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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올린 게시글: 2015-12-22, (화) 6:43 am 

가입일: 2015-01-01, (목) 10:13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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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암 선사의 생애와 사상
이성수1* 불교신문 기자.

한글요약
본 논문은 봉선사에서 인담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용성조사의 전법제자가 된 동암당(東庵堂) 성수(性洙) 선사의 생애와 사상을 조명한 연구 결과이다.동암선사는 출가 전에는 신교육을 받고, 출가 후에는 수행에 전념했다. 용성조사를 도와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해방 후에는 정화불사에 동참했다.즉 동암선사는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해 수행하면서 대중 교화는 물론 불교정화에 앞장서고 대한불교조계종의 초석을 놓았다.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사회복지 구현에도 관심을 갖고 정진했다. 또한 오봉산 석굴암 중창불사의 뜻을 문도에 전하는 등 사회 참여와 불교발전에 기여했다.
본 논문에서는 평생 수행자 본분을 지키고 구도를 실천하며 살아온 동암선사의 업적과 행장을 구체적으로 처음 조명했다. 그동안 동암 선사의 행장을 조명할 수 있는 자료가 상당 부분 사라져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현존하는 자료를 수집 정리하지 못한 상태였다.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있었지만, 동암 선사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보고 향후 과제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본 논문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 본 논문의 1차 자료는 서울 성북구 녹야원에 있는 동암선사 비문과 조계종 총무원 자료, 그리고 원적 당시 대한불교신문과 동아일보 등 언론 보도 내용 등을 참고했다. 이와 함께 동암선사를 실제 만났던 현존 인물들의 증언과 국가기록원 등의 자료도 보충자료로 삼았다.
동암 선사는 평북 희천에서 출생해, 보통 과정의 신교육을 받았다. 평안도는 일제강점기에 항일 의식이 팽배했던 곳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독립운동이 활발한 고장이었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항일의식을 갖게 되고, 반일 항쟁에 가담했다 묘향산 보현사에 은거하게 된다.보현사에서 출가해 1921년 양주 봉선사에서 인담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다. 1922년에 서울 대각사에서 백용성(白龍城) 조사에게 동암이란 법호를 수지하고 법제자가 된다. 용성 조사를 시봉하며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약 10년간 상해, 북간도, 일본을 오가며 수행과 독립운동을 병행한다.해방이 되고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의 귀국을 환영하는 임시정부 봉영회를 구성하는 등 민족의식도 강했다.1950∼60년대에는 효봉(曉峰), 동산(東山), 청담(靑潭) 스님과 함께 불교정화운동에 적극 참여해 대한불교조계종 출범의 산파가 된다.동암 선사는 정화불사에 필요한 재정을 조달하는 일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통합종단 출범 후에는 양양 낙산사 주지, 영주 부석사 주지, 선산도리사 주지 등을 역임하며 사찰과 종단 안정에 기여한다. 사찰을 문중 소유로 하지도 않았고, 주지 소임에 연연하지 않았다.오직 수행과 전법에 몰두하고, 공심을 앞세웠다. 한국전쟁 당시 폐허가 된 오봉산 석굴암의 중창불사를 상좌 초안(超安) 스님에 당부했을 뿐이다. 말년에 선산 도리사 주지로 재직할 당시 상경해 정릉 녹야원에서 머물다 열반에 들었다.동암 선사는 신학문을 익히고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사찰에 은거한 것이 인연이 되어 출가했다. 평생 수행과 전법, 그리고 민족독립과 사회복지에 앞장선 선지식이다.
이번에 발표하는 논문이 동암 선사의 생애와 사상을 조명하는 첫 단추를 꿰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향후 동암 선사에 대한 지속적인 자료수집과 연구가 진행되길 기대한다.


Ⅰ. 글에 들어가며

동암당(東庵堂) 성수(性洙, 1904∼1969) 선사(禪師)는 신식교육을 받은 후 불법(佛法)에 귀의해 수행하면서 대중 교화는 물론 불교정화에 앞장서고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의 초석을 놓았다.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사회복지 구현에도 관심을 갖고 정진하면서 오봉산 석굴암 중창불사의 뜻을 문도에 전하는 등 사회 참여와 불교발전에 기여했다. 그러나 평생 수행자의 본분을 지키고 구도행을 실천하며 살아온 동암 선사의 업적이나 행장은 잘 드러나 있지 않다. 선사의 행장을 조명할 수 있는 자료가 상당 부분 사라졌기 때문이다.
동암 선사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보고 향후 과제를 제시하려는 본고의 1차 자료는 입적 13주기를 맞아 서울 성북구 녹야원(鹿野苑)에 건립한 비문1)과 조계종 총무원 자료, 원적 당시 <대한불교>2)와 <동아일보> 보도 내용 등을 근거로 삼았다.
1) 서울 녹야원 동암당 성수선사 비문. 지금도 녹야원에 있다.
2) 지금의 <불교신문>.

이와 함께 원로의원 도문(道文) 스님, 원로의원 인환(印幻) 스님, 원로의원 월서(月棲) 스님, 전 범어사 전계사 흥교(興敎) 스님, 미륵암 회주 백운(白雲) 스님 등의 증언도 동암 선사의 생애와 사상을 복원하는 자료가 됐다. 이밖에도 월간 불광, 국가기록원, 대각사 홈페이지 등을 참고했다.동암 선사의 이력과 공적, 사상 등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여긴 손상좌 도일(道一)3) 스님이 수년 전부터 각종 자료를 발굴 수집해 행장을 정리하기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번에 발표하는 논문 역시 석굴암 주지 도일스님이 그동안 모은 자료와 앞서 열거한 내용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3) 양주 오봉산 석굴암 주지. 은사인 초안 스님의 당부와 초안 스님의 뜻을 계승해 석굴암의 사격(寺格)을 일신하는 중창불사의 원력을 실천하고 있다

우선 동암 선사의 생애를 간략하게 소개한다. 동암 선사는 유년시절 평안북도 희천군(熙川郡)4)에서 출생해, 보통 과정의 신교육을 받았다.
4) 북한 당국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지금은 자강도에 포함되어 있다.

당시 평안도는 항일 의식이 팽배한 곳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독립운동이 활발한 고장이었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항일의식을 갖게 되고, 반일 항쟁에 가담했다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에 은거하게 된다.
보현사에서 불문(佛門)과 인연을 맺어 1921년 양주5) 봉선사(奉先寺)에서 인담(印潭)6)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다. 법명은 성수(性洙)이다.
5) 지금은 남양주.
6) 봉선사 홍월초(洪月初, 1858∼1934) 스님의 사제(師弟)로 알려졌지만, 1972년 운허스님이 봉선사에 건립한 ‘월초 스님 비문’에는 월초 스님의 상좌(上佐)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인담 스님은 월초 스님의 사제가 아닌 제자인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인 1922년에는 서울 대각사에서 백용성(白龍城, 1864∼1940) 조사에게 동암이란 법호를 수지하고 법제자가 된다. 용성 조사를 시봉하며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금강산 장안사(長安寺)에서 진허율사(震虛律師)에게 비구계를 수지한 후에는 약 10년간 상해, 북간도, 일본을 오가며 수행과 독립운동을 병행한다. 해방이 되고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의 귀국을 환영하는 임시정부 봉영회를 구성하는 등 민족의식도 강했다.1950∼60년대에는 효봉(曉峰, 1888∼1966), 동산(東山, 1890∼1965), 청담(靑潭, 1902∼1972) 스님과 함께 불교정화운동에 적극 참여해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 출범의 산파(産婆)가 된다. 효봉 스님과는 금강산에서 정진한 인연이 있고, 동산 스님은 사형(師兄)이며, 청담 스님은 도반이다.동암 선사는 정화불사에 필요한 재정을 조달하는 일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통합종단 출범 후에는 양양 낙산사 주지, 영주 부석사 주지,선산 도리사 주지 등을 역임하며 사찰과 종단 안정에 기여한다. 사찰을 문중 소유로 하지도 않았고, 주지 소임에 연연하지 않았다. 오직 수행과 전법에 몰두하고, 공심(公心)을 앞세웠다. 한국전쟁 당시 폐허가 된 오봉산 석굴암의 중창불사를 상좌 초안(超安, 1926∼1998) 스님에 당부했을 뿐이다. 말년에 선산 도리사 주지로 재직할 당시 상경해 정릉 녹야원에서 머물다 열반에 들었다.간략하게 살펴본 것처럼 동암 선사는 신학문을 익히고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사찰에 은거한 것이 인연이 되어 출가했다. 평생 수행과 전법, 그리고 민족독립과 사회복지에 앞장선 선지식이다. 이번에 발표하는 논문이 동암 선사의 생애와 사상을 조명하는 첫 단추를 꿰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향후 동암 선사에 대한 지속적인 자료수집과 연구가 진행되길 기대한다.


Ⅱ. 생애

1. 세속 인연
1904년 7월 26일 부친 밀양 박씨 박봉오(朴鳳梧) 선생과 모친 최경오(崔慶吾) 여사의 차남으로 태어난다. 속명은 승수(承洙)이다. 출가 이후 성수(性洙)라는 법명을 받았는데, 각종 기록에는 속명을 사용한 경우도 적지 않다. 고향7) 평북 희천군 장동면 원흥리8)는 산간벽지에 해당하는 곳이다. 장동면(長洞面)의 면적은 290.47㎢로 관리(館里), 원흥리(元興里),용평리(龍坪里), 생리(生里) 등 4개 마을(洞)로 구성돼 있다.동암 선사가 태어난 1904년 한반도는 격동의 회오리에 빠져 있었다.그해 2월8일 러일전쟁(露日戰爭) 전쟁이 발발했고, 그 직후에는 일제가 대한제국을 압박하여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9)를 체결하는 등 국내외로 혼란한 상황이었다.
7) 1969년 11월9일 <대한불교>에 ‘1904년 서울에서 출생’이란 기사가 있지만, 이는잘못된 내용이다.
8) 지금의 북한 자강도 희천시 원흥동.
9) 조일공수동맹으로도 불린다. 러시아와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중립을 주장하는 한국을 세력권에 넣기 위해 1904년 1월 대한제국 황궁을 점령한 뒤 같은 해 2월 23일 강제로 체결한 조약. 중립을 표방한 대한제국을 협박해 6개 조항을 체결했다.

또한 같은 해 8월 22일에는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는 등 일제가 한반도를 점령하기 위한 노골적인 행보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 같은 국내외 정세는 훗날 동암 선사가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는 자연스러운 계기가 된다.동암 선사 비문에 의하면 “어려서 총명했으며 보통과정의 신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고향에서 태어나 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운 것이다. 일제강점기 자료에 따르면 1904년 희천군에 설립된 유신학교(維新學校)가 경술국치(庚戌國恥)10)이후 공립보통학교로 개편된 기록이 전한다.
10)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로 합병한 조약을 체결하고 이를 공포한 경술년(1910년)8월 29일.

또한 1910년 희천읍에 4년제인 희천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됐다는 자료도 발견된다. 희천 지역의 공립보통학교 개설 자료가 두 가지 전하는데, 여러 상황을 종합할 때 서로 다른 학교가 아니고, 같은 공립보통학교일 가능성이 크다.보통과정11)의 신교육을 받았다는 비문 내용으로 보아 동암 선사는 희천공립보통학교에 다녔음이 확실하다.
11) 향후 희천공립초등학교 졸업생 명단 등의 자료를 추가로 확보해 확인할 필요가 있다.

벽지(僻地)에 해당하는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신교육을 받은 것은 부모님을 비롯한 집안 분위기가 상당히 개방적이었으며, 교육에 남다른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보통학교(普通學校)는 일제강점기 초등교육기관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1906년 4월 대한제국은 학부 관제를 개정하고 그해 8월에 보통학교령을 발표한다. 이에 따라 갑오개혁(甲午改革) 학제 개혁으로 설립된 5∼6년제의 소학교(小學校)는 4년제 보통학교(4년제)로 바뀐다. 보통학교의 입학 연령은 만 8∼12세이다. 따라서 1904년생인 동암 선사는 1913년에서 1916년 사이에 희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을 것이다. 봉선사에서 득도한 해가 1921년이니, 그 전에 학교를 마치려면 이 같은 추정이 나온다.동암 선사는 희천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독립운동에 참여한다. 비문에 있는 “보통과정의 신교육을 마치고는 일제와의 항쟁에 가담했다가 묘향산 보현사에 은신함이 불문을 두드린 인연이 되었다”는 내용으로 보아 4년 간 보통학교 과정은 정상적으로 졸업하고 독립운동에 연관되어 몸을 피한 것으로 보인다.일제강점기 평안북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진다. 1920년 전후 언론을 살펴보면 평북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이 상당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관련 기사의 제목과 내용을 일부 요약 소개한다.
獨立을 目的한 靑年會員
판결언도는 래이십팔일
평안북도 희천군 신풍면 서동 공립보통학교 부훈도(副訓導) 최호여(崔鎬汝)(34)와 장준모(張濬謨)(27)는 본래부터 조선독립을 열심히 희망하여 그 동리에서 대서업(代書業)을 하는 최기섭(26)과 전도사(傳道師) 류종학(劉鍾鶴)(25) 잡화상(雜貨商) 계훈(桂薰)(30) 등으로 더불어 협의한 후 조선 각 지방에 조직된 각 청년회를 모방하여 … 최호여는 자기 봉직하고 있는 학교장과 교섭하여 매월 음력 십오일마다 그 공립보통학교에 모이어서 강연과 토론회를 개최하야 표면으로 청년의 지식계발과 정신수양을 포장하고 이면으로 비밀히 조선독립을 목적하고 상해 가정부와 연락하야 독립운동을 원조할 목적으로서 조직하고 내용으로 크게 조선독립운동의 기세를 넓게 하여…12)
독립사상을 고취한 희천청년친목회원 판결 김숙훈 등 오명 각 일년
12) 1921년 5월 26일 <동아일보>

평안북도 희천군 장동면 관동에서 사는 김숙훈(32), 최윤서(18), 김양훈(27),김석철(19),과 동군 동면 어허천동에 사는 김지훈(33) 등 다섯 사람은 작년 6월에 조선독립운동을 원조하며 독립사상을 선전키 위하야 평안북도 희천군 량동면 관동에 청년친목회라하는 회를 조직하고 … 비밀히 독립사상을 선전하며 표면적으로는 지식의 계발과 회원의 친목을 표방하야 40여명의 회원을 모집하고 매주 목요일마다 회원일동이 삼락학교(三樂學校)에 회합하여 우리가 우리의 조국을 위하야 독립운동을 함은 우리 청년의 책임이니 우리는 이를 위하여 열심히 노력할 것이라는 등의 연설을 하며 또 이러한 의미의 창가를 불러서 일편으로 독립사상을 선전하며 일편으로는… 13)
13) 1921년 6월 25일 <동아일보>

熙川郡에도 三十名 동창주재소까지 습격하고 인민에게 입회금까지 징수
무장한 독립단 삼십여명은 지나간 달 24일 경에 희천군 동창면주재소를 습격하여 순사 3명은 다른 곳으로 다 피신하고 독립단들은 주재소를 점령한 후 그 부근 인민에게 대하여 독립단에 가입하기를 권고하여 입회금 2원씩을 받아가지고 그날 밤에 다른 곳으로 종적을 감추었으므로… 14)
14) 1922년 9월 14일 <동아일보>

앞에 열거한 사건들 외에도 이밖에도 ‘희천군에 독립단 다섯 명이 들어와 불을 놓고15) 고문당한 희천사건(熙川事件)의 피고인 홍찬보(洪贊甫)는 필경 사망’ 등 각종 독립운동 사건이 희천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다.평북 희천군의 독립운동은 청년 조직 결성및 강연회는 물론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무력 투쟁까지 펼치는 등 매우 적극적이었다.동암 선사가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몸을 피한 곳은 묘향산(妙香山)16) 보현사(普賢寺)17)이다.
15) 1923년 8월 22일 <동아일보>
16) 평안북도 영변군⋅희천군과 평안남도 덕천군에 걸쳐 있는 산. 높이 1909m. 묘향산맥 중앙에 솟아 있는 우리나라 5대 명산의 하나. 산세가 기묘하고 향기를 풍기는 아름다운 산이어서 묘향산이란 이름을 갖게 됐다.
17) 고려 광종 19년(968년) 창건된 사찰로, 고려 현종 19년(1028년) 탐밀(探密) 스님이 중건하고, 고려 정종8년(1042년) 굉확(宏廓) 스님이 학승(學僧)들을 243칸이나 되는 중건 불사를 통해 묘향산을 대표하는 사찰이 됐다. 1912년 112개의 말사를 거느린 31본산의 하나인 선교양종대본산묘향산보현사(禪敎兩宗大本山妙香山普賢寺)가 됐다.

묘향산은 고향인 평북 희천과 거리적으로 멀지 않지만, 산세가 험하고 일반인의 왕래가 많지 않아 은신하기에 적합한 장소이다. 당시 보현사 주지는 박보봉(朴普峰) 스님18)이었다.
18) 1871년 생으로 1887년 보운(普雲)스님을 은사로 보현사에서 출가해 참선수행과 교학연찬을 하고, 보현사 섭리(攝理)와 보현사 진상학교(眞常學校) 교장을 역임했다. 동국대 전신인 명진학교 제2회 졸업생이다. 1915년, 1917년, 1921년 세 차례 연이어 보현사 주지 소임을 맡았다.

동암 선사는 보현사 큰절에 머물기 보다는 주로 산내 암자인 상원암(上元庵)에 은신한다. 이 같은 사실은 “일본군에 쫓겨 묘향산 보현사까지 왔고, 이어 산내 암자인 상원암에 몸을 숨겼다”는 동암 선사의 회고를 통해 확인된다. 이 때 말을 타고 묘향산으로 은신했다는 이야기도 전하는데, “내가 말은 잘 탔다.”고 동암 선사는 자주 말했다고 한다.19)
19) 백운스님 회고

상원암은 예로부터 향산제일암(香山第一庵)이라 불릴 만큼 절경을 자랑하는 암자이다. 보현사에서 약 3∼4km 떨어져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이다. 동암 선사가 묘향산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 현재로서는 확인하기 어렵다. 1921년 3월15일 양주 봉선사에서 인담 노사(老師)를 은사로 득도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까지 묘향산 상원암에서 1∼3년간 머물렀을 가능성이 있다.묘향산 보현사는 역사적으로 민족의식이 투철한 도량이다. 임진왜란 당시 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승병들의 최고 지휘관인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주석한 사찰이다. 또한 상원암 근처에는 민족의 비조(鼻祖)인 단군(檀君)과 인연이 있는 단군굴(檀君窟)20)이 존재한다. 이 같은 환경 속에서 보현사 상원암에 머물며 자연스럽게 불교와 인연이 깊어지고, 일제에 항거하는 민족의식은 더욱 견고해졌다.
20) 평안북도(平安北道) 영변 묘향산에 있는 굴. 묘향산은 고래(古來)의 명산으로 단군(檀君)의 유적(遺蹟)이라 고 전(傳)해지는 대(臺)도 있음__

2. 출가와 봉선사
동암 선사는 왜 봉선사로 출가한 것일까. 보현사에 장기간 머물기 어려웠기 때문으로 보인다. 비록 보현사와 상원암이 산악지대에 있지만, 당시 묘향산은 수학여행 장소로 여행 성수기가 되면 관광객이 많고, 또한 고향과 가까운 거리여서 항구적으로 몸을 숨기기에는 어려웠다. 경기도 양주에 있는 봉선사는 평안북도 희천과는 먼 거리에 있는 사찰로 신분이 노출될 가능성이 적었다는 점도 봉선사를 택한 요인이 된 것이다. 사찰에 머물며 불교와 인연이 깊어지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출가의 뜻을 품게 된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다만 다른 지역의 대찰(大刹)이 있음에도 양주 봉선사로 출가한 것은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봉선사에서 인담 스님을 은사로 득도21)한 해가 1921년이니 나이 17살 이었다.
21) 1969년 11월 9일 <대한불교>는 득도 연도를 1919년으로 보도하고 있다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생면부지의 사찰을 혼자 판단해 찾아 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당시 봉선사에는 월초(月初, 1858∼1934) 스님이 교종판서(敎宗判書) 소임을 보고 있었다. 동암 선사는 인담 노사(老師)를 은사로 득도했다.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당시 보현사 주지 박보봉 스님이 동국대 전신인 명진학교 제2회 졸업생이란 사실이다. 그 당시 봉선사에는 동국대 설립을 주도한 홍월초 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다. 홍월초 스님과 박보봉 스님은 서로 친분이 있었고, 그 인연으로 봉선사로 출가했을 가능성도 짐작할 수 있다.

3. 구도와 용성조사
봉선사에서 출가하고 그 이듬해인 1922년 서울 대각사(大覺寺)에서 백용성 조사에게 법호(法號)를 받고 수법제자(受法弟子)가 된다. 출가한지 1년 만에 그것도 서울 중심에 있는 대각사에서 용성 조사의 법상좌가 됐다는 사실은 의미하는 바 크다. 용성 조사는 1921년 3월 서대문 감옥에서 출옥한 후 삼장역회(三藏譯會)를 만들고, 대각교(大覺敎)를 창립하는 등 왜색불교 추방과 대중불교 운동에 한참 나서고 있는 상황22)이었다.
22) 1922년에는 일제의 탄압을 피하고 만주에 간 독립군들을 돕기 위해 만주 연길 명월촌과 봉년촌에 대규모의 大覺敎堂을 설립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대각사상연구원 홈페이지>

용성 조사는 1882년, 1883년 등 세 차례나 봉선사 말사인 파주 보광사 도솔암에서 3년간 머물며 기도 정진을 했다. 동국대 교수 보광스님은 ‘용성 조사와 도솔암의 인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용성스님은 초기수행을 대부분 보광사와 도솔암에서 하게 되었다. 당시의 나이로는 19세에서 21세 사이이며, 밝혀진 것만도 3차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1차는 19세 때에 보광사․도솔암에서 대비주와 육자주를 염송하여 ‘통밑이 빠지는 것’과 같은 경지를 체험하여 1차 오도송을 읊었다. 2차는 20세 때에 보광사에서 六祖壇經을 구해보게 되었으며, 이때 본 六祖壇經은 용성스님의 대각교운동의 指南으로 삼게 되었다. 3차는 21세 때에 보광사 도솔암에서 無字話頭를 타파하여 2차 오도송을 읊게 되었다. 그러므로 용성스님과 보광사 도솔암의 인연은 참으로 소중하였으며, 이러한 수행으로 뒤에 3,1 독립운동이나 대각운동의 전개에 밑바탕이 되었다고 보여진다.23)
23) 한보광, 백용성 스님의 초기수행과 보광사⋅도솔암의 인연 , 대각사상 제12집(대각사상연구원, 2009), p.114.

동암 선사 비문에 따르면 “1925년 이후 10년간은 한때 금강산 장안사에서 진허율사에게 비구계를 수지한 것 외에는 줄곧 조국의 독립운동으로 상해, 북간도, 일본 등지에서 젊은 우국심혈(憂國心血)을 경주하셨음은 특이할 일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1969년 11월 8일 동아일보는 “20세 되던 1924년 금강산 장안사에서 은허율사로부터 구족계를 수지한 다음 일본 북만주의 각 사찰을 두루 살피면서 수행하고, 1928년 돌아온 후 안거(安居)하면서 독경과 선에만 몰두했다고 한다.”고 보도하고 있다.비문과 동아일보 보도에서 구족계사(具足戒師)가 은허율사와 진허율사로, 수계연도가 1924년과 1925년으로 엇갈리고 있는데, 비문의 내용을 우선하는 것이 타당하다. 기록을 종합하면 동암 선사는 1922년부터 1923년 또는 1924년까지 2∼3년간 대각사에서 지내며 용성 조사를 시봉한다.여기서 한 가지 유추할 수 있는 점은 독립운동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이다. 독립운동에 큰 관심을 갖고 있던 용성 조사의 인연이 참여의 계기가 됐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북간도 지역은 동암 선사의 고향과 멀지 않은 곳이어서 지리에 밝은 점도 고려됐을 것이다. 이 시기에 용성 조사는 만주(북간도)에 대규모 대각교당(大覺敎堂)을 지어 독립군을 지원하고, 자금을 보내는 등 활동을 하는데, 이 때 동암 선사가 일정 역할을 담당했다. 흥교 스님은 “용성 조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동암 스님이 심부름을 많이 했다.”면서 “돈을 숨긴 쌀가마니를 기차 편으로 만주에 보낼 때 동암 스님이 그 역할을 맡았다.”고 회고했다.동암 선사는 1930년대 후반 적음(寂音, 1900∼1961)스님이 만공(滿空,1871∼1946) 스님에게 건당(建幢)하는 의식을 촬영한 사진24)에 등장한다.
24) 2008년 2월 20일자 <불교신문>

이 사진에는 용성, 석우, 동암 스님을 비롯한 대중이 등장한다. 이 사진으로 보아 1930년대 후반에 용성 조사를 동암 선사가 시봉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동암 선사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후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1894∼1966)와 인연도 있었다. 이 역시 용성 조사와의 인연에서 시작됐다.흥교 스님은 고암, 회암25) 스님에게 전해들은 일화 가운데 “일제강점기 통행금지로 왕래가 어려울 때, 갑자기 자금을 구해오거나 전달할 일이 생기면 동암 스님이 상복(喪服)으로 변복(變服)을 하고 용성 큰스님의 심부름을 했다.”고 밝혔다.
25) 서울 대각사 주지를 오래 지낸 용성 조사 제자.

조선 제27대 순종황제의 비(妃)인 효황후는 망국(亡國)의 설움을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해 이겨냈고, 이 과정에서 특별히 가까웠던 용성 조사에게 의지했다. 하지만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와 독립운동에 참여한 용성 조사가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순정효황후와 용성 조사의 연락을 동암 선사 등이 담당했다.26)
26) 미륵사 회주 백운 스님 회고.

또한 순정효황후의 밀명을 갖고 상궁들이 용성 조사가 주석하고 있는 대각사를 찾아오면 동암 선사가 이들을 안내 했다. 이런 인연으로 동암 선사는 자연스럽게 대한제국 황실 사람들과 가까워졌고, 불교에 귀의한 상궁(尙宮)들에게도 부처님 가르침을 전했다. 이런 까닭으로 동암 선사는 ‘상궁대장’이란 별명이 갖게 됐다. 용성 조사가 열반에 들고 한국전쟁이 끝난 후 서울 성북구 정릉 사가(私家)에 머물고 있던 순정효황후는 동암 선사가 찾아오면 차담을 나누며 세상사를 이야기 하곤 했다.흥교 스님은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 온 순정효황후를 동암 선사가 뒷바라지 한 사실도 전했다. 순정효황후는 범어사 동래교당에서, 상궁들은 구포에 있는 절에서 머물며 전쟁을 피했다. 동암 선사가 피난 온 순정효황후와 상궁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쓰고 뒷바라지를 했던 것이다.독립운동 참여에 대한 부분은 향후 심도 있는 자료수집과 연구가 필요하다. 이 시기 용성 조사와 봉선사 운허, 태허 스님이 머물렀던 장소와 독립운동 활동 상황 등에 대한 비교가 과제이다.

4. 입적
동암 선사는 1969년 11월 2일(음력 9월 23일) 오후 3시 서울 성북구 녹야원에서 입적했다. 당시 선산 도리사 주지 소임을 보고 있었는데, 상경(上京)해 녹야원에 들렸다가 원적에 들었다. 당시 <동아일보>와 <대한불교>에 입적 기사가 실렸다. 영결 및 다비식과 49재에 종정 고암 스님과 총무원장 월산 스님을 비롯해 청담, 대의, 석주, 서운 스님, 교구본사 주지, 신도 등 수백 명이 참석했다.동암 선사는 녹야원에서 광철, 도안 스님 등 두 명의 제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정좌(正坐)한 채 원적27)했다.
27) 1969년 11월 16일자 <대한불교>에 입적 당시 상황이 실려 있다.

선사가 남긴 임종게는 다음과 같다.
心猿意馬志牛繁(심원의마지우번)
貫頭單成肯娑界(관두단성긍사계)
繼承古德成法身(계승고덕성법신)
如是始終歸依寶(여시시종귀의보)
한글로 번역28)하면 다음과 같다.
28) 백양사와 선운사 강주를 역임한 법광스님의 번역

원숭이와 말처럼 어지러이 마음자리(心牛) 흔들어도
하나로 꿰뚫어 사바세계에 통했노라
고덕을 계승해 법신을 성취했으니
시종 변함없이 삼보에 귀의하노라.

대한불교는 동암 선사의 다비식 기사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동암 선사의 다비식은 스님의 법체에서 오색영롱한 사리 93과가 나와 종단의 주목을 끌고 있다. 이 사리는 지난 10일 청담 스님과 총무원장 월산 스님에 의해 진신사리가 증명됐는데 작은 것은 깨알만한 수정알 같고 큰 것은 콩알 크기에 다각형(多角形)인데 색책는 유백색, 연록색, 청색, 회흑색 등을 띄고 있다. 동암스님은 15세 때 양주 봉선사에서 성인담 스님에게 득도, 건봉사 불교전문강원에서 대교과를 졸업하고, 총무원 재무부장 낙산사,법주사, 주지 등을 역임하고 선산군 도리사 주지로 재임 중 지난 2일 녹야원에서 입적한 것이다.29)
29) 1969년 11월 16일자 <대한불교>.

종정 고암 스님은 12월 19일 열린 49재 법요식에서 직접 법문을 설했다. 안타깝게도 고암 스님의 법문 내용은 전하지 않고 있다. 또한 49재 당일 종단 원로 스님들이 동암 선사의 사리탑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위원장에 고암 스님을 추대했다. 이 같은 사실은 동암선사가 갖고 있는 교단 내 위상과 영향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1971년 11월 9일 녹야원에서 열린 3주기 추모재에도 종정 고암 스님을 비롯해 청담 스님, 석주 스님 등 중진 스님들이 다수 참석했고, 집전은 운문(雲門) 스님이 담당했다. 당시 <대한불교>30)에는 “대선객(大禪客)이며 한국불교정화운동에 공헌이 많은 동암대종사 추모재”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30) 1971년 11월 21일자 <대한불교>.

영결식, 49재, 3주기 추모재를 보도한 언론에 등장하는 참석자 명단을 종합하면 고암, 청담, 청담, 대의, 석주, 서운 스님 등 당대 고승들이 동암 선사의 열반을 추도했다. 이 스님들은 당시 대한불교조계종의 중추적인 자리에 있었으며, 종단 정화불사에 나선 고승들임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동암 선사가 당시 대한불교조계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Ⅲ. 사상

1. 수행
동암 선사 비문에는 “많은 대찰의 주지를 역임하면서 도제양성(徒弟養成), 포교(布敎)를 위해 진력하셨다. 평생 불일증휘(佛日增輝)와 조국통일(祖國統一)을 염원치력(念願致力)하였으며”라고 기술하고 있다. 동암 선사가 도제를 기르고 불법을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했음을 보여준다.동암 선사는 주로 참선 수행에 진력했다. 의정부 망월사, 금강산 마하연, 범어사, 직지사 등 제방선원에서 수행31)했다.
31) <대한불교>는 1969년 11월 9일 3면에서 동암 선사가 “망월사, 금강산 마하연,범어사, 직지사 등 제방선원에서 선(禪)을 정수(精修)하고”라고 보도하고 있다.

문도들이 녹야원에 비를 세우면서 동암선사(東庵禪師)라며 선사(禪師)라고 칭한 것은 스님이 평소 참선을 수행의 중심으로 삼았음을 보여준다.입적 후 동아일보와 불교신문 등 언론도 선사(禪師)라 호칭하고 있는데,이 역시 선수행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입적 당시 동아일보는 동암 선사가 독경과 선(禪)으로 수행했다고 보도하고 있다.동암 선사는 후학들에게도 “참선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강조했고,당대 선지식인 전강(田岡) 스님과도 교류가 많았다.32)
32) 백운 스님 회고.

1979년 월간 불광 11월호33)에는 “그해 여름에 미륵선원에는 이백우
(李白牛) 이운봉(李雲峰) 이효봉(李曉峰) 현패룡34) 박승수(朴承洙) 그리고 나 조성관. 이래서 5인이 결제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33) 조용명 스님이 쓴 글.

여기서 그해는 정묘년(丁卯年)으로 일제강점기인 1927년이다. 박승수는 동암 선사의 속명으로, 1925년(또는 1924년)에 장안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한 후 금강산에 머물며 수도 정진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미륵선원(彌勒禪院)35)은 금강산 신계사 옆에 있는 선원으로, 동암 선사가 당대의 선객(禪客)들과 함께 참선 수행을 했던 것이다. 당시 금강산에는 효봉 스님 34) 현의룡(玄懿龍) 스님의 오타로 보인다. 자세한 행장이 전하지 않는다. 1922년 5월 각황사에서 열린 조선불교 30본산 주지총회에서 감사로 선임된 기록과, 1928년.1929년 조선불교승려대회 명단에 나와 있다. 현의룡 스님은 성암석구(性庵錫九, 1889∼1950) 스님의 은사로, 이성수(李性洙) 스님의 노스님이다.
35) 미륵암이 있어 미륵선원이라 했다.

은사인 석두(石頭)스님이 머물며 수좌들을 지도하고 있었고, “대개 세 시간씩 정진했다.”고 한다. 1969년 11월 8일 <동아일보>는 “1928년 돌아온 후 안거(安居)하면서 독경과 선에만 몰두했다고 한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는 동암 선사가 참선 수행을 중요하게 여겼음을 증명하는 대목이다.이 36)기간에 금강산을 거점으로 상해, 북간도, 일본 등지를 오가며 독립운동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36) 1969년 11월 8일자

동암 선사의 글 가운데 전하는 것이 없다. 다만 1968년 3월 24일 <대한불교> 2면에 실린 '금주의 설법'을 통해 선사의 수행관을 짐작할 뿐이다. <대한불교> 연재물인 ‘금주의 설법’은 필자의 사진을 함께 게재돼 있어, 동암 선사의 글임이 증명된다.
‘청천백운만리통(靑天白雲萬里通)’이란 이 글에서 동암 선사는 “불교는 학문에만 그치는 문자승이 되거나 단순한 신앙으로만 그치는 종교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불교는 오직 수행의 종교이다. 자작자수(自作自修)에 대한 자기 인과의 길과 선리(禪理)를 닦아 자기를 창조하는 종교다.”라고 강조했다. 참선 수행을 통해 자기를 창조하는 종교, 즉 불성(佛性)을 깨달아야 한다는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동암 선사는 30년 전, 즉 1930년대 후반에 오대산에서 방한암 스님을 만나 법담(法談)을 나눈 일화를 소개한다.이 두 가지 사례를 종합하면 동암 선사가 당대의 선지식과 교류하며 참선 수행을 중시했음을 시사한다.동암 선사의 필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선사의 수행관을 확인할 수 있는 ‘금주의 설법’ 전문은 다음과 같다.
今週의 說法 /靑天白雲萬里通 - 東庵
불교는 학문에만 그치는 문자승이 되거나 단순한 신앙으로만 그치는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오직 수행의 종교다. 자작자수(自作自受)에 대한 자기 인과의 길과 선리(禪理)를 닦아 자기를 창조하는 종교다. 이와 같이 자신의 진리를 믿고 수행하여 스스로 성불(成佛)의 목적을 이루는 종교인 것이다.부처님은 이와 같이 인간 자신에 대한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우리 중생은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자기진리를 믿고 바로 닦아 가는 것, 이것이 불교다.경(經冊)에만 집착한 스님이 그의 상좌에게 한 방망이를 얻어 맞은 도담이 있다. 고령신찬(古靈神贊) 선사와 백장(百丈) 선사 사이에 있는 수증법어(修證法語)를 보면 상좌가 자기 스님 머리를 삭발하다가 자기 스님 등을 톡톡 치면서 “법당은 좋은 법당이나 불무영험(佛無靈驗)이로군”하였다. 살찐 스님의 등이 기름이 흐르고 좋지만 영험이 없다고 하니 노장스님이 노해 뒤를 홱 돌아보면서 “이놈 무엇이 어째”하고 상좌를 꾸짖으니 상좌가 대꾸하기를 “이것 보아 부처가 방광(放光)하네.”하고 스님에게 대꾸를 하였다. 그래서 스님은 언제든지 기회만 엿보고 있던 차 하루는 벌(蜂)이 방에 날아 들어와 밖으로 나가려고 앵앵대고 방안을 날아다니면서 창문을 자꾸 치는 것이었다. 이때 상좌가 방안에 든 벌을 보고 “世界如是廣闊(세계여시광활)한대 何以出頭不知耶(하이출두부지야), 空門不肯出(공문불긍출)하야 投窓也大癡(투창야대치) 百年攢古紙(백년찬고지)한들, 何日(하일)에 出頭時(출두시)할가부냐.37)”고 하였다.
37) “열어 놓은 창으로 나가지 않고, 창에 머리를 부딪치니 어리석다, 평생 백년 묵은 창호지를 뚫은 들, 어느 때 밖으로 나가리오.”<신찬선사(神贊禪師) 게송(偈頌)>

즉 “세계가 이와 같이 넓은 창 어찌 나갈 줄을 모르고 창문만 두들기는지 크게 어리석다는 뜻이다. 백년을 두고 옛 문만 본들 언제 나갈 때가 있겠느냐.”고 하였다. 이때 스님이 생각하기를 자기 상좌가 비범한 줄 알고 상좌더러 “야 알거든 좀 가르쳐다오.” 하였다. 상좌가 답하기를 “영광(靈光)이 독약(獨曜)하여 형탈근진(逈脫根塵)하고 체로(體露)가 진상(眞相)하니 불구문자(不拘文字)로다.” 즉 “자기자성(自己自性) 자리는 진성(眞性)으로 물들지 않고 본래원성(本來圓成)에 있어 업에 얽힌 망념(妄念)만 여이면 곧 부처와 같으니라.” 이 몸이 올 때는 어떤 물건이며, 갈 때는 또한 어떠한 물건인가 자기 진성이 주(住)해 있는 곳을 알고자 할진대는 “청천백운만리통(靑天白雲萬里通)이로다.” 정(淨)이 극(極)하면 광(光)을 통달하여 적조한 허공을 한입에 마셔 버렸느니라. 문득 세간을 보니 몽중(夢中)의 일과 같고나.”하고 상좌가 말하였다.
이 말은 곧 문자에 집착하지 말고 의심을 가지고 참선 공부를 하여 자기본래의 진성을 스스로 깨달으라는 말이다. 나는(東庵) 과거 30년 전 강원도 오대산 방한암(方漢岩) 큰스님을 친견한 일이 있었다. 그때 그 스님이 하는 말이 “참선을 해서 견성을 해야지 그밖에 다른 일은 필경 쓸데없다고 하면서 자취를 감추는 천년 학(鶴)이 될지언정 저 길가 버드나무 가지에 올라 앉아 우는 꾀꼬리는 되지 말라.”고 하였다. “앵무새는 능히 말은 하지만 나는 새는 면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 말은 곧 법(法)을 일러주는 말이었다. 참선은 세간을 버리고 하는 공부가 아니다. 혹자는 심산궁곡(深山窮谷)에 들어가 솔잎이나 씹어 먹고 독선기심(獨善己心)으로 세상을 피해서 참선하는 것을 강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상구보리(上求菩提)하고 하화중생(下化衆生)하는 산불교가 아니다. 세상 속에서 그대로 선을 찾아야 세간에 이익을 주는 선이 되고 오늘날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종교인의 사명을 다할 수 있는 것이 불교다.
불교는 현실을 부정하고 내세에 타율적인 구원을 받는 종교가 아니다. 인간 자신이 곧 최고절성(最高絶性)을 가진 우주의 진리로서 현실과 내세의 자기 앞길을 스스로 닦아 자기를 창조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종교다.
중생을 제도한다는 말은 세간을 여이고 별천지(別天地)에서 어떤 위대한 힘을 가지고 제도한다는 것이 아니다. 또 위대한 힘을 가졌다 해서 각자의 업(業)을 현실적으로 제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위대한 불심(佛心)이 대중의 생활 속에서 서로 접촉하는 가운데 고해중생에게 약(藥)이 되어 스스로 제도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 동암 선사는 “이와 같이 자신의 진리를 믿고 수행하여 스스로 성불(成佛)의 목적을 이루는 종교인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한암(漢岩, 1876∼1951) 스님을 오대산에서 스님을 친견하고, 법담(法談)을 나눈 일화를 소개하며 참선 수행에 대한 견지(見地)를 밝힌다.
동암 선사는 “과거 30년 전 강원도 오대산에서 방한암 큰스님을 친견한 일이 있었다. 그 때 스님이 하는 말이 ‘참선을 해서 견성을 해야지 그 밖에 다른 일은 필경 쓸데없다고 하면서 자취를 감추는 천년 학(鶴)이 될지언정 저 길가 버드나무 가지에 올라 앉아 우는 꾀꼬리는 되지 말라’고 하였다. ‘앵무새는 능히 말은 하지만 나는 새는 면하지 못한다’고 하였다.”고 밝혔다.
이에 동암 선사는 당신의 견해도 밝혔다. “이 말은 곧 법(法)을 일러주는 말이었다. 참선은 세간을 버리고 하는 공부가 아니다. 혹자는 심산궁곡(深山窮谷)에 들어가 솔잎이나 씹어 먹고 독선기심(獨善己心)으로 세상을 피해서 참선하는 것을 강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상구보리(上求菩提)하고 하화중생(下化衆生)하는 산불교가 아니다. 세상 속에서 그대로 선을 찾아야 세간에 이익을 주는 선이 되고, 오늘날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종교인의 사명을 다할 수 있는 것이 불교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동암 선사는 참선수행의 궁극적인 뜻이 ‘세상에 이익을 주는데 있다.’면서 불교는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종교인의 사명을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동암 선사의 입장은 불교가 개인적인 원력을 성취하고, 복을 비는 기복(祈福)에서 벗어나 현실에 구체적인 메시지를 주고 실천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현실 참여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이 같은 동암 선사의 의지는 독립운동 참여, 사회복지 실천, 불교정화 운동 참여로 구체화 된다.
동암 선사의 수행관을 확인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밀운 스님이 포천 동화사에 주석하며 군복무를 하던 젊은 시절의 이야기다. 어느 날 밀운 스님 은사인 대오 스님과 함께 동암 스님이 면회를 갔다. 동화사 법당을 다녀오면서 동암 스님이 이렇게 말한다. “부처님이 시원찮아.” 동암 스님의 말에 밀운 스님은 “부처 중에도 시원찮은 부처가 따로 있나.”라는 의문이 생긴다. 보름 동안 의문을 붙잡고 정진해 얻은 한 생각이 ‘불행불(佛行佛)’이다. 부처행을 하면 모두가 부처님이라는 뜻이다. 견성한 상태 그대로가 부처일 뿐 부처도 중생심이 들면 도로 중생이라고 생각했다. 밀운 스님은 얼마 뒤 서울 녹야원에 머물고 있는 동암 스님을 찾아갔다. 이야기를 꺼내니 동암 스님이 미소를 지으며 “동화사 불상 조성이 시원치 않다고 한 말을 잘못 들었다.”면서 “불행불이란 답을 얻어낸 진전은 대단한 것”이라고 칭찬했다.
원로의원 도문 스님은 “(동암) 큰스님께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을 특히 강조하셨다.”고 회고했다.흥교 스님은 동암 스님의 가르침에 대해 “늘 말씀하시기를 청규(淸規)를 잘 지켜야 한다고 했다.”면서 “청풍당(淸風堂)에 계실 때 후학들을 탁마(琢磨)했다.”고 말했다.동암 선사는 율사(律師)의 위상도 갖고 있었다. 1967년 3월 31일부터 4월 4일까지 5일간 서울 조계사에서 봉행된 보살계산림(菩薩戒山林)의 칠증사(七證師)로 위촉됐다. 1966년 8월 종정으로 취임한 고암스님이 처음으로 상경(上京)해 설한 첫 번째 보살계산림으로 정화 이후 최대 규모였다. 당시 칠증사는 종정 고암(古岩) 스님을 비롯해 석주(昔珠), 동암(東庵), 자운(慈雲), 석암(石巖), 대의(大義), 지월(指月) 스님이다. 정화운동 이후 처음 종정 스님이 상경해 직접 참석한 가운데 열린 보살계산림의 칠증사로 위촉된 사실은 동암 선사가 선객(禪客)일뿐 아니라, 율사(律師)의 위상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2. 포교
동암 선사는 포교에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녹야원 어린이법회이다. 대한불교 1978년 7월 15일자 3면에 실린 ‘모범불교어린이회 탐방’ 기사를 통해 동암 선사의 어린이포교 원력을 확인할 수 있다.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녹야원 녹야어린이회는 1955년 6월15일 창립되었다. 창립 23주년을 맞이한 불교어린이회는 우리나라에서 <녹야>가 처음, 매주 일요일마다 녹야원에서 법회를 보고 있다. 대덕(大德) 백용성(白龍城) 스님의 상좌로 입적시 사리 132과가 나온 고(故) 박동암(朴東庵) 선사가 녹야원을 창건하고, “어린이 및 청소년 교화 운동의 요람이 되어라.”는 선사(禪師)의 교시(敎示)에 따라 현재 미국 샌프란시스코 관음사 주지 김도안(金道安)스님이 동(同) 어린이회를 창립하여 그동안 녹야원의 스님들과 교사들의 열성어린 보살핌으로 1천여 명의 어린이 불자(佛子)를 배출하기도 했다.
동암 선사는 여러 편의 저작(著作)을 남겼다. 비문에 따르면 제목을 확인할 수 저술은 <윤회전생>⋅<극락과 지옥>⋅<아미타경> 등 3편이다.
<윤회전생>, <극락과 지옥>은 직접 쓴 저술이며, <아미타경>은 경전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동암 선사의 저작은 전하지 않고 있다.흥교 스님은 “<지옥과 극락>의 내용은 A4 용지 20장 정도 분량, 등사(謄寫)로 한글로 되어 있었다.”고 회고했다. 1962년∼63년 사이에 범어사 창고에서 <극락과 지옥>을 보았는데, 표지에 ‘동암’이라고 쓰여 있다고 밝혔다. 책의 내용에 대해 흥교 스님은 “요즘으로 치면 생활 법문 같은 것으로, 재미있게 읽었다.”고 밝혔다. 당시 범어사 창고에는 <극락과 지옥>이 여러 권 있었다고 한다.또 흥교 스님은 <극락과 지옥>이 이광수의 <꿈>38)과 비슷한 주제를 담았고, 경전에서 관련된 내용을 추려 넣었다고 회고한다.
38) 1925년 삼국유사의 ‘조신설화’를 소설화 작품이다.

3. 독립운동
흥교 스님은 “용성스님이 독립운동을 할 때 돈 관리는 동암 스님이 했다고 들었다.”면서 “8명의 상궁이 월급을 모두 용성스님에게 드렸는데, 그 심부름을 동암 스님이 했다.”고 밝혔다. 그 재원으로 만주에 땅도 사고, 독립운동 자금도 마련했다는 것이다. 흥교 스님은 동암 스님이 백용성 스님의 밀명을 받아 만주를 왕래하며 독립자금을 전달했던 일화도 소개했다. “쌀을 만주에 부치는데, 그 안에 돈을 숨겨 보냈고, 그 일을 동암 스님이 담당했다.”는 것이다. 또 동암 스님이 용성 스님을 모시고 대각사에 있을 때, 거지가 와서 타령을 하면 조그만 소반상을 차려주었고, 깡통밑에 돈을 숨긴 후 밥을 덮어주었다는 것이다.일제강점기에는 통행금지가 있었다. 이때 급한 일이 생겨 독립자금을 전달할 때 동암 스님이 용성 조사의 명에 따라 움직였다. 이때는 승복대신 상복(喪服)으로 갈아입고 다녔다는 것이다. 흥교 스님은 “용성 큰스님의 화과원이나 만주에서의 활동에 동암 스님이 심부름을 많이 했다.”면서 “재정 관리를 맡길 만큼 신임이 두터웠다.”고 했다. 흥교 스님은 “종정을 지낸 고암 스님과 대각사 주지를 오래한 혜암 스님 등 여러 어른 스님들에게 그 같은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해방 후 백범 김구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할 때 동암 스님은 국내 인사들과 함께 봉영회39) 결성해 회장을 맡았다.
39) <동아일보> 1945년 12월 2일 1면. 해독이 어려운 글자는 ○으로 표시했다

상해에서 귀국한 백범 김구 선생이 대각사를 방문해 용성 조사의 지원에 감사 인사를 전했다.다음은 <동아일보>에 게재된 임시정부봉영문(臨時政府奉迎文) 전문이다.
○○하기를 비할데 업스며 폭○하기 짝이 업는 왜구의 ○○하에 신음하는 조국을 해방시키기 위하야 춘풍추우 30성상을 만리이역에서 남전북이하며 온갖 고초와 가진곤○을 조곰도 개의치 안코 혈전간○하야 마침내 초지의 위업을 달성하고 개선하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봉영함에 당하야 우리는 최고의 경의를 표하나이다. 8월15일 해방의 기뿐 소식을 듯게 되자 우리 3천만 동포는 모다 광희○를 금치 못하게 되는 ○편 일○○ 이 ○○하야 일반 대중은 목자 업는 양의 떼처럼 의지할 바를 모르고 헤매이어서 우리 정부의 환도만 고대하든 중 뜻밖에 우리 최고지도자의 한분이신 이승만 박사의 음성을 ○○되자 우리는 마치 이리떼 속에 들었던 어린 양이 목자의 소리를 듣는 것처럼 기쁨에 넘치어 눈물을 금치 못하며 아울러 한팔의 힘을 엇게 되었으나 한편으로 중경에 ○류하는 우리 정부가 한시라도 빨리 돌아 오시기를 ○○ 더 손꼽아 기다리며 아침 저녁으로 서천만 바라보던 우리로서 오늘날 우리 임시정부의 환도와 김구 주석 이하 각원 제위의 온용을 봉배하게 되매 그 형용할 수 없는 기쁨 측량키 어려운 ○○이야말로 3천만 동포가 다같이 느끼는 눈물겨운 바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앞에는 아직 건국의 큰 사업이 있으니 어서 우리 조국의 완전한 독립국가를 하루라도 빨리 실현하도록 더 맹진로력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끝으로 우리는 우리 임시정부의 모든 명령과 지도에 ○○복종할 것을 굳게 맹서하나이다.
단기 4278년 12월 1일 / 임시정부봉영회 일동

4. 정화운동
동암 선사는 불교정화운동에 깊이 참여한다. 이는 사형사제인 동산(東山)스님을 비롯해 효봉, 고암, 청담 스님 등과 각별한 인연도 참여 동기로 작용했다. 또한 은사 용성 조사의 뜻도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정화불교 운동 당시 동암 선사는 주로 재원을 마련하는 일에 전념했다.통합종단 출범 이전 정화운동 당시 총무원 재무부장을 지낸 것도 이 때문이다.
동암 선사는 1954년 전국비구승대회는 물론 1960년 5월 20일부터 3일간 열린 제16회 임시중앙종회에서 30명으로 구성한 종단 비상대책위원회에 참여한다. 정화운동의 핵심 인사인 것이다. 1960년 비대위는 불교종단 정화운동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일제 식민지 정책하에서 교주 석가모니께서 교시하신 종단제도를 유린함으로써 종단 질서가 파괴되고 따라서 부패와 타락의 극(極)에 달하여 종교로서의 존재 가치조차 인정할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함을 보고 불자적(佛子的)양심과 민족적 의분에서 더 이상 참지 못하여 결연(決然)이 총궐기 …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은 효봉(曉峰) 스님, 부위원장은 금오(金烏), 원허(圓虛), 청담(靑潭) 스님이 맡았다. 비상대책위원회는 산하에 총무부, 재무부, 선전부 등 중앙기구와 지방부에서 관할하는 도별(道別) 기구를 구성한다. 이때 동암 선사는 재무부 소속이 된다. 당시 재무부장은 석주(昔珠) 스님, 차장은 혜진(慧眞) 스님, 위원은 법향(法香), 동암(東庵), 행원(行願) 스님이었다. 정화불사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는 실무를 맡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정화불사에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한 동암 선사의 활동을 흥교 스님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흥교 스님은 “정화운동 과정에서 동암 스님이 화주를 많이 했다. 형편이 어려워 간장이나 된장도 얻어먹을 때였는데, 동암 스님이 여러 경로로 재원을 만들어 왔다.”고 밝혔다. 이어 흥교 스님은 “동암 스님은 조선 왕실과 관련된 이들과 교분이 깊어, 그들을 통해 자금을 마련했다.”면서 “노스님이 상궁이나 대감집 등을 다녀 경비를 구해왔다.”고 말했다.흥교 스님의 회고가 이어진다.
“정화운동 당시 스님들이 주로 선학원(禪學院)에 기거하며 생활했는데, 재정 형편이 어려워 고초를 많이 겪었다. 그런데 상궁집이나 대감집에 화주를 하려면 얼굴도 잘 생기고 키가 크고, 말씀도 잘했던 동암 스님이 다녔다. 그렇게 정화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했다.”
이에 앞서 1960년 2월 13일 중앙총무원과 전국신도회가 서울 조계사에서 개최한 전국신도지도요원강습회(全國信徒指導要員講習會)가 열린다. 6일간 진행된 강습회는 사찰정화와 포교 사업에 주체적으로 나설 스님과 신도들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수료생 명단의 첫 부분에 동암 선사가 나온다. ‘서울 대각사 박동암 비구’라 표기되어 있다. 대한불교는 “한주일 동안 계속 강의가 있었는데 열심히 수강한 자에게는 원장 스님 명의로 발행된 수료증을 다음과 같이 수여하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즉 동암 선사가 지도요원강습회에 꾸준히 참석했던 것이다.
정화운동에 적극 참여한 인연으로 1962년 통합종단 출범 직후 첫 중앙 종회의원이 된다. 이때 동암 선사는 총무, 교화, 심사, 법규, 재정 등 중앙종회의 5개 상임분과 가운데 법규분과위원회(法規分科委員會)에 배정된다. 당시 법규위원장은 관응(觀應) 스님, 위원은 행원(行願),40) 정영(靜影), 법룡(法龍) 스님이다. 하지만 공직에 관심이 없었던 동암 선사는 더 이상 중앙 요직을 맡지 않는다.
40) 숭산 스님

정화불사의 방법론에 있어 동암 선사는 물리적 충돌이나 갈등 보다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 추진하는 온건한 입장이었다. 그래서 정화운동 당시와 통합종단 출범 이후에 갈등이나 분규가 발생한 사찰의 주지를 맡아 이를 정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는 상황이 종료되면 미련 없이 자리를 비우고 떠났다. 조계종 총무원 자료를 참고하면 동암 선사는 양양 낙산사(1962년 10월 14일∼1967년 2월 18일), 영주 부석사(1967년 9월 14일∼1978년 12월 2일), 선산 도리사(1968년 12월 30일∼1970년 4월 15일41))의 주지로 재임한다.
41) 1969년 12월2일 동암 선사가 입적했지만, 후임 인사가 이뤄질 때까지 명의상 주지로 등재되어 있는 것이다.

비문이나 기타 자료에 보은 법주사, 김천 직지사, 서울 봉은사, 밀양 표충사 주지를 재임한 기록이 나타나지만 현재까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5. 사회복지
동암 선사는 1962년 10월 14일부터 1967년 2월 18일까지 양양 낙산사 주지를 맡는다. 당시 통합종단 출범 첫해에 낙산사 주지로 임명 받은 것이다. 당시 낙산사는 정화에 불응하는 상황에서 다툼이 발생했고, 동암 선사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주지 재임 시절 동암 선사는 낙산보육원을 운영한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갈 곳 없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위해 낙산 보육원을 운영한 것이다. 1954년 5월 29일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미8군 부사령관 크라크 중장이 그해 5월 25일 낙산보육원을 방문해 50여명의 원아(院兒)들에게 선물을 주었다고 한다. 낙산보육원은 한국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보호하던 시설이며, 훗날 낙산사에서 이를 운영한 것으로 보인다. 원로의원 도문스님이 1960년대 낙산보육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1963년 11월 18일 <경향신문>에는 대구 동화사 부도암 스님과 신도 등 30명이 낙산보육원 운영에 쓰도록 2000원42)을 낙산사에 기탁하기도 했다. 이 시기는 동암 선사가 낙산사 주지로 재임하던 때였다.
42) 당시 금액

낙산사 주지 시절 자료를 찾던 중 1967년 윤보선 전 대통령43)이 낙산사를 방문해 동암 선사와 환담을 나누고 사찰을 돌아보는 사진을 확인했다. 1967년은 제7대 국회의원 총선거44)와 제6대 대통령 선거45)가 실시된 해로, 윤보선 대통령은 선거 운동의 일환으로 강원도를 방문했다. 그해 5월 30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낙산사 방문 기록으로 보아 대통령 후보자격으로 찾았을 가능성이 있다.
43) 당시 야당인 신한당 총재 / 44) 1967년 6월 8일 / 45) 1967년 5월 3일

6. 석굴암 중창
오봉산 석굴암은 동암 선사의 상좌인 초안 스님이 원력을 세우고 중창을 추진한 사찰이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부터 1943년까지 주지로 주석한 신계월(申桂月) 스님은 동암 선사의 도반이다. 당시 보문사 주지인 동암 선사와 계월 스님은 석굴암에서 3년간 안거하며 참선 정진했다.1946년 발행된 <불교신보>(佛敎新報) 4⋅5호의 ‘해방 1주년 기념’ 광고에는 강화 보문사 주지에 ‘박성수’라고 되어 있다. 박성수는 동암 선사의 속명이다. 이 광고에는 당시 경기교무원장 겸 광동중학교장으로 이학수(李學洙)를 비롯해 경기교무원 소임자와 소림사, 용주사, 진관사, 불암사,청룡사, 자재암, 강화 보문사, 화계사, 묘적사 등 사찰과 스님, 그리고 천축부인회(天竺婦人會), 조계사문화부인회(曹溪寺文化婦人會) 등이 참여했다. 여기서 광동중학교장 이학수는 운허 스님이다. 평소 운허 스님과 경기종무원, 봉선사 등과 인연 있는 사찰과 스님, 신도들이 해방 1주년 축하광고에 동참한 것이다.이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동암 선사가 출가본사인 봉선사와 교류를 계속해왔다는 사실이다. 석굴암은 일제강점기에도 봉선사 말사였으며, 동암 선사가 봉선사 문도들과 지속적으로 인연을 이어왔음이 확인된다.

Ⅳ. 글을 마무리하며
보통학교 신교육을 받고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묘향산 보현사에 은거한 것이 인연이 되어 봉선사로 출가한 동암 선사는 용성 조사의 법상좌가 되어 평생 출가수행자의 길을 걷는다.주로 참선 수행을 하면서 율사(律師)로도 존경받은 동암 선사는 정화운동에 적극 참여해 대한불교조계종 출범의 초석을 놓았다. 동암 선사는 출가 이전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용성 조사의 제자가 되어서도 조국독립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는 등 불교계는 물론 국가적으로도 크게 공헌했다. 동암 선사의 출가본사인 봉선사는 교학(敎學) 연찬과 역경(譯經)은 운허 스님에게, 참선 수행은 동암 스님에게 뿌리를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동암 선사의 생애와 사상이 불교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동암 선사를 최초로 조명하는 이 글을 계기로 동암 선사에 대한 자료를 지속적으로 발굴하여 생애와 사상을 온전하게 조명해야 할 것이다. 특히 수행자로서의 생애를 확립하는 한편, 객관성을 지닌 독립운동 자료를 지속적으로 발굴해 나가야 한다. 중장기적으로는 국가에서 독립유공자로 포상받는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봉선사로 출가한 봉선문도이면서, 용성 조사와 인연 깊은 동암 선사는 한국불교의 지향점을 제시한 전법 수행자이며, 민족과 조국의 미래를 개척한 선구자였다. 손상좌인 도일 스님이 중심이 된 동암 선사의 선양 사업이 꾸준하게 추진되길 바란다.

참고문헌
<동아일보> 1921.5.26. 1921.6.25. 1922.9.14. 1923.8.22. 1945.12.2
<대한불교> 1968.3.24. 1969.11.16. 1971.11.21. 1978.7.15.
<불교신문> 2008.2.20
<불교신보> 1946년 4호, 5호. 
불광 1979년 11월호./ 한태식(보광), 백용성 스님의 초기 수행과 보광사, 도솔암의 인연 대각사상 제12집, 대각사상연구원,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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