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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2015-01-01, (목) 10:13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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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 이중표교수-오온의 형성과 발생(1)
기획-붓다가 깨달은 연기법(19)

진실한지를 알려면 탐진치를 살펴라
탐진치는 진실을 측정하는 척도이다
화를 내는 사람은 깨치지 못한 사람
종교에 대해 지나친 환상 갖지 말라

무엇이든 바로 알기 위해서는 나와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한다. 있는 그대로 거짓없이 보고 듣고 알고 거기에 맞춰서 살아가라는 것이 불교이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나와 세계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나라는 존재가 주어진 시간과 공간속에서 하나의 존재로 태어나 일정기간 살다가 죽어가는 존재로 알고 있다.

이러한 생각에 의심을 갖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일단 그런 생각을 너무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런 질문을 던진다. 처음 시간과 공간속에 우주를 만든 사람은 누굴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 그때 여러가지 이론이 나올 수 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말한다. 성경책 창세기에 왜 그 이야기부터 시작할까요.

그게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다.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나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자신의 뿌리를 알고 싶은 것이다. 사람들의 뿌리에 대한 갈망은 조상숭배 만 봐도 알 수 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알고 싶어 하고 알아야만 그것에 기초해서 세상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누구도 세계를 누가 창조했는지 본 사람이 없다. 그러니 믿어야만 한다. 이게 여타 종교의 본질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렇게 믿으면 안된다. 불교를 그런식으로 맹목적으로 공부하면 안된다. 죽어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죽으면 천당 간다거나 극락 간다고 하는데 아무도 갔다 온 사람이 없다. 가면 못오는 데가 천당이고 극락이다. 그러니 이것도 본 사람이 없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놀라운 것은 천지창조를 본사람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데 믿는 사람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본적도 없는 극락과 천당을 가겠다고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대단한 것 같지만 알고보면 허망하다. 그런식으로 불교를 공부하면 안된다.

많은 사람들이 해탈하고 열반 하겠다고 불교 공부한다. 그런데 주변에서 해탈했거나 열반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해탈이 뭔지 열반이 뭔지 물어보면 해봐야 안다고 한다. 천당을 가봐야 안다는 것과 알지도 못하고 본적도 없는 해탈과 열반을 구하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불교의 문제는 막연히 믿으면 되겠지 하는 맹신 속에 있다. 부처님께 어느날 바라문이 와서 이교리가 가장 좋다, 진실이라고 말했다. 이에 부처님은 그대는 왜 그것이 진실이라고 말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바라문은 대대로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말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는 바라문천을 본적이 있는가. 본적이 없다. 그러면 누가 봤다는 말인가. 본 사람은 없지만 전해오니 진실일 것이다. 부처님이 물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이 나라 최고의 미녀와 결혼하겠다고 하면서 그 여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 사는지도 모르면서 그 여자보다 더 예쁜 여자는 없고 나는 그여자와 결혼하겠다고 한다면 말이 되는가. 이는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브라만천이 가장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열반이 무엇인지, 해탈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열반하겠다, 해탈하겠다 말한다면 그것은 브라만천을 가야 해탈한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것이 있는가. 나는 누구든지 지혜롭고 현명한 자가 물으면 나는 누구나 볼수 있는 말로 대답 한다.

무엇이든지 신비화 되면 권력화 된다. 아무도 모르는 것을 나만 알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실은 나도 모르면서 아는 것처럼 행세할 뿐이다. 아무도 알 수 없으니까 알 필요도 없는 것이다. 가치있는 것처럼 꾸미고 나만 알고 있는 것처럼 행세하면 된다. 그러면 여기에 추종하는 사람이 나오고, 이렇게 우리를 속박하고 억압해 왔다.

종교가 인류를 속박해 왔다. 모든 종교는 사람을 구속하고 속박했다. 종교의 좋은 면을 이야기 해도 종교가 인류에 끼친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중세 암흑시대에 종교가 인류에게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종교에 대해 지나친 환상을 가지면 안된다. 종교는 신도들의 믿음을 이용해 다른 이를 억압하고 탄압하고 자기이익을 취하려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부처님은 어떤 이야기를 들으려 할 때 탐진치가 있는지를 살피라고 했다. 탐심이 있는지 살펴 탐심이 없으면, 화를 내는지를 보면 안다. 욕망이 충족이 안되면 화가 나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도를 깨쳤다 해도 화를 내고 있으면 그는 아무것도 깨친 것이 없는 것이다. 탐진치는 진실한가 아닌가를 측정하는 척도이다. 부처님은 어디가서 어떤 가르침을 받더라도 탐진치 있는 곳에는 얻을 것이 없으니 가지말라고 했다.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열반을 신비화 하지 말아야 한다. 누가 해탈했다고 하더라도, 남이 해탈한 것은 나에게 아무 소용없다. 찾아가 봐야 내가 해탈이 뭔지 모르면 그가 정말 해탈한지를 모른다. 내가 모르면 갈수가 없다. 목적지를 모르면 길을 떠나봐야 헛일이다. 따라서 불교 교리를 공부하지 않고 수행한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며 부질없는 짓이다.

우리 불교는 지금 경을 안보고 수행하면 되는 풍토에 빠져있다. 지금 우리가 불교 공부하는 것은 열반이 뭐고, 해탈이 뭔지를 알자는 것이다. 그래야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 공부과정에서 성취하라고 당부하신 열반 해탈을 누구나 다 얻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누타라삼먁삼보리는 최상의 깨달음,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는 깨달음이다. 평등하게 열려있는 깨달음이다. 나는 안돼라는 생각을 갖지 말고 나는 할 수 있는 생각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렇게 목표를 세우고 살아가는 것이 불자이다.

깨달음은 누구나 함께할 수 있고 가능하다는 것을 강의를 통해 알려주고 싶다. 모든 사람들이 같이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것이 가장 기본적으로 갖춰야할 토대라고 생각한다. 내가 깨쳐 모든 중생 제도하겠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렇게 되면 내가 깨쳐서 못 깨달은 사람을 내가 끌고 가겠다는 권력자가 돼 버린다. 성직자들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권력이 돼 버린다.

부처님은 깨달은 자신이 승가를 이끌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열반경에 잘 나타나 있다. 부처님께서 병에걸려 사경을 헤맬 때 아난다는 염려가 많았다. 부처님이 후계자를 세우지 않고 아무말도 안하고 돌아가실까봐 걱정했다. 하지만 부처님은 무엇을 감추거나 하지 않고 모두 다 이야기 했다. 부처님은 제자들을 도반으로 여겼을 뿐 승가가 나를 추종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이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누가 끌고 가라고 할 필요도 없었고, 누굴 믿고 살라고 하지도 않았다. 결국 누굴 믿는다는 것이 사라져야 한다. 부처님을 믿는다는 것 조차도 사라져야 하는 것이었다.

부처님은 누구에게 빈주먹 하나도 준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부처님 바루가 중국까지 전해지고, 진실인 것처럼 거기에 의지해 수행하고 인가를 받아야 할 것처럼 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있는 불교는 무엇인가. 이를 이해 못하고 절에 다니는 것은 우리가 해야할 불교가 아니다.

나에게는 감추어든 스승의 주먹이 없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고 남에게 의지해서는 안된다. 가르침에 의지하고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자등명 법등명이다. 다르마와 나는 중요한 연관성을 갖는다. 내 가르침은 너 자신에 대한 것이다. 너 자신을 바르게 알고 거기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 불교다.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남에게 의지하지 말라는 말에는 부처님에게 조차도 의지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들어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는 것은 자신에 의지해 살아가라는 극명한 가르침이다. 거기에서 부처님이 나 자신에게 의지한다. 법을 가르친 것이 나의 가르침이다. 불교를 공부할 때 근본으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 자신에 대한 것이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부처님의 어떤 말을 읽어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자신에 의지하려면 자신을 이해해야 한다. 자신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을 잘 모른다. 뭘 알려고 하면 생각으로 알려고 한다. 나라는 것은 나 이외에 없다. 내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게 육입처다. 안으로 보고 듣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할 때 내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밖으로는 보이는 놈이 있다. 이 생각이 제대로 됐는지를 검증하는 게 불교다.

무엇을 하기 위한 수행법인가. 수행 자세가 요가 선정과 다르지 않다. 요가도 삼매를 이야기 한다. 교육원장이 깨달음은 이해하는 것이라고 하니 수좌들이 선정을 말한다. 깊은 선정에 들면 뭐가 나오는가. 선정은 여실지견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부처님은 선정에 빠져있는 것을 지극히 경계했다. 부처님이 선정주의를 배척하고 고행을 시작했지만 거기서도 원하는 것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선정과 고행을 모두 아니라고 생각하고 버리고 나서 얻은 것이 깨달음이다.

업장소멸 기도한다고 난리인데 업장소멸 할 줄이나 아는지 모르겠다. 말로만 하고 있다. 불교의 업의 의미는 우리가 아는 업설이 아니다. 불교의 업설을 제대로 알려면 삶에 조명해 철저히 내부에서 깨달아야 한다.

삶은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있다. 시간과 관계를 통해 복잡하게 얽혀있다. 내면세계를 전체적으로 알려준다. 현재 쓰고 있는 상태를 비추어 보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여 성찰하는 것이 가장 좋은 수행이다. 가르침을 듣고 명상에 들어가 생각을 한다. 교상이 있으니까 수행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다 문제가 생기면 질문한다.

질문도 오취온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면 그렇게 질문하면 인된다고 가르친다. 오취온은 색수상행식 개념의 합이 아니라 내몸을 관찰하라는 것이다. 느낌 생각을 너인 것처럼 붙잡고 있잖아, 물을 때 색은 어떻게 해서 생기고 무엇이 원인입니까 하고 물어야 한다. 어디서 일어는가. 촉을 연해서, 육입을 통해서 일어난다고 대답한다. 내 지혜가 미치지 못해서 길을 못찾을 때 확인해 가라는 것이다.

그럼 부처님의 가르침 없이 혼자 공부할 수 있는가. 지금도 경을 보면서 아직도 내 몸속을 들여다 보는 공부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론들만 만들어 진다. 서로 다른 이견들이 충돌한다. 산자나띠하면 대립이 일어나 논쟁이 벌어진다. 내 가르침은 싸움이 없는 가르침이다. 체험적으로 아는 것은 다툼이 없다. 예를 들면 수박을 앞에 놓고는 다투지만 먹어보면 다툼이 없다. 불교는 이론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론이 불교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불교는 안이비설신의부터 시작한다. 부처님 당시에 브라만이 와서 브라만이 일체라고 이야기 한다. 브라만에서 나와서 브라만으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브라만이 근원이라는 얘기다. 반면에 불교는 일체가 12입처라고 말한다. 여러분의 세상은 누가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보기 때문에 나타난 여러분의 세상이라는 것이다.

불교는 말한다. 듣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 내 손바닥에서는 소리가 난 적이 없다. 들으면 소리가 된다. 아무도 듣지 않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조건 없이 홀로 돌아다니는 소리는 없는 것이다.

서구에서 창조론이 깨지고, 원자론이 나타나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다. 천년을 지배하던 천지창조대신 지금은 물질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잘못된 삶에서 해방시키려 한 것이 불교다. 세계와 나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가져야 한다. 불교처럼 이해하고 깨달아야 한다.

개하고 사람은 사는 세상이 다르다. 이게 일체 유심조다. 화엄경이나 대승경전들은 부처님 말씀에서 조금도 어긋남이 없다. 대승 소승 대결할 것이 없다. 정법을 정확히 이해해 가는 것, 우리 자신이 수행할 때 도움이 되는 역사적 교훈이다.

우리는 눈을 통해 세상을 본다. 빛이 없다면 눈이 따로 있을 수 있겠는가. 물질로된 육체라는 뜻이다. 부처님 당시 우파니샤드에 아트만이 볼때 그것을 눈이라고 한다. 즉 아트만이라는 실체가 볼때는 눈, 들을 때는 귀라고 했다. 인지활동은 보이는 것이 없으면 본다는 인지활동이 일어날 수 없다. 실제로 소리를 들려주지 않아 오랫동안 소리를 못들으면 귀머거리가 되고, 눈을 안쓰면 장님이 된다. 이게 업보다. 부처님은 이 진실을 깨달은 것이다.

부처님의 업설은 무아설과 어긋나지 않는다. 업만 있지 작자가 없다. 이게 무아설이다. 쉽게 말하면 비가 없는데 어떻게 내리는가. 비가 있어서 내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도망상이다. 부처님처럼 살면 부처님, 도둑질하면 도둑놈이다. 나와 부처님이 다른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속세의 모든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일체중생의 행복을 위해 살아온 분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가 아닌 것이다. 부처노릇 하기가 힘들다. 부처노릇 할수 있어야 부처이다. 이게 업보고 이게 무아이다.

지금 우리 불교는 제대로된 불교가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보고 듣고 맛보고 만지는 삶을 통해 허망하게 자기라는 생각을 만들어 간다고 말했다. 자기라는 생각이 쌓여간다. 그걸 집이라고 한다. 함께 모아서 나라는 놈을 쌓아가는 것이다. 늙으면 고집세지고 제 생각 밖에 안한다. 그럼 망상덩어리를 없애버리면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다. 이렇게 소통하며 온 세상 사람과 살아가는게 동체대비다. 행복을 누릴수 있는 수행 이게 불교다.

주간불교 / 2017/03/14 한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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