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yber; Lotus-America Buddhist College

<Lotus University - America Buddhist College>

* 잦은 질문    * 찾기

현재 시간 2018-10-18, (목) 5:40 am

댓글없는 게시글 보기 | 진행 중인 주제글 보기

모든 시간은 UTC + 9 시간 으로 표시합니다

새 주제 게시글 주제글에 댓글 달기  [ 1 개의 게시글 ] 
글쓴이 메세지
전체글올린 게시글: 2017-02-23, (목) 1:15 am 

가입일: 2015-01-01, (목) 10:13 am
전체글: 208
무지를 깨치는게 중요하니 내세워서는 안된다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보편적인 생각조차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반성 못하고 사는 잘못을 알려주는게 불교다

분별하는 마음은 조건에 의지하여 일어난 마음이다. 이런 마음에 의지하여 연기하는 것이다. 조건이 없어지면 분별하는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인연이 있으면 일어나고 인연이 없으면 사라지는 것이다.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사람들은 분별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것에 의지하여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내가 있어 보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공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시각작용은 뭐가 보이면 보는 놈이 내안에 있고, 보이는 놈이 밖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부처님은 보지 않으면 보는 놈도 보이는 놈도 없다고 통찰했다. 이것이 반야이다.

부처님은 실제로 반야를 가지고 형상을 보았다. 부처님은 무지한 사람들이 식이 생기면 내 몸 안에 식이 있고 밖에는 명색이 있다고 분별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요즘 나온 다른 책에서는 명색을 물질과 정신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컵은 어떤 형태를 갖고 있는가. 이것은 컵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이 있고 나는 그것을 보고 있다. 우리는 이름과 형태가 있는 것만 본다. 개념과 이름, 형태와 요소를 가지고 보도록 길들여져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론인가 사실인가.

모든 이론은 산자나티에서 일어난다. 산자나티는 구별하는 생각으로 대상을 인식하는 대표적인 의식이다.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산자나티이고, 아비자나티 하면 일어나는 생각이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상호 모순 관계 속에서는 답이 안나온다. 모든 이론은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한다. 그러니 산자나티에서 일어난 논란에 불교가 논의해야 하는가. 싸워야 하는가. 모든 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왜 아비자나티 해야 하는지 이해하고 공부해야 한다. 시비를 걸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길을 가면 모든 논란이 없어지고 세간과 다투지 않게 된다. 세간이 나와 다툴 뿐이다.

우리는 시각활동을 의지해서 분별하는 마음이 생기면 안식이라 부르고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라 부른다. 그리고 의식은 하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즉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생각하는 모두가 나이다. 그러나 보는 마음과 듣는 마음은 다른 경로를 통해 형성되고 있다고 부처님은 말한다. 시각을 통한 반응부위와 청각을 통한 반응부위는 다르다. 각각 일어남을 알수 있다. 그런데 왜 한덩어리로 이해할까.

부처님은 말해주고 있지만 우리의 분별하는 마음인 산자나티 때문에 알수가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았으면 우리는 마음 속에서 관찰해야 한다. 요즘 불교공부는 뭐가 문제냐면 부처님이 살피라고 말했지만 자기 생각으로 산자나티하고 수행을 수행으로 따로 한다. 이게 마음 이야기다. 이걸 떠난 것은 망상공부이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게 마음이다. 어디서 마음을 닦는다는 것인가. 이는 헛생각이지 공부가 아니다. 이걸 떠나 수행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조건에 의해 이름 붙일 뿐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은 생긴 것이라는 것을 관찰하는가. 생긴 것은 식을 말하는 것이다. 식은 연기한 것으로 조건이 생긴 것이다.

부처님은 다시 말한다. 그것을 자양분으로 해서 생긴 것이라 관찰하는가. 비구들이여 중생들이 머물거나 태어나게 하는데는 네가지 자양분이 있다. 입에서 일어나는 단식, 촉식, 의사식, 식식이 그것이다. 이 네가지 자양분은 무엇에서 생긴 것인가. 갈망하는 마음이 바탕이고, 그 마음으로 인해 일어난 행들이 쌓인 것이다.

갈망하는 마음은 무엇인가?

관찰해 처음부터 이런게 보일 수는 없다. 집중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힘을 길러 발전시켜야 한다. 수행의 하나인 호흡 관찰은 나중에 가면 여기로 연결된다. 호흡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관찰이 점점 더 깊어져 호흡조차 연기라는 것을 보게 된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여실하게 관찰하게 된다. 이것을 보는 자가 법을 보고 여래를 보는 자이다.

분별하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산자나티로 경전을 종횡으로 외고 이해해도 통찰하고 이해하는 아비자나티와는 아무 상관없는 개념일 뿐이다. 개념적으로 열심히 했지만 달라진 것은 눈꼽만큼도 없을 것이다. 내 자신의 구조를 정확히 이해할 때 어리석은 생각에서 일어나는 것이 보인다면 그것을 버리고 고통을 없앨 수 있다.

부처님의 말에 있는가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가. 이걸 마음공부라 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건 일어난 것이다”라고 관찰하는가. 경을 봤다는 것은 자기를 관찰하는 것이다. 자양분은 소멸하는 법이라는 것을 관찰하는가. 느낌도 생각도 의식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감정이 달라진다. 즐겁게도 고통스럽게도 만든다. 그걸 깨닫는 것이다. 자양분이 소멸하는 법이라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다.

의심이 일어나는 것은 불확실성 때문이 아닌가. 연기하는 것이다. 갈망하는 마음을 자양분으로 해서 생긴 것이다. 의심은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통찰하면 “많은 사람은 의심을 논리적으로 해결하려 한다. 내가 논리적으로 잘 설명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같은 논리가 아니면 반발할 것이다. 그래서 모든 철학이 찬반으로 나눠 다툰다. 부처님은 그 불확실성은 통찰지로 사라지는 것이지 토론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알게되면 확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교리를 가지고 다투지 말라는 것이다. 할 줄 모르니까 해보지도 않고 싸우는 것이다.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체험해 본 사람은 싸울 일이 없다. 비구들이여 그것의 자양분은 생긴 것이니 통찰지로 관찰하면 사라진다. 불확실성은 통찰지를 통해 사라지는 것이다. 생긴 것이라는 것에 의심이 없는가.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생긴 것이라는 것은 통찰지로 알 수 있는 것이니 이런 허상을 반성하라”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것은 자영분에서 생긴 것이다. 연기와 연결돼 있다. 부처님은 나무가 자랄 때 물과 비료가 주어지면 나무가 자란다. 나무가 비료를 먹고 크는게 아니라 물과 자양분에 의해 자라나는 것을 나무라 부른다. 연기한 법이다. 자양분의 개념은 비유를 통해 우리 자신이 자양분을 통해 자라는 나무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만약 이 견해를 이해하고 청정하고 순수한 견해를 가르친 부처님의 법에 집착하고 소중히 하고 애착한다면 이것은 산자나티이다. 건너기 위한 것이지 붙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뗏목의 가르침을 이해해야 한다.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게 금강경에 나오는 비유이다. 법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가르침이 아닌 것을 주장하려 하는가.

부처님은 무아를 주장하는데 가르침이 아닌 유아를 주장하려 하는가. 무아라는 말만 나오면 아비달마에서는 아트만이 들어와 있다고 한다. 용수의 중론은 브라만들의 아트만을 도입한 것이다. 법에 너무 집착하면 안된다. 금강경 이야기가 부처님 말씀과 같은가 다른가. 초기불교는 대승불교는 안된다 하고, 대승불교는 소승은 안된다고 싸운다. 싸워서는 안된다.

연기의 자양분은 갈애하는 마음

비구들이여 이 견해를 이와같이 소중히 하지 않기를 바란다. 연기의 자양분은 갈애에서 느끼는 마음, 육입처가 바탕이다. 즉 명색이다. 이름과 형태가 없는 것은 누구도 보고 들을 수 없다. 더 놀라운 것은 개념이 없는 것은 지각도 못한다. 그러니까 미국사람에게 시금털털한 맛을 설명할 수 없다. 그 사람들이 알고 있는 개념으로 던져버리지 그 맛을 모르는 것이다. 체험을 통해 명색의 개념으로 인식할 때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명색을 물질과 정신이라 하는 것은 아비달마에서 정신적인 존재, 물질적인 존재로 쪼개 설명한데서 비롯됐다. 부처님은 명색을 이렇게 설명한 내용이 하나도 없다. 산자나티에 대한 반성을 하자는 것이었지 설명하려는 교리가 아니었다.

지금 불교는 대중과 멀어져 있다. 어디서부터 비롯됐느냐. 무명으로 비롯된다. 이렇게 성찰하는 것이 수행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무지를 깨달음, 무지를 버리고 있는 그대로 알게될 때 무명으로부터 괴로움이 쌓여간다는 것을 알게된다. 사성제를 관찰하면 12연기가 드러난다. 부처님 가르침은 항상 그 벽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움직이면서 이야기 된다. 이러한 체계로서 이야기 해야 한다. 그렇다고 부처님 가르침이 관념체계는 아니다.

사성제 12연기를 조망해 보라는 것이다. 생에 의지하여 노사가 있다. 비구들이여 생에 의지하여 노사가 있는 것인지 그런 생각이 드는가. 무명에 의지하여 행업이 있다. 행은 조작된 내용이다. 유위를 조작해 내는 것을 멈춰야 한다. 멈추는 것을 수행이라 한다. 신구의 삼업은 언어, 신체, 의도적인 활동을 통해 상카라가 작동한다. 행은 항상 복수로 나온다. 실천하고 수행해 가는 것과 관계가 있다.

이게 바로 다르마다. 아누타라삼먁삼보리는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함께 도달할 수 있는 함께하는 깨달음이다.

연기, 이것이 나타나면 이것이 나타나는 것

연기는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이것이 나타날 때 저것이 나타난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

예를들면 무엇을 관찰할 때 이것은 물과 컵이다. 저것은 책상이고 스피커다. 아비자나티의 대상은 이것들이다. 내눈 앞에서 관찰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명사의 격을 통해 일어난다. 이것이 있는 곳에 저것이 있구나, 인과관계로 보는데 인과관계가 산자나티이다. 결과가 일어나지 않으면 원인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때 무명이 사라지는가.

우리는 자기생각이 옳다는데 급급하다. 내 생각을 깨달아가는게 중요하지 옳다고 주장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무지를 깨쳐가는 것이 중요하다. 내세우려 하는 것은 의미없는 공부다. 그런 관점에서 연기를 보게되면 현재 마음을 12연기로 관찰할 수 있다. 여러분은 무명의 상태이기 때문에 그런 과정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있는 것에 이것이 있고, 이것이 나타나면 이것이 나타난다.

보편적이고 일방적인 생각자체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 지를 알아야 한다.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을 스스로 깨닫는 것이 불교다. 반성도 하지 못하고 살고 있는가. 이것을 알려주는 게 불교다.

그런데 자기 생각으로 불교를 말하니 잘 이해가 안된다. 이런데서 부처님은 근심 걱정 고통 좌절이 생긴다고 말하고 있다. 나 자신 속 잘못된 생각을 소멸할 때 고통이 소멸된다. 이게 부처님의 육육법문이다.

모든 삶은 안이비설신의를 통해 보고 듣고 냄새 맡으며 사는 것이다. 육입처는 육근으로 어떻게 살것인가를 보여주는 형식이다. 고통이 일어나는 것이다. 눈으로 보면 이것이 일어난다. 이걸 계라고 한다. 이렇게 18계가 만들어 진다.

18계의 계라는 개념도 아비달마에서는 18가지 요소로 설명한다. 이 때문에 아직까지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번역하는 사람들도 의심없이 번역하는 것이다. 본말이 전도된 변역이다. 이해하고 써야하는데 영어에 의지해 번역하니 실질적인 접근이 어려운 것이다.

다투라는 개념이 처음 인도의 세계관에서 등장한다. 천계가 있고 허공계가 있고, 땅의 세계가 있다. 이렇게 삼계설이 나왔는데 부처님은 이를 차용해 마음에서 비롯되니까 삼계를 욕계, 색계, 무색계 층의 개념을 만들었다. 이는 다른 차원의 개념이다.

부처님의 삼계 개념은 수평구조 속에서 경계가 된다. 경계선을 누가 그을까요. 세상이 구별되고, 책상하고 책이 구별된다. 책은 책계가 있고, 책상은 책상계가 있다. 구별은 분별하는 의식 때문에 경계가 주어진다고 했다. 안과 색입처, 식이 발생하면 다른 것과 구별되는 안계라는 의식이 형성된다.

이처럼 부처님의 경계는 요소적인 요소가 있지만 요소라는 개념은 아니다. 부처님의 사대설을 육계설로 끌어들여 해석하는 것은 유물론자들이 만들어낸 개념이다. 우파니샤드에 네가지 요소설이 나온다. 그것만이 실체라고 생각하는 사상가들이 나온다. 이 세상은 물질로만 설명해야 한다. 오직 물질이다. 그럼 정신은 어떤 것인가. 그래서 고락을 넣어 7요소설이 등장했다. 그 구조속에서 지수화풍, 허공, 고, 락 7요소는 우리들이 분별한 경계적 의미이지 실체적 의미가 아니다.

부처님이 왜 육계를 이야기 하고 있는 가를 인도 배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딱딱한 흙의 성분, 뜨거운 불의 성분 등 유물론자들이 생각한 사대는 그 자체로서 실체이다. 본래부터 있는 불생불멸의 실체 네가지이다. 현대의 원자론과 똑같은 이론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촉촉하게 느껴져서 물이라는 말을 사용할 뿐이다. 경계선을 가지고 있는 의식의 내용들이지 실체가 아니다. 그러니 무상하다. 이를 연기적으로 다시 설명한 것이 육계설이다.

양자역학에서 보니 원자가 깨져버리고 시간적으로 존재하는게 아무것도 없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성질이 달라져 버린다. 보니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주관과 객관이 이원화되어 연기적인 생각자체를 대상만 무상하게 있는게 아니라 나조차도 무상하게 있기 때문이다.

이 세계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 의식과 마음가짐을 알아차린 삶 자체가 우주의 핵심이고 이게 바로 진실이다. 그걸 이야기 해야 한다. 과학은 지금 이러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서양은 과학과 철학이 이별해 버렸다. 종교와 철학이 이별한 것이 르네상스이다. 종교는 종교이고, 철학은 철학으로 보는 것이다. 이 때문에 대학에서도 종교학과, 철학과, 불교학과 등등 많은 학과가 생겼다. 지금은 진리도 각 분야마다 따로 있다. 학교에서 과학과 철학은 딴얘기를 하고 있다. 가장 혼란스러운 지경에 있는 것이다.

이게 양자역학에서 비롯됐다. 과학도 사람이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문과학과 철학이 달라서는 안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인문사치학이다. 지식을 줒으러 다니는 것이다. 탐욕이 지식으로 옮겨간 것이다. 인문학은 인간 자신에 대한 성찰이다. 그래서 불교가 진정한 인문학인 것이다.

분열된 현상을 통일돼야 한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불교이다. 우리 마음이 입체적으로 돼있지만 평면적으로 기술할 수밖에 없다. 보는 시각에 따라 불교공부는 이모저모 따지며 내마음을 들여다 보면 다 본 것이다. 이것을 모르고 수행한다는 것은 이해가 안된다. 자기 마음 들여다 보지 않으면서 어떻게 수행을 하는가. 볼 때 일어나는 것이 마음이고 들을 때 일어나는 것이 마음이다. 수행은 여기서 일어나는 것이다.


상위
   
 
이전 게시글 표시:  정렬  
새 주제 게시글 주제글에 댓글 달기  [ 1 개의 게시글 ] 

모든 시간은 UTC + 9 시간 으로 표시합니다


접속 중인 사용자

이 포럼에 접속 중인 사용자: 접속한 회원이 없음 그리고 손님 1 명


이 포럼에서 새 주제글을 게시할 수 없습니다
이 포럼에서 그 주제글에 댓글을 달 수 없습니다
이 포럼에서 당신이 게시한 글을 수정할 수 없습니다
이 포럼에서 당신이 게시한 글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 포럼에 첨부파일을 게시할 수 없습니다

찾기:
이동:  
POWERED_BY
Free Translated by michael in phpBB 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