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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2015-01-01, (목) 10:13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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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 마음은 번뇌 속 행동 만들어내는 그 마음

▲ ‘무생법인’ 고윤숙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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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통찰하여 그 근원에 있는 부처를 본다는 말이다. 선불교 초기에 남종선을 특징짓는 교의였다. 경전이나 누구에게 들은 말로 배우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보아 깨달음을 얻는, 당시로선 아주 특이한 득도의 방법을 요약하는 말이다.
‘불립문자’를 주장하며 팔만 경전을 내동댕이친 채 오직 마음을 보는 것만으로 깨달음을 얻으리라는 이런 주장이 많은 이들을 당황하게 했으리란 건 불을 보듯 뻔하다. 덕산 선감(德山宣鑑)이 특히 그랬다. ‘금강경’에 통달하여 속명의 성을 따 ‘주(周)금강’이라고 불리던 그는 남들을 평정하여 소란을 없애버리겠다고 결심하곤, 자신이 쓴 ‘금강경’ 해설서 하나를 등에 지고 남송으로 간다. 예주(豫州) 용담사 근처에 이르렀을 때, 마침 배가 고팠던 그는 점심을 먹고자 떡 파는 노파에게 가서 떡을 청했다. 그런데 노파는 무얼 보기라도 했는지, 덕산에게 묻는다.

불교 마음은 다른 두 가지 대답 가능
본체 속한 마음과 현재 움직이는 마음
남악회양이 보여 준 기왓장 가르침
마음 일렁임 속에 평온이 깨달음 역설

“스님, 등에 짊어지고 있는 게 뭐요?”
“금강경을 해설한 청룡소초라고 합니다.”
“그래요? 그럼 제가 ‘금강경’에 대해 물어볼 테니, 스님께서 대답을 하시면 내 돈을 받지 않고 떡을 드리지요. 허나 스님께서 답을 못하시면 오늘 떡은 팔지 않겠소.”
‘금강경’이라면 자타가 공인하는 덕산 아닌가! 그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그러라고 했다. ‘오늘 점심은 이걸로 해결된 것이다!’
노파가 물었다.
“금강경에 이르기를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이라고 했는데 스님은 어떻게 점심(點心)을 하겠다는 거요?” 점심이란 일상용어를 글자의 원래 뜻을 따서 마음(心)에 점(點, 점을 찍다, 불을 붙이다)을 한다는 말로 바꾸어 어느 마음에 점을 찍겠다는 건지, 혹은 어느 마음에 불을 붙이겠다는 건지를 묻는 말이다. 아주 재치 있는 이 질문에 덕산은 아무 대답도 못한다. 절에 들어가 선사들과 맞붙어보기도 전에 말문이 막혀버리게 된 것이다. 덕산의 미래만큼이나 선종의 미래를 예시하는 상징적이고 익살스런 얘기다.

‘즉심즉불(卽心卽佛)’, ‘마음이 곧 부처’라는 명제는 이런 깨달음을 위해, 그런 방법의 ‘근거’로서 마조(馬祖)가 제시한 가르침이다. 마음이 곧 부처니, 마음을 보면 부처를 보고 견성하리라는 것이다.
지금은 잘 알려진 얘기인지라 아주 당연한 얘기처럼 들리지만, 곰곰이 따져 보면 꼭 그렇진 않음이 드러난다. 이 말은 부처를 찾는 이들에게 주는 명확한 대답이다. 부처란 무엇이냐고 묻는 물음에 대한 답. 부처란 무엇인가? 깨달음을 얻어 ‘대자유’를 얻은 이다. 부처를 묻는 것은 그 깨달음을 얻는 법을 물음이고, 대자유를 얻는 길을 묻는 것이다. 직지인심 견성성불은 마음을 바로 보면 부처가 된다는 답이다. 이유는 마음이 바로 부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마음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에 대해선 아주 다른 두 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불성이나 본체 등과 같은 말로 표현되는 ‘마음’이다. ‘참나’를 바로 보자는 말에서 ‘참나’도 이런 본체에 속하는 마음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와 달리 지금 나를 움직이는 마음이다. 배고프니 먹고 싶다는 마음, 외로우니 짝을 얻고 싶다는 마음, 저 멋진 옷을 보니 사고 싶다는 마음 등등이 그것이다. 마음이 모두라고 보는 것이 불교라 믿기에,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란 말에서 말하는 마음이란 전자일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건 틀렸다고 하기 어렵다. 선 안에는 그런 의미의 마음이 개념이 매우 중요하게 사용된다. ‘본분사’나 ‘체(體)’ 같은 개념이 그것을 지칭한다. 사실 후자와 같이 그때그때의 마음을 말한다면, 그 마음을 아무리 지켜본들 부처가 되긴 어려울 것 같다. 자유로운 부처는커녕 탐심과 진심, 치심에 끌려 다니는 노예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게다.

마조의 ‘즉심즉불’이란 말을 해석하는 데도 두 가지 다른 입장이 있다. 가령 쉬샤오위에(徐小躍)는 즉심즉불의 심(心)을 불(佛), 성(性) 등 체(體)를 뜻한다고 본다(‘선과 노장’, 298쪽) 반면 팡리티엔(方立天)은 그 심을 당장 눈앞의 현실적인 마음을 뜻한다고 본다(‘중국불교철학: 심성론(3)’, 126). 전자라면 앞서 말한 것처럼 직지인심과 연결하여 이해하기 쉽다. 불성을 보고 부처가 되라는 말이니, 문제는 후자다. 후자라면 대체 그 마음을 지켜보아 부처가 되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 위빠사나에서 말하듯, 지켜보면 사라지는 그 마음을 보라는 말일까? 그건 아닐 게다. 그렇게 사라지도록 지켜볼 대상이란 부처가 아니라 마구니라 해야 할 테니까. 그럼, 저렇게 들끓는 마음 뒤에 숨어 있는 고요한 마음을 보라는 말일까? 그건 전자와 같은 말이 되니, 그것도 아니다. 그런데 남악회양(南嶽懷讓)이 마조에게 준 첫 번째의 가르침을 보면, 답은 오히려 후자인 것 같다. 거기서부터 찾아가보자.

남악은 자신이 주석하고 있던 절 인근에서 열심히 좌선을 하고 있는 스님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서 묻는다.
“스님은 뭐 하고 계시우?”
“보다시피 좌선을 하고 있습니다.”
“좌선은 해서 무엇하려고?”
“부처가 되고자 합니다.”

그러자 더 묻지 않고 돌아왔단다. 그리곤 다음날 숫돌과 기왓장을 하나씩 들고 다시 찾아간다. 좌선하는 마조 옆에서 숫돌에 기왓장을 갈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궁금해진 마조가 묻는다.
“스님, 뭐하고 계세요?”
“보다시피 기왓장을 갈고 있네.”
“그걸 갈아서 무엇하시려구요?”
“거울을 만들려고 하네.”
“아니 기왓장을 간다고 거울이 되겠습니까?”
“그래? 근데 스님은 좌선을 해서 부처가 되려 한다메?”
당황한 마조는 머뭇거리다 다시 묻는다.
“그러면 어찌해야 부처가 되겠습니까?”
“수레가 가지 않으면 수레에 채찍질을 해야 하는가 소에게 채찍질을 해야 하는가?”
여기서 마조가 하고 있는 좌선이란 고요히 앉아서 들끓는 중생심 뒤에 숨은 고요한 마음을 보려는 것일 게다. 선정의 집중을 통해 깊숙이 숨은 마음을, 혹은 ‘본체’를 보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것을 남악은 정성스럽게도 숫돌과 기왓장을 일삼아 들고 찾아와 시비를 걸곤 엎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고요한 부동심이란 움직이지 않는 수레 같은 것이라며. 그 움직이지 않는 수레에 앉아 뭐 하겠냐는 말이기도 할 게다. 그 수레에 안주할 게 아니라 소에게 채찍질을 해 수레를 움직이게 하라는 말일 게다.

할 말을 잊은 채 난감해하고 있는 마조에게 남악은 다시 말한다.
“그대는 좌선을 배우는가, 좌불(座佛)을 배우는가? 좌선을 배운다고 하는데, 선은 앉거나 눕는데 있지 않으며, 좌불을 배운다고 하는데 부처는 어떤 모습도 아니라네...그대가 앉은 부처를 구한다면 부처를 죽이는 것이며, 앉은 모습에 집착한다면 그 이치를 깨닫지 못한 것일세.”

선은 고요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며, 부처는 그렇게 앉아서 구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직지인심, 지켜보아야 할 마음이란 그 고요한 마음, 본체 같은 부동의 마음이 아니라 내 몸을 움직이는 바로 그 마음이고, 즉심즉불, 부처와 같다고 하는 마음은 바로 이런저런 번뇌에 들끓으며 하나하나의 행동을 만들어내는 마음이다. 좌선을 해서 부처를 구할 수 없다 함은, 그렇게 들끓는 마음을 피해 고요함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부처를 얻지 못한다는 말이다.

알다시피 불가에서 마음에 대해 말할 때 종종 바다의 은유를 빈다. 표면의 끝없이 일렁이는 파도와 물결들이 있지만 조금만 깊이 내려가면 고요하고 평온한 바다가 있다고. 표면의 파도와 물결이 번뇌에 일렁이는 마음, 그때그때 나의 몸을 맴돌고 움직이게 하는 세간의 마음이라면, 깊이 내려가면 보게 되는 고요하고 평온한 바다야말로 불성이고 본체고 여래장이고 공이라고 한다. 그러나 마조가 말하는 즉심즉불에서 부처와 다르지 않은 마음이란 놀랍게도 이런 깊숙한 곳에 있는 본체나 공이 아니라 표면에서 일렁이며 나를 움직이는 마음인 것 같다. 마조 자신도 이렇게 명시적으로 말한 적이 있다. “공(空)을 관찰하여 선정에 들어가면 바로 유위(有爲)에 떨어진다 하겠다.”(‘마조록/ 백장록’, 25쪽)

그러나 중생과 부처가 다르지 않다고 해도 번뇌에 시달리는 마음과 부처가 같다고 할 순 없을 터이다. 번뇌는 번뇌이고 속박일 뿐, 부처의 자유와는 거리가 머니까. 그렇다면 그 마음이 부처라 함은 무슨 뜻일까? 그걸 보면 어떻게 성불한다는 것일까? 아무리 깊은 선정에 들어가 평온하다 해도 돈과 욕심, 충돌과 분심, 혹은 속고 속이는 일로 가득 찬 세상사이 물결 속에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부처와는 거리가 먼 중생이 되고 만다. 그렇다고 바다의 표면에 물결이나 파도가 없기를 바란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다. 파도가 일어날 때마다 왜 이게 일어나는 거야 하며, 번뇌심에 또 하나의 번뇌를 얹어 고통받게 된다. 화살의 고통에 더해 왜 화살을 쏘는 거야 하는 두 번째 번뇌가 찾아오듯이. 세상을 좀 안다는 이들이 그런 세상사에 대해 냉소하며 무력한 허무주의에 빠지는 건, 그 번뇌를 따라 마구니굴로 들어가는 일이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 멸진정까지 가는 깊은 선정에 이르고서도, 거기서 나오는 순간 번뇌가 되살아남을 보곤 세상을 벗어난 그 선정은 답이 아니라며 떠나지 않았던가! 문제는 파도를 떠나 깊은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바로 저 파도 속에서, 일상생활 속의 끝없는 물결을 타고 살며 편안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마조의 말이다. “지금 하는 일상생활과 인연 따라 중생을 이끌어주는 이 모든 것이 도(道)이니, 도가 바로 법계”다(‘마조록/백장록’, 28). 일상에서 대하는 대상(境)과 만나며 탐진이나 애증에 물들지 않으면 그것이 도란 말이다. “마음과 경계(境)를 깨달으면 망상이 발생하지 않으며, 망상이 나지 않는 그 자리가 바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이다. 무생법인은 본래부터 있었고 지금도 있어서 도를 닦고 좌선을 할 필요도 없으니, 도를 닦고 좌선을 할 것도 없는 이것이 바로 여래의 청정선이다.”(‘마조록/백장록’, 30쪽)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solaris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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