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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올린 게시글: 2017-01-18, (수) 2:12 am 

가입일: 2015-01-01, (목) 10:13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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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속에 화가 본래 존재하고 있어서 화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무소유는 욕심내지 말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잦고하면 행복하다고 했다
연기한다는 것은 관계 맺고 있다는 것
조건이 갖추어지면 나타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부처님 깨달음의 연기법을 주제로 공부하고 있다.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되새겨보면 불교란 무엇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엇을 가르친 것인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요즈음 불교공부 하는 모습을 보면 부처님이 무엇을 깨달아 무엇을 가르쳤는지 명확하지가 않다. 수행의 목적도 열반이나 해탈, 성불이라 말하는데 이 단어들에 대한 이해가 분명치 않다. 우리는 먼저 단어들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

사실 인간들은 삶의 목적이 있을 때 의미있는 삶이라 한다. 그저 태어났으니까 죽을 때까지 살다가 죽자는 것은 의미 없는 삶이다. 인간과 달리 동물들은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사는지를 모른다. 실제 동물들도 고민을 하고 사는데 우리가 모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를 보면 개가 삶을 고민하는 것 같지 않다. 반면에 인간은 먹고 있으면서도 생각을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지 나는 누구지라고 생각을 한다. 이러한 생각이 중요하다고 본다. 다른 동물보다 인간이 우수한 생명으로 진화한 것은 근본적으로 자기의 존재를 알아보려 하고,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는 점이다. 부처님도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불교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그 해답을 찾았기 때문에 불교가 일류종교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다른 종교는 인간을 중심에 두지 않고 신을 중심에 두고 있다. 다른종교에서는 신이 천지를 창조할 때 인간을 위해 창조한 세상이 아니다. 어느날 신이 갑자기 하늘이 있으라 하여 하늘을 만들고, 땅을 만들고, 사람을 만들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거기 살도록 허락했다.

그런데 거기 사는 조건이 신의 말을 듣고 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인간은 건방지게 제멋대로 살려다 쫓겨났다. 쫓겨난 인간이 고통받으니 고통없는 신의 나라로 오려면 신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신의 뜻에 따르는 것이 인간이 사는 목적이다.

과연 우리는 그래야 하는 것일까. 부처님 당시에도 이 세상은 신이 창조했고 신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신을 따라야 한다는 종교가 있었다. 기독교나 브라만교 뿐만이 아니라 인류가 삶을 고민하게 될 때 신이 창조했다는 것이 제일 먼저 얻은 해답이었다.

부처님도 그런 풍토 속에서 살았는데 왜 출가해서 뭘 깨달으려 했을까. 대다수 사람의 인생 목표는 좋은 환경에서 돈도 벌고, 명예도 얻고, 권력도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태어났을 때 이미 그런 것이 갖추어져 있었다.

왕자로 태어났고, 나중에 왕이될 태자였다. 왕은 태자가 딴마음 먹지않고 왕이되어 나라를 다스리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걸 내던져 버린 것이다. 부처님이 어렸을 때 춘경제에 가서 보았던 것들이 부처님을 성도의 길로 인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부처님은 훌륭한 스승을 찾아 다니며 진리를 구하다 답이 없음을 알게 된다. 어디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던 부처님은 춘경제에서의 일을 떠올린다. 그점이 깨달음의 내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부처님은 춘경제에서 살아있는 것들의 모순과 갈등, 투쟁을 보게 된다. 처음으로 접한 궁궐 밖의 삶에서 모두가 자기처럼 좋은 옷 입고 편하게 지내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같이 행복하지 못하고 지배하고 복종하며, 차별과 불평등한 것이 정당한가를 고민했다.

그러니 자기에게 주어진 권력들이 좋기만 했겠는가. 그리고 춘경제에서 쟁기로 논을 갈 때 벌레가 나오고, 이 벌레를 새가 쪼아 먹고, 새는 매가 채가는 상황을 보면서 자기가 살려고 남을 죽이는 약육강식의 현장을 본다. 그리고 살아가는게 왜 모두 이런가를 보며 태자는 삶의 재미를 잃어버렸다.

조용히 논두렁 나무 밑에 앉아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모두 행복하기를 원하는데 행복한 구조가 아닌 원인은 무엇인가? 그 해답은 없는가? 부처님은 해가질때까지 삼매에 들어 시간 가는줄도 몰랐다. 행사가 끝나 궁으로 돌아온 태자의 삶을 지배한 것은 이 생각이었다.

이것이 부처님 출가의 원동력이라 본다. 경전에는 사문유관을 통해 생로병사의 고통을 알고 출가했다고 하는데 부처님이 태어난지 이레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보면 이 때 처음 죽음을 경험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사문유관은 청년이 되면서 우리가 겪는 사춘기이다. 사춘기의 자각이 사람의 인생을 결정한다. 모든 동물은 놀이를 통해 사는 법을 배운다. 인간에게 놀이는 학습의 근본이다. 못 놀게 하니까 사람이 안된다. 놀이라는 것은 혼자 사는 게 아니라 함께 어우러져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사춘기는 자기인생을 결정할 시기이다. 사춘기 때 나는 누구인지, 왜 사는지 묻기 시작한다. 이렇게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 가야할 때인데 딴생각하지 말고 공부하라며 이러한 생각을 못하게 한다. 그러니 이상한 인종들이 되는 것이다.

현대의 교육사상은 철학적으로 보면 서양근세부터 시작됐다. 우리가 배우고 오늘의 사회를 지배하는 사상은 근대 철학 사상이다. 베이컨, 데카르트, 칸트 등이 만든 세상이다. 그 철학을 통해 공부하고, 그것을 공부한 사람들이 사회를 만들어 움직이고 있다.

부처님은 바로 그 시기에 도대체 왜 늙고 죽어 가는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그 문제들이 개인문제가 아니라 보편적 모순의 구조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생로병사의 문제가 인류 보편적 문제이고, 삶은 무엇이고, 태어나 늙고 죽음에 대한 정확한 성찰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춘기 때 갖혀있던 자기세계에서 벗어나려는 고민이 싯달타에게 인간 보편의 문제로 다가섰다. 여기서 춘경제 때 처음 생각했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쟁하고 투쟁하며 살아야 한다. 구조 본질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해결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안죽고 영생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 요즘 불교계는 무아와 윤회가 뜨거운 주제로 돼 있다. 생사문제를 해결하면 아라한은 더 이상 새로운 존재를 만들지 않는다. 다음생이 없다고 해석한다. 그러면 중생들은 윤회하고 아라한은 윤회를 안하게 된다. 그렇게 알고 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까. 구체적 답이 안 나온다. 그래서 수행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신비주의다. 길은 보이지 않는데 수행하면 된다고 했으니 그렇게 해보자는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잘못된 길이다.

부처님은 뭘 말했는가. 연기를 바로보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가를 알게 되고, 참된 실상을 보면 윤회 생각은 일어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윤회를 논의하는 것은 불교가 아니다. 윤회에 대해 질문하면 부처님은 대답도 안했다.

지금 윤회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누고 있는데 이것은 불교가 매우 잘못된 일이다. 우리가 하는 공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윤회는 불교의 주제가 아니다. 없앤다는 의미에서 해결한다는 것이지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이 그러한 고민을 가지고 출가해 목적하신 바는 어떤 구조였을까. 우리는 생사가 개인의 문제라 생각하고, 개인적으로 수행을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부처님이 춘경제에서 본 것은 모든 생명체가 관계를 맺고 있어서 생긴 일이다. 관계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서양 근세철학에서는 인간을 개인이라고 표현한다. 개인은 다른 존재와 상관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인간이다. 각자 인간은 욕망의 주체이다. 지금 인권이라는 말을 쓰는데 핵심은 모든 인간은 자기 욕구를 추구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말이다. 이 사회는 인간들이 개인 욕구를 충족시키기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힘이다.

교육의 목적이 자아실현이고 실현해야 할 자아가 욕구이다. 그러니까 교육은 자기욕망을 실현하도록 가르치고, 교육을 받으면 자기욕심을 충족시키는 힘을 얻게 된다. 현대인들에게는 돈으로 잘벌게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취업률을 우수학교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오래전부터 서양에서 시작된 철학적 토양이 내재돼 있다. 개인주의는 자연과학인 뉴톤의 우주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만유인력의 법칙이 개인주의의 출발이다. 수만가지 존재하는 것들은 서로 끌어 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도 모든 각자 존재하면서 욕심을 통해 관계가 이루어진다. 욕망을 통해 사회가 이루어진다. 개인이 모여 사회가 되고 원자가 모여 물질이 되고, 천체가 모여 우주가 된다. 당연하다.

우리의 생각은 그렇게 생각하는 법을 배운 결과이다. 사람들이 살아오면서 400년의 역사와 사회속에서 만들어진 개인이다. 개별적 존재가 아니다. 개인들이라 생각했고 욕구를 충족시키는 사회를 꿈꾸며 만든게 자본주의다. 오늘의 인간은 살면서 배운 인간을 이해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를 해결하는 것은 개인의 수행을 통해 가능한 것도 아니고 인간 이해 없이는 불가능 한 것이다.

부처님은 어떤 구조가 있는 지를 탐구했다. 불교수행은 추상적이고 모호하다. 화두를 들고 참선하며 앉아 있으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삼매에 들어 화두가 일념이 되기도 했지만 깨달음을 주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후 나는 불교공부를 경을 통해 하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 수행이 무엇인지, 불교가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확신을 갖게 됐다. 부처님은 세상이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하는 문제에 대해 질문하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경전에 가장 많이 나오는 주제이다.

그럼 왜 부처님은 이 문제에 대해 대답하지 않았는가. 불교 해설서를 보면 물어봐야 알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라거나 형이상학적인 것은 제쳐두고 현실에서 고통을 버리고 살라고 한 것이라고 해설하고 있다. 이것은 부처님의 답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깨달아야 아는 것이기 때문에 깨닫도록 하기 위해 말을 안했다고 하기도 한다. 이처럼 자기견해를 가지고 불교라고 말하는 것이 범람하고 있다. 견해가 다르니 사람마다 이야기 다르니 얼마나 답답한가.

이 때문에 나는 이 문제를 부처님 말씀으로 이해하려 했다. 논서나 해설서를 배제하고 불경을 가지고 공부해 보니 하나를 가지고 이야기 하면 다른 경에도 이야기가 나온다. 어디서 출발하든 정당하게 물으면 부처님은 그 답을 하고 있었다.

정리해 보니 엄청난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아함의 중도체계가 그렇게 해서 써진 책이다. 왜 부처님은 대답하지 않는가. 모르면 모른다고 하든가, 궁금했다. 그런데 부처님은 열반으로 가는 길이 아니다라거나 다르마나 지혜에 상응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표현한다.

부처님은 대답했는데 이것을 설명하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으로 설명한 것이다. 그래서 그 말들이 경속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살펴보다가 부처님은 너무 명확하게 길을 제시해주고 있음을 알았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부처님은 우리들에게 수행의 길로 여실하게 깨달아 볼 수 있는 것을 수행이라 가르쳤다. 왜 대답해서는 안되는 문제인지, 왜 그런 질문을 하게 되는지에 대해 진실의 입장에서는 말이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것을 중요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불교교리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수행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올바로 보는 길을 중도라고 말했다. 우리들이 세상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사유구조를 부정하는 것이다. 사물 이해하려 할 때 나누어서 세상을 보기 시작한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나누고 선택해야 할 것처럼 생각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원천적인 사유구조가 무명이다. 여기서 나오는 말들이 희론이다. 부처님은 희론을 하지 않도록 가르치신 분이다. 희론이 뭔지 의미가 드러나지 않는다. 이야기 했듯이 부처님이 파악한 인간은 개체적이지 않으며 연기한 구조에 있다. 개인은 갈등과 투쟁의 구조이고 연기는 투쟁할 수도 갈등을 겪을 수도 없다. 어우러지니 공존할 수밖에 없다.

개체적 사물에서 내가 살려면 약한 것은 죽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사회 갈등의 원천인 개인주의이고 자본주의이다. 힘이 세야만 사니 경제정의 자체가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법을 만드는데 법을 만드는 사람이 힘있는 자들의 논리로 법을 만들고 개인은 그 법 아래 살아야 한다. 어떻게 문제가 해결되겠는가.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지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부처님은 이렇게 해결책을 찾는 게 아니다. 요즘 생태학에서는 우주생명을 개체 생명으로 보지 않는다. 이것이 시스템 이론이다. 현재의 원자론 적 시각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논리가 불교이다.

불교는 2600년 전 일어난 사상이 아니라 이시대 언제든지 번영하려면 배우고 익히고 깨달아야할 진리인 것이다. 춘경제로 돌아가서 생태학에서는 모든 생명이 하나로 연결돼 있다고 본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표현할 때 발자국이라 하고, 행동으로 삶으로 표현한다. 형상을 가진게 아니라 삶이 부처님인 것이다. 금강경에서 “부처님을 형상으로 보지말고 삶으로 본다면 부처를 제대로 볼 것이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부처님이 말한 무소유는 욕심내지 말라는 것이다. 자족하면 행복하다고 했다. 현대인들이 밥을 못먹어 갈등을 겪고 있지는 않다. 부처님이 연기한다는 것은 하나의 존재는 그 이외의 다른 것으로 인해 관계 맺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연기라는 말을 사용한 부처님의 언어를 분석해 보면 얼마나 정확하게 사용하고 분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지를 알수 있다.

연기라는 것은 혼자가 아니라 조건이 되니까 함께 나타난다는 것이다. 무엇이 있어 나오고 없어진다고 생각하는데 무엇이라 이름 붙일 것은 없다. 명사는 나타나면 말로서 지칭될 뿐이므로 서로 의지하여 함께 나타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비가 올 때 비가 내려오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늘에는 비가 없다. 구름이었다가 조건을 만나 물이 되어 떨어지고, 모여서 강이 된다. 비가 있어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나라는 존재도 비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개인 생각도 주체가 있어 나온게 아니라 환경이 선택하도록 주어진 것이다. 화를 내는 것도 내 속에 화가 있다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화날 일이 벌어져야 화를 낸다. 이처럼 인간을 개인으로 보는 것도 조건이 주어져 나타나는 것이니 망상일 뿐이다.

이 때문에 사람 만들자고 교육했는데 사람 망치는 것이 현실교육이다. 불교 교육을 다시해야 한다. 부처님은 연기를 인간의 내면적인 의식세계에서 조명한다. 연기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를 보지 못하고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부처님은 자기 의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기 것인지 잘 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네것이 아니니 무아라는 것이다.

불교 무아설에 대해 내가 없으니 막행막식해도 되겠구나 생각한다. 공을 잘못알면 이렇게 된다. 무애행을 한다며 술먹고 고기먹어도 상관없다고 하는 것은 덜된 놈이다. 부처님이 걸림이 없어 막행막식 했는가. 아니다. 이는 무아에 대해 전혀 모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이 진리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우리들의 새로운 시각 열어주는 깨달음이다. 이를 의식에 비추어 보니 무지로부터 발생한다. 무명에 연해 행이 있고, 모르고 사니까 식이 나온다. 여러분 의식세계는 무지로부터 형성된 의식이다. 무명으로 비롯된 삶은 밖에 있는 모든 것을 형태로 구분해 분별하고 있다.

형태로 구분해 분별하는 게 논리학이다. 불교는 논리학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명색도 정신과 물질로 해석한다. 우리가 왜 정신과 물질인가. 부처님은 그렇게 표현한 적이 없다. 아비달마 불교 해석에 나온다. 이렇게 불교교리 이해하고 수행하니 부처님의 가르침과 달라지는 것이다.

정확한 이해 없이는 아무것도 안된다. 의식을 살펴보면 이름 없거나 지금까지 몰랐던 것은 보이지 않는다. 모르는 것은 손에 쥐어줘도 모른다. 그것이 현실세계다. 눈으로 내가 아는 대상을 보는 것이다. 반야심경의 무 안이비설신의는 무명이 사라진 자리엔 육입의 의식구조가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무엇인가를 보고 느끼는 육입에 연하여 촉이 있다. 이 촉은 경험이다. 이게 18계이다. 12처는 식이 외부 명색을 상대해 일으킨 지각활동을 자아라고 보고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사물로 인식한다. 그렇게 의식으로 보는 것을 육입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처럼 12연기는 모든 교리의 핵심이다. 그걸 떠나서 다른 어떤 12처, 18계 법문이 덜어져 있지 않다. 깨달음의 세계 열어주는 교린데 잡다한 설명으로 이해한다. 마음의 구조가 어리석으면 작동하는게 12연기이고, 이를 변화시키는 구조가 8정도이다. 실천을 통해 변화하면 무명이 사라지고 노사가 멸하는 구조를 체득하는 게 4성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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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불교 2017/01/16 한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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