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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사 창건 시점에 관한 제문제 2
한 보 광 *동국대 선학과 교수

Ⅵ. 대각사 창건설

1. 1911년 창건설의 문제점
용성스님의 대각운동의 본거지였던 대각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었다. 필자도 용성스님의 年譜를 정리하면서 1911년 4월 8일 봉익동에 대각사를 건립한 것으로 규정하여 왔다. 그러나 최근에 여러 논문에서 이를 정정한 바가 있다.24)
24) 拙論, 「龍城스님의 중반기의 생애」 大覺思想 第2輯(대각사상연구원,1999) p.32

1911년 4월 8일 설의 발단은 大覺敎中央本部現物財産目錄(필사본)에서 시작되었다. 이에 의하면,大覺敎中央本部現存物目錄(필사본)(필자 복사본 소장)大覺應世二千九百五十八年(1931)辛未四月, 朝鮮佛敎禪宗叢林 재산목록작성은 1931년 4월 大覺敎中央本部 1940년, 1944년 11월, 大本山梵魚寺京城布敎堂大覺禪院 1962년 8월 5일 조사기록이 있으나 본문의 연혁은 언제 기록했는지 알 수 없음. 단 문맥상으로 보아서 1962년 기록으로 추정할 수 있음.

大覺寺現況
一, 沿革
檀紀四二四四(辛亥) 四月八日에 己未獨立宣言民族代表三十三人의 一人이였던 故白龍城先生이 佛敎布敎를 目的으로 創設하야 爾來四十餘年間佛敎의 大衆化, 民族精神의 涵養, 著述, 譯經等事業으로 不斷의 努力으로 貢獻하시다가 檀紀四二七三年(庚辰年)二月二十四日에 先生이 七十七歲高齡으로 入寂(別世와 같음)하셨음으로 高足弟子表壽福氏가 先生의 遺業을 繼承하야 大覺寺住持로 就任現在에 至하다.라고 한다.25)
25) 大覺敎中央本部現存物目錄 (필사본)(필자 복사본 소장)大覺應世二千九百五十八年(1931) 辛未四月

이 자료에 의하면 대각사의 건립은 단기 4244년 辛亥年 4월 8일에 백용성스님이 불교포교를 목적으로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해는 서기로 1911년 용성스님의 연세가 48세에 해당하는 해이다. 그러므로 이 자료에 의하면 대각사의 건립은 1911년 4월 8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이 자료를 근거로 大覺寺설립을 1911년 4월 8일로 보았다. 이 점은 필자가 처음으로 정리하였다.26)
26) 拙著, 龍城禪師硏究 (甘露堂, 1981) p.186

그런 후 지금까지 특별한 수정 없이 연보나 연대 정리 및 생애를 언급할 때는 이를 定說처럼 생각하고 인용하였다. 그러나 大覺思想 第2輯의 용성스님의 중반기의 생애」에 대한 논문을 쓰면서 다시 심사숙고하여 여러 가지 자료를 재검토한 결과 물리적으로 볼 때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이유로는 1911년 2월에 상경한 용성스님이 姜氏불자의 집에서 포교를 시작하다가 康永勻家에서 본격적으로 참선포교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적어도 1911년 후반기가 될 것이다. 한편으로는 康永勻家가 봉익동 1번지인 대각사가 아니었을까 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당시 용성스님의 행적에 나타난 주소는 1912년에 설립한 조선임제종중앙포교당의 개교사장으로 있었던 中部寺洞 28統 6戶나27)
27) 白龍城著, 佛門入敎問答 (朝鮮禪宗中央布敎堂, 1913. 10. 27)

혹은 京城府嘉會洞 211번지28)로 되어있다.
28) 白龍城著, 歸源正宗 (中央布敎堂, 1913. 6. 10)

따라서 적어도 용성스님이 1913년까지는 봉익동 1번지에 주석하지 않았음이 분명한 것 같다.그러면 왜 재물조사 목록의 대각사 현황에는 이와 같은 기록이 남겨져 있을까? 이 점에 대해 위의 자료의 신뢰성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 자료의 첫 기록은 1931년 4월에 조사하였고, 다음으로는 1940년과 1944년 및 1962년 8월 15일에 조사한 흔적이 보인다. 즉 대각사에 변동이 있을 때 인수인계를 위해서 조사한 내용들이다. 그런데 대각사의 현황은 문장상으로 보아서 적어도 해방 이후 통합종단이 만들어지고 나서 최종적으로 정리된 것 같다. 왜냐하면 표수복(회암)스님이 주지로 취임하면서 작성한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1962년의 기록이 아닐까라고 추정한다. 그러므로 자료로서의 신빙성에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다.따라서 1911년 4월 8일 대각사 창건설은 1962년경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大覺敎中央本部現物財産目錄(필사본)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된다. 이 자료는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자료로서의 가치에서 부정확하며, 시기적으로 맞지 않으므로 대각사의 창건을 1911년 4월 8일로 보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있다.

2. 1914년 창건설의 오류
다음으로 대각사의 설립연대를 면밀히 검토하다가 보니 1914년 설립설을 기록한 자료가 보였다. 이점을 재조사하기 위해 여러 가지 자료를 찾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朝鮮の類似宗敎에서는 1914년이라고 되어 있다.불교계 유사종교단체」라는 항목에서 대각교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대각교(大覺敎, 경성부 봉익동 2)
본교는 1922년 현 교주 白相圭(이전의 이름 白龍城)가 일찍이(1914년) 자기가 건설한 선종 포교당에서 ‘대각교’라고 이름 붙여 창설한 것이다. 시세의 추이에 순응하여 현대에 적합한 포교방법에 의해 불교의 교지를 널리 선포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고, 그러기 위해 설교 또는 불교강좌를 개강하거나 불전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출판하는 등의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교주는 元始元年 전라남도 남원군 하반암면 죽림리에서 태어나 1883년 2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에서 華月和尙을 스승으로 하여 득도하고 이어서 8월 柏虛화상에게 沙彌10계를 받았다. 1894년 경상남도 양산군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禪谷律師를 스승으로 하여 비구계, 보살계를 받은 후 1904년까지 각지의 사찰에서 수도를 하고, 그 간에 각 선사에 대해 4교과, 법화경, 유마경, 범망경, 사분율, 염송, 화엄경 등을 강학했다. 1904년 이후는 각 절의 주지가 되었다.1912년 경성 선종 중앙포교원의 포교사에 임명되고, 1914년 1월 경상남도 동래군 북면 범어사에서 대선사의 法階에 승진, 동년 현재의 땅에 포교당을 세우고 1919년 손병희의 독립선언운동에 가세한 후 각지의 절을 돌아다니며 법회를 행하고 있었으며, 1922년 본교를 창설하기에 이른 것이다.본교는 창설된 당시는 상당히 유망시되어 간도 龍井村 및 경상남도 함양군 백전면에 지부를 설치했으나 재정이 여의치 않아 간도 지부는 폐지하게 되고, 본부에도 현재 일요학교의 생도 백 명, 설교 들으러 모이는 자가 백여명 내외에 지나지 않는 형편이다.본교의 교의는 불교에 근거한 것은 물론이지만, 그 종지는 교주가 서명한 대각교명 제창이유」라는 책에서 명시된 것과 같이 “도의 대원은 覺에 있다”고 하여 이 각을 얻음으로써 신생활의 전개를 꾀하려는 데에 있다.라고 한다.29)
29) 村山智順著, 朝鮮の類似宗敎 (朝鮮總督府, 昭和10) p.410 崔吉城, 張相彦共譯, 朝鮮의 類似宗敎 (啓明大學校出版部, 1991) p.327

이 문장은 저자가 직접 기술한 것으로 대각교와 용성스님의 이력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비교적 자세하게 서술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이지만, 여러 군데서 오류가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대각사의 창건 년대를 1914년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설에 대해서는 이 문장 이외 어떠한 자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대각사의 창건에 대한 자료적 근거는 무엇을 인용하였는지 알 수 없다. 따라서 1914년 설을 수용하기는 쉽지 않다.특히 “1914년 1월에 범어사에서 대선사의 法階에 승진하고 그 해에 봉익동 2번지에 포교당을 세웠다.”라고 하는데 범어사에서 대선사 법계를 받은 것은 1913년 3월이다.30)
30) 조선불교월보15호 (조선불교월보사, 1913. 4) p.65

그리고 대각사의 최초 건립시에는 봉익동 2번지가 아니고, 봉익동 1번지였다. 그러므로 이것만해도 오류라고 볼 수 있다.용성스님은 이 때 朝鮮禪宗中央布敎堂에서 개교사장으로 근무하면서 가회동 211번지에 주석한 것으로 보인다.

3. 1916년 창건설
그러면 대각사의 창건 년대는 언제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1911년과 1914년 설이 있었지만, 정설로 보기는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1911년 설은 후대에 만들어진 大覺敎中央本部現物財産目錄(필사본)에 근거한 것이다 보니 그 정확성을 기하기 어렵다. 또 1914년 설은 자료에 부정확한 부분이 많으므로 신뢰가 어렵다. 이에 비하여 용성선사 본인이 직접 구술한 자료가 있으므로 이를 토대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데 본인이 직접 구술한 자료는 그가 3․1운동관계로 투옥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조사 받을 때의 취조서이다. 이에 의하면,
문: 성명은?
답: 白相奎이다.(中略, 前例檢事局問答과 同一하므로)
문: 피고는 어떤 절(寺)에 소속되고 있는가?
답: 경상남도 협천 해인사의 승려로 있었고 그 후 범어사(梵魚寺)에서 경영 하던 경성포교소에 있다가 53세 때부터 鳳翼洞1번지에서 단독으로 있었다.라고 한다.31)
31) 李炳憲編著, 三一運動秘史 (時事時報社) p.137 拙著, 龍城禪師硏究 (甘露堂, 1981) p.173

이 자료는 1919년 7월 28일 서대문 감옥에서 예심판사가 조서한 내용이다. 지금까지 검사가 일방적으로 하던 조서와는 조금 차이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대각사는 그의 나이 53세 때인 1916년에 봉익동 1번지에 설립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자료 중에는 본인이 직접 언급한 것이므로 가장 신뢰할 수 있다.다시 정리하면, 대각사의 건립은 종래의 1911년 4월 8일이 아니라 정확한 일시는 알 수 없지만, 1916년에 봉익동 1번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대각사의 창건 년대를 1916년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된다.그런데 그가 대각사를 중심으로 대중포교활동을 하면서 가장 큰 애로사항에 봉착한 것은 포교자금의 문제였다. 신도들의 시주금만으로는 충당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이러한 자금의 문제로 고민에 빠진 그는 여러 가지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새로운 제안이 들어오게 된다. 그것이 바로 포교를 위한 지속적인 자금공급원으로 사업에 손을 대게 된다. 萬日參禪結社會創立記」에 의하면,
一日에 自謂호대 譬如水源이 完實하야사 滔滔長江이 波濤萬里하나니 吾宗도 亦然하야 禪宗本寺는 淸淨山間에 建造하야 道人을 養成하고 禪宗布敎堂은 各都市中에 設置하야 天下大衆으로 共益을 得케 할지로다. 如是思惟나 難得者資本이러라. 前北靑郡守康洪道謂余曰先生이 勞心焦思者事業發展이니 我北靑郡守時에 金銀銅鑛에 前韓國鑛으로 爲定이러니 而今廢止矣 라. 先生이 若於有意면 事業非難이라 하야늘 余喜不自勝하야 着手數三年에 損失이 亦多러라.라고 한다.32)
32) 「萬日參禪結社會創立記」, 龍城語錄卷下(龍城全集1-546) p.25

여기서 그가 얼마나 포교의 자금 때문에 고심하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포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북청의 금광사업을 착수하게 되었다. 자금난으로 고심하고 있을 때 마침 북청군수를 지낸 바 있는 강홍도라는 사람의 권유로 금광사업에 착수하여 삼년 만에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러한 결과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업자적인 경험이 부족하고 수완이 없었던 그에게 성공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인지 모를 일이다.북청은 함경남도 북청군으로 산악지대와 동해안이 연결된 지역이다.이곳은 헤이그밀사로 파견되었던 이준열사의 고향이기도 하며, 북청사자 놀이로 잘 알려진 곳이다. 이 때 북쪽과 인연이 되어 훗날 함북에 포교당을 건립하여 念佛房을 만들기도 하였으며, 간도에 대각교당을 세우기도 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북청금광사업에 대한 분명한 연대가 없으므로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1916년에서 1918년 사이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로는 다른 연대는 명확하며, 중반기의 생애 중에서 이때의 행적이 자세하지 않으므로 가장 타당한 것으로 본다. 따라서 54세인 1917년과 55세인 1918년의 행적이 묘연하다. 아마도 이 시기는 북청금광사업에 전력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사업에는 실패하였지만, 사원경제의 자립화라는 큰 과제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값진 교훈으로 남겨주고 있다. 1916년에 鳳翼洞1번지에 설립된 대각사는 그의 포교활동에 있어서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여기에는 많은 신도들이 있었는데, 궁중의 상궁들과 남자 거사들도 참여하였던 것 같다. 여기서 3․1 운동에도 참여하였으며, 뒤에는 독립운동의 본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가회동 211번지의 포교당은 그대로 유지하였던 것 같다. 그는 서울에 두 곳의 포교당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가 3․1 운동에 참여하여 서대문감옥에서 3년 동안의 철창생활을 하는 동안에 제자들의손에 의해 이곳은 매각되고 말았다. 제자들은 그의 옥바라지를 하기 위해 매각하였다고 하지만,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여하튼 그가 이룩한 대각사가 매각되고 났을 때 그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아마도 참담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출옥 후 가회동 211번지에 주석하면서 1921년 8월경에 三藏譯會를 조직하여 경전번역에 전력을 다하였다.33)
33) 拙論, 「백용성스님의 대중포교활동」, 大覺思想第6輯(대각사상연구원,2003) pp.64-69

4. 1922년 재건립
그 뒤 1922년 3월까지는 가회동에서 경전을 출판한 근거가 여러 곳에서 나오고 있으나 1922년 9월부터 봉익동 2번지의 이름으로 경전이 출판된다. 이와 같은 현상을 볼 때 아마도 1922년 3월 이후는 봉익동 2번지에 있는 민가를 다시 구입하여 대각사를 재건립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봉익동 1번지의 대각사를 매각하고 난 뒤 가회동 211번지에서 1922년 3월까지 주석하다가 9월까지는 아무런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1922년 9월 8일에 팔상록을 봉익동 2번지 범어사 포교당으로 간행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1922년 3월경부터 봉익동 2번지의 민가를 구입하기 시작하여 9월 이전에 이사를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후로는 가회동 211번지의 주소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볼 때 이곳은 매각하여 봉익동 2번지의 대각사 건립에 보탠 것으로 추정된다. 즉 1922년부터 제2기의 대각사는 봉익동 2번지에서 전개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대중포교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하였다.첫째는 문서포교의 일환으로 경전의 역경사업이다. 1921년 8월경 가회동에서 설립한 三藏譯會를 이곳으로 옮겨서 많은 경전을 역경하며, 한편으로는 새로운 저술을 하게 된다.둘째는 포교의 현대화이다. 당시의 시대조류에 맡는 포교를 하기 위해 어린이 포교, 의식집의 한글화, 불교음악의 보급, 일요학교의 설립 등 다양한 방법을 전개하였다.셋째는 해외포교당의 설립이다. 아마도 한국불교에 있어서 해외포교에 눈을 돌린 분은 용성선사가 처음이 아닌가라고 생각된다. 그는 해외포교사업의 一世代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의 포교방법은 받는 포교에서 주는 포교로 전환할 것을 강력히 주창하였다.넷째는 參禪布敎를 통하여 선의 대중화를 실천하였다. 1929년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 하안거를 맞이하여 대각사에 禪會를 개설하고 시민선방으로 개방하였다.
佛敎 제62호에 의하면,大覺敎堂의 禪會」
市內鳳翼洞二番地大覺敎堂에서는 去四月부터 七月까지 夏安居禪會를 開하고 多數한 信者와 가치 坐禪을 行한다는데 그 安居修禪은 左와 如하다더라.午前部 四時起寢, 五時禮佛入禪, 六時放禪, 七時進供, 十時入禪, 十一時放禪,十二時供養.午後部 三時入禪, 四時放禪, 五時說敎, 六時夕供, 八時禮佛入禪, 九時放禪就寢.라고 한다.34)
34) 佛敎62호 [佛敎社, 昭和4년(1929), 8], p.76

선사는 1929년 66세 때의 하안거 때인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 3개월간 대각사에서 시민선방을 개설하였다. 신도들을 위하여 개설된 이 선원은 편리를 도모하기 위하여 오전부와 오후부로 나누어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것 같다. 이러한 것도 대각교의 새로운 교육제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시민들이나 대각교인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이후부터 대각사에는 항상 시민선원이 개설되어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였으며, 부인선원이 개설되기도 하였다.35)
35) 拙著龍城禪師硏究 (甘露堂, 1981) p.15

이러한 그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인하여 선이 대중화되었다고 보인다. 그는 서울 장안에서 禪會와 禪院을 개방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參禪을 실수케 하였다.36)
36) 상동, p.74

즉 生活禪을 주창하였다고 볼 수 있다.37)
37) 拙論, 「백용성스님의 대중포교활동」, 大覺思想第6輯(대각사상연구원,2003) p.69

Ⅴ. 대각사의 연혁

대각사의 발전은 용성스님 생존시에는 말할 것도 없고 입적 후에도 제자들에 의해 유지 계승 발전되어 왔다. 용성스님생전의 대각사의 발전이나 역할 등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논문에서 밝힌 바 있으므로 생략하고, 입적 후의 연혁에 대하여 간략히 정리하고자 한다.이 자료는 대각사에서 제공받은 연혁과 대각사 대각회 사적기를 중심으로 재정리한 것이다. 위의 자료에서는 대각사의 창건을 1911년 4월 8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수정하여야 할 것이다.대각사의 초대 주지로는 1916년 창건에서부터 1940년 입적 때까지 용성스님이 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제2대 주지로는 1940년 용성스님의 입적 이후부터 1953년까지 표회암스님이 맡게 되었다. 용성스님의 입적 후 1945년 8월 16일에 독립이 성취되었으며, 1945년 11월 23일 상해 임시정부 김구선생 등 임원이 중국 중경에서 귀국하여 12월 12일 대각사를 방문하여 귀국보고회와 봉영회를 개최하였다.38)
38) 죽림 261호, 「3대대사연보」 (죽림정사, 2007) p.302. 대각사 대각회 사적기 (1988. 4. 8. 대각사 일우에 건립 현존)에서는 1945년 12월 12일이라고 하였으나 대각사 연보에서는 1948년이라고만 하였다. 따라서 이를 수정함.

제3대 주지로는 1953년부터 1954년 동안 신소천 스님 맡았고,제4대 주지로는 1954년부터 1955년까지 박동암 스님 맡았으며,제5대 주지로는 1955년부터 1974년 9월까지 다시 표회암 스님이 맡게 되었다.1961년부터 16년 동안 이능가스님은 용성스님의 해외포교의 뜻을 받들어 대각사에 주석하면서 세계불교지도자대회와 해외포교에 주력하였고,고광덕 스님은 1962년부터 1984년까지 대각사에서 주석하면서 용성스님의 도시포교의 현대화사업과 문서포교의 뜻을 받들어 불광법회와 불광출판사, 불광사를 창립하여 도시포교와 문서포교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였다. 또한 홍철법주는 용성스님의 청소년포교의 뜻을 받들어 1959년부터 룸비니 불교학생회를 창립하여 청소년 불교학생들의 포교에 전력하고 있으며, 룸비니회관을 건립하여 한국불교의 엘리트불자들을 양성하였다.정운문 스님은 어린이 포교와 한국 현대불교음악의 효시자인 용성스님의 불교음악 현창의 뜻을 받들어 1962년부터 지금까지 어린이 법회와 불교음악 발전을 위하여 매진하고 있으며 불교음악회관을 건립하고 있다. 또한 임도문 스님은 용성스님의 폐허성지 가꾸기 사업과 용성스님 현창사업을 위해 일생을 바치고 있으며, 2007년 10월에는 용성스님 생가를 복원하여 유물전시관, 역사관 등을 건립하여 죽립정사를 창건하였다. 1998년 3월 1일에는 용성스님의 사업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대각사상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기 위하여 대각회 부설로 대각사상연구원을 설립하여 필자가 원장을 맡아 매년 학술세미나를 개최하고, 大覺思想이란 학술지를 간행하고 있다.1962년 3월 1일에는 대각사 창건주이신 백용성 대종사에게 윤보선 대통령은 국가에서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하였다.1969년 9월 11일에는 동헌스님을 비롯한 제자들의 노력으로 백용성 대종사의 유업을 계승 현창시키기 위해 財團法人大覺會를 봉익동 3번지에 설립인가 받게 되었다. 초대 이사장으로는 동헌스님이 맡고 이사에는 고암․자운․동암․소천․성철․회암․보경․도원․광덕․성진․석옹․도문․수길․형하 스님과 감사에는 능가․혜총․김성철 등이 맡았다. 그후 대한불교조계종과의 관계 속에서 종단과 종도들의 뜻을 수용하여 재단법인 대한불교조계종 대각회로 명칭을 변경하게 되었다.제6대 주지로는 1974년 10월부터 1989년 10월 22일까지 부임한 효경스님은 대대적인 중창불사에 들어갔다. 1977년에 효경스님은 요사채를 확장하고 1982년에 봉익동 1의 10대지를 구입하여 봉익동 2번지와 합병하였으며, 1982년에 효경스님은 염불당을 준공하였다. 1987년 4월 30일에 회관 및 법당을 신축 완공하였다. 대각회 부지 130평과 대각사 부지 195평, 대각성전회관 400평, 일주문 15평, 범종각 이층 10평 등 철근콘크리트로 지하 1층, 지상 3층 999.71로 확장하여 면모를 일신하였다.39)
39) 대각사 대각회 사적기 (1988. 4. 8. 대각사 일우에 건립 현존)

제7대 주지로는 1989년 10월 22일부터 1999년 10월 22일까지 역임한 도문스님은 1996년 5월에 봉익동 1-9번지 대지 20평 한옥을 구입하였다.1990년 10월 9일에는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으며, 한글학회로부터 공로상을 추서 받기도 하였다.제8대 주지로는 1999년 10월 22일부터 2006년 2월 28일까지 흥교 스님이 맡아 2003년 5월에 권농동 187-15호 대지 40평 한옥을 구입하여 사세를 확장시켰다.제9대 주지로는 2006년 2월 28일부터 현재까지 장산스님이 맡아 용성스님의 유업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헌신하고 있다. 이외에도 대각회의 활동과 소속사암의 발전상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논하고자 한다.

Ⅵ.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그동안의 山中禪會를 정리하고 48세에 서울로 상경하여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이 다른 종교의 집회장소인 교회와 성당이었다. 여기서 불교의 열세함을 절감한 그는 도시포교의 원력을 세우게 되었으며, 처음으로 실천한 곳이 姜氏신도의 집이었다. 포교 석 달이 채 못되어 수백 명의 신도를 교화하였다. 신도의 집에서는 한계가 있으므로 康永勻집으로 이사하여 선종포교의 법규를 정하고 참선포교를 시작하였다. 아마도 이 집의 주소가 嘉會洞211번지인 것으로 추정된다.여기서 1911년부터 1922년까지 주석하면서 1912년에는 寺洞朝鮮臨濟宗 中央布敎堂의 開敎師長으로 포교사가 되었으며, 한용운과 함께 적극적으로 노력하여 수천 명의 신도들을 교화하였다.그리고 자신의 포교영역을 좀더 깊이 있게 넓히고, 체계화하기 위해 대각사를 창건하게 된다. 처음에는 봉익동 1번지에 대각사를 창건하였다. 대각사의 창건연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1911년 4월 8일설과 1914년 창건설과 1916년 창건설이 있었다. 이 세 가지 설 가운데에서 가장 신빙성이 있고, 명확한 것이 1916년 창건설이다. 다른 것은 타인에 의해 정리된 것이지만, 1916년 설은 본인의 구술로 직접 언급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대각사의 창건연대를 1916년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옥중생활을 하다가 3년 만에 출옥하고 보니 봉익동 1번지의 대각사는 이미 매각되고 말았다. 그는 다시 가회동 211번지로 가 있으면서 1922년에 봉익동 2번지에 대각사를 재창건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본격적인 포교와 전법, 역경, 독립운동, 불교개혁운동, 항일운동과 더불어 대각교운동을 전개하였다.

【국문초록】
용성선사는 그동안의 山中禪會를 정리하고 48세에 서울로 상경하여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이 다른 종교의 집회장소인 교회와 성당이었다. 여기서 불교의 열세함을 절감한 그는 도시포교의 원력을 세우게 되었으며, 처음으로 실천한 곳이 姜氏신도집이었다. 포교 석 달이 채 못 되어 수백명의 신도를 교화하였다. 신도집에서는 한계가 있으므로 康永勻집으로 이사하여 선종포교의 법규를 정하고 참선포교를 시작하였다. 아마도 이 집의 주소가 嘉會洞211번지인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1911년부터 1922년까지 주석하면서 1912년에는 寺洞朝鮮臨濟宗中央布敎堂의 開敎師長으로 포교사가 되었으며, 한용운과 함께 적극적으로 노력하여 수천명의 신도들을 교화하였다.그리고 자신의 포교영역을 좀 더 깊이 있게 넓히고, 체계화하기 위해 대각사를 창건하게 된다. 처음에는 봉익동 1번지에 대각사를 창건하였다. 대각사의 창건년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1911년 4월 8일설과 1914년 창건설과 1916년 창건설이 있었다. 이 세 가지 설중에서 가장 신빙성이 있고, 명확한 것이 1916년 창건설이다. 다른 것은 타인에 의해 정리 된 것이지만, 1916년 설은 본인의 구술로 직접 언급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대각사의 창건년대를 1916년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으로 철창생활을 하다가 3년만에 출옥하여 보니 봉익동 1번지의 대각사를 이미 매각되고 말았다. 그는 다시 가회동 211번지로 가 있으면서 1922년에 봉익동 2번지에 대각사를 재창건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본격적인 포교와 전법, 역경, 독립운동, 불교개혁운동, 항일운동과 더불어 대각교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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