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yber; Lotus-America Buddhist College

<Lotus University - America Buddhist College>

* 잦은 질문    * 찾기

현재 시간 2017-06-29, (목) 5:54 pm

댓글없는 게시글 보기 | 진행 중인 주제글 보기

모든 시간은 UTC + 9 시간 으로 표시합니다

새 주제 게시글 주제글에 댓글 달기  [ 1 개의 게시글 ] 
글쓴이 메세지
전체글올린 게시글: 2017-03-26, (일) 2:16 am 

가입일: 2015-01-01, (목) 10:13 am
전체글: 149
불교 역사는 불성 가진 존재의 확장 과정

▲ ‘무정불성(無情佛性)’고윤숙 화가
첨부파일:
97081_24111_1846.jpg
97081_24111_1846.jpg [ 105.99 KiB | 205 번째 조회 ]


유정(有情), 정식(情識)이 있는 것을 뜻한다. 정식이란 정(情)과 식(識)이니, 감정이나 지각능력을 뜻한다. 따라서 유정이란 감정이나 지각능력을 갖고 있는 것, 대개는 생명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말이다. 중생이라 번역되기도 했던 사트바의 번역어다. 반대로 정식이 없는 것을 뜻하는 무정(無情)이란 생명 없음을 뜻하는 말일 텐데, 산천초목을 그 예로 드는 것을 보면 생명/비생명과 유정/무정을 같은 의미로 사용했던 것인지는 약간 의아스럽다. 아마도 풀이나 나무에겐 정식이 없다고 알던 당시의 통념 속에서, 초목은 생명이 있지만 무정물로 분류되었던 것 같다. 즉 유정이란 동물을 뜻하는 것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식물에게 감정은 몰라도 지각능력이 있음이 확인된 지금이라면, 이는 다시 분류되어야 한다.

불성은 부처되는 자질 뜻하는 것
보살까지로만 한정되었던 불성이
유정무정 모든 중생으로까지 확대

유정과 무정이 불교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불성의 유무 때문이다. 불성은 애초에 부처가 될 자질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었고, 그런 의미에서 인간 가운데서도 일부는 그런 불성이 있는지 의심스러워했던 것 같다. 사실 우리가 봐도 정말 불성이 있는지 의심스러운 사람들이 있으니,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그런데 불교의 역사는 불성을 가진 존재의 범위를 점점 확장해간 과정이었던 것 같다. 하여, 처음엔 보살까지 한정되어 있던 불성은 후일 모든 인간으로, 나아가 모든 중생으로까지 확장되었다. 삼론종(三論宗)이나 선종 초기의 우두종(牛頭宗)은 무정물 또한 불성을 갖는다고 주장한 바 있고, 천태종의 담연은 무정불성론을 논증하는 책을 쓰기도 했다. 선종에서 일부는 무정불성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일부는 무정물이 언제나 불법을 설한다는 ‘무정설법’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무정물은 물론 인간 아닌 유정물이 정말 불성을 갖고 있었는지 또한 선종 초기에 꽤나 오랫동안 논란이 되었던 것 같다. 선의 공안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이 그와 관련된 것이다. 한 스님이 조주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

‘무문관’ 첫째 칙이기도 하고, 간화선을 확립한 대혜종고가 학인들에게 많이 주어서 유명해진 화두다. 통상적인 ‘유무’를 떠나서 저 ‘없다(無)’라는 말에 의정을 실어 참구하라고들 한다. 화두의 참구에는 그것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조주의 문답은 원래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물었던 스님이 다시 묻기 때문이다.

“위로는 부처님에서 아래로는 개미까지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하는데, 어째서 개에게는 없다고 하십니까?”
“그에게 업식의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조주록’, 장경각, 71)

여기서 다시 물은 스님의 질문을 보면,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전제로 깔고 물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체중생 실유불성’이란 명제가 널리 알려진 시기에, 조주는 ‘없다’고 답함으로써 놀라게 했던 것이다. 왜 개에겐 없다고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더 놀랍다. 그의 말대로 ‘업식의 성품이 있기 때문’이라면 업식의 성품을 가진 모든 것은 불성이 없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업식의 성품이라면 깨달음을 얻지 못한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것 아닌가! 조주만은 아니다. 위산(?山)은 ‘일체중생 실유불성’을 뒤집어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이 없다(一切衆生 皆無佛性)”고 했고, 낭주(朗州)의 고제(古堤)는 평상시에 학인들이 찾아오면 매번, ‘가라! 그대에겐 불성이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정선 공안집’, 1, 678~679)

그러나 조주는 정반대로 말한 적도 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집집마다 문 앞의 길은 장안으로 통한다.”(‘조주록’, 131)

집집마다 있는 길은 아무리 좁은 길이라 해도 다른 길로 이어져 결국 장안으로 통하게 마련이듯이, 인간도 개도 모두 부처에 이르는 길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즉 개에게도 불성이 있다는 말이다. 좀 더 나아가 당시라면 무정물로 분류했을 잣나무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한다.

“잣나무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있다.”
“언제 성불합니까?”
“허공이 땅에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라.”
“허공은 언제 땅에 떨어집니까?”
“잣나무가 성불할 때까지 기다려라.”(‘조주록’, 117)

허공이 땅에 떨어질 리 없다며 다시 뒤집는 말일까? 뉘앙스를 보면 그건 아닌 거 같다. 통념에 따르면 허공은 떨어지는 게 아니지만, 어찌 보면 이미, 그리고 항상 땅에 떨어져 있다고 해야 한다. 그렇다면 언제나 성불해있다는 말이 된다. 무정물의 불성을 긍정하는 입장이 바로 이랬다. 뒤에 보겠지만, 혜능의 제자였던 남양 혜충국사가 어떤 선객과 아주 길게 논쟁하는 것을 보면, 무정불성을 긍정하는 건 적어도 초기에는 선종에서도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도 조주의 스승인 남전이 고양이를 두 동강 내 죽인 것은 이런 논쟁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 같다.

어느날 남전이 주석하고 있던 절에서 동서 양편의 승당에서 고양이를 가지고 다투자, 남전이 이를 보고서 마침내 고양이를 잡아들고 말했다.
“대중들이여, 제대로 말을 하면 이 놈의 목숨을 구해줄 것이고,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면 베어서 죽이겠다.”(‘벽암록’, 중, 장경각, 228쪽)

윽! 불법을 깨치신 스님께서 살아있는 고양이를 죽이겠다니! 너무도 강렬한 물음이었지만, 대중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결국 남전은 고양이를 두 토막 내 죽여 버렸다고 한다. 남전은 대체 무슨 대답을 듣고자 멀쩡한 고양이를 죽여버린 것일까?

어록에는 동서 양편의 승당 스님네들이 고양이를 두고 무얼 다투었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아마도 고양이에게 불성이 있는 지를 두고 다투었을 것이 틀림없다. 고양이가 아무리 귀엽기로서니 스님네들이 고양이를 자기 것이라고 다투었을 리는 없으니까. 그런 다툼의 한가운데로 치고 들어가 고양이를 잡아들곤, “말해보라!”고 물었던 것이다. 거기다 대고 무어라 답했어야 할까?

밖에 나갔다 나중에 돌아온 조주에게 남전이 낮에 있었던 일을 얘기해주며 묻자, 조주는 문득 짚신을 벗어 머리에 이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러자 남전은 말하였다.
“네가 그때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살릴 수 있었을 텐데…”

남전이 한 말을 보면, 조주가 한 행동이 그의 물음에 대해 제대로 된 답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조주가 신발을 머리에 이고 나가버린 건 대체 무슨 뜻일까? 일단 쉽게 손을 내미는 것은 신발을 머리에 이고 나간 것을 두고, 다음과 같은 ‘예기(禮記)’의 문장에 얼른 꿰맞추는 해석이다. “신발이 비록 새것이라도 정수리에 두고 베지 않으며, 갓이 비록 낡았더라도 발밑에 놓아두지 않는다.” 즉 사물에는 정해진 제 자리가 있는데, 신발을 머리에 임으로써 그 자리에서 벗어났음을 지적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불성에 대한 쓸데없는 집착으로 사태가 크게 어긋나버린 것을 비판하고, 그로 인해 애꿎은 고양이를 죽게 한 승당의 스님들을 비난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셈이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지배자들에게 신발을 던진 사람을 비난하며 신발이 머리 위에 있음은 정해진 자리를 벗어난 것이고, 질서에 반하는 것이라며 던진 자의 팔을 냉동시켜 잘라버리는 장면을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이는 역으로 앞의 해석이 조주의 행동마저, 사물에 정해진 자리가 있으니 그걸 지키라는 의미로 이해한 게 아닌가 의심하게 한다. 그건 예와 규범을 강조한 유교에 대해서라면 모르겠지만, 그걸 깨는 선의 파격적 언행을 이해하는 데는 적절하다 보기 어렵다. 더구나 조주의 행동이 승당의 스님 아닌 남전의 물음에 대한 것이고, 고양이를 살릴 수 있었던 답이었음을 안다면, 이런 해석이야말로 멀리 빗나간 것이 아닐까? “눈앞의 근본 보는 바른 안목 없다면/ 또 흐르는 물에 따라 인간에 떨어지리.”(동림상총(東林常總)) 그렇다면 조주의 이 행동은 대체 무슨 뜻이었던 것이길래, “남전이 한칼에 두 토막으로 절단냈”던 것을 “조주가 두 토막을 이어 다시 살렸다”고(大覺懷璉) 했을까?(‘정선 공안집 선문염송설화’, 1, 493, 488)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solaris0@daum.net


상위
   
 
이전 게시글 표시:  정렬  
새 주제 게시글 주제글에 댓글 달기  [ 1 개의 게시글 ] 

모든 시간은 UTC + 9 시간 으로 표시합니다


접속 중인 사용자

이 포럼에 접속 중인 사용자: 접속한 회원이 없음 그리고 손님 1 명


이 포럼에서 새 주제글을 게시할 수 없습니다
이 포럼에서 그 주제글에 댓글을 달 수 없습니다
이 포럼에서 당신이 게시한 글을 수정할 수 없습니다
이 포럼에서 당신이 게시한 글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 포럼에 첨부파일을 게시할 수 없습니다

찾기:
이동:  
cron
POWERED_BY
Free Translated by michael in phpBB 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