든다.”라고 말한다.

자연과학 분야에서 생겨나는 연속적인 지식의 혁명들은 우리가 결코 “결정적으로 옳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러므로 나는 감히 내면의 깨달음이 정신의 궁극적 본성, 행복과 고통의 메커니즘, 그리고 현상들의 실재에 관한 해답으로써 그에 관한 확신을 보여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지를 반문해 본다. 이러한 확신은 우리 삶의 매순간 확인되는 내면적 발견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만물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불변의 이해로 나타나고 우리 모두가 갖고 싶어 하는 인간의 자질로 표현된다.
우리가 이러한 자질을 갖추지 못한다면, 얼어붙은 호수 위에 세운 성처럼 무한한 지식의 구조물이나 세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봄이 오면 성이 물밑으로 사라져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존재 내면에 심오한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 순전히 관념적인 명상은 삶의 시련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불교에 따르면 공에 대한 이해는 한없는 사랑과 자비심으로 표현된다. 티베트의 은둔자 샤브카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비심을 가진 자는 모든 가르침을 지니고 있다.
자비심이 없는 자는 어떤 가르침도 지니지 못한다.
공을 명상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는 그 본질로 자비심을 필요로 한다.“
불교 경전에서 사용된 은유를 따르자면, 지혜와 결합된 뜨거운 자비심만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광석을 용해시켜 그로부터 우리의 심오한 본성인 금을 가려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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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유 리카르(Matthieu Ricard)
1946년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세포 유전학 분야의 과학자로 일하다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 히말라야에 정착했다.
30년 전부터 위대한 티베트의 스승들 밑에서 불교 신자로 살아가고 있다. 그는 달라이라마의 프랑스어 통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인 철학자 장 프랑수아 르벨(Jean Francois Revel)과의 대담을 엮어 출간한 <승려와 철학자 Le Moine et le Philosophe>는 프랑스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세계 20여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그는 <티베트의 정신> <춤추는 티베트 승려> 등 두 권의 사진집과 수많은 티베트 도서들을 번역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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