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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올린 게시글: 2015-12-22, (화) 1:17 am 

가입일: 2015-01-01, (목) 10:13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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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사 창건 시점에 관한 제문제 1
한 보 광 *동국대 선학과 교수.

Ⅰ. 머리말
용성선사가 생존했던 시기는 참으로 다사다난했던 때였다. 나라는 일제의 강점기에 접어들었고, 불교는 조선시대의 숭유배불정책을 벗어났으나 서구열강들의 세력에 의해 기독교와 천주교가 범람해 와서 우리민족의 가치관을 흔들어놓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는 민족의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면서 불교의 혁신을 위해 몸부림쳤다. 그는 상경하여 처음에는 姜氏신도집에서 포교를 시작하였으며, 뒤에는 康永勻의 집으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참선포교를 하였다. 그 뒤 朝鮮臨濟宗中央布敎堂의 開敎師長을 역임하면서 포교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교당을 개설하였다. 그의 활동의 주무대가 되었던 곳은 다름 아닌 大覺寺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사의 활동 근거지였으며, 포교의 장이었고,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대각사의 창건연대나 창건연기에 대해서 분명한 기록이 없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이제 대각사의 창건 100주년이 가까워지므로 대각사를 재조명 해보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각사의 창건에 대한 설은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1911년 4월 8일에 창건하였다고 하는 설이며, 둘째는 1914년에 창건하였다고 하는 설과, 셋째는 1916년의 창건설이 있다. 이에 대해 지금까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 단지 1911년 설을 수용하여 왔다. 그러나 이 설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으므로 정설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다음으로 1914설과 1916년 설에 대하여 본 논문에서는 자세히 살펴보고 분명한 창건연대를 조명하고자 한다. 뿐만 아니라, 1922년에 재창건 된 것에 대해서도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조명으로 대각사 창건 100주년 기념행사를 바르게 치를 수 있으며, 그 뜻을 길이 계승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Ⅱ. 시대적 배경
白龍城스님(1864~1940)이 태어난 1864년은 나라를 넘겨주는 수모를 감당해야했던 비운의 임금이었던 高宗(재위기간 1864~1906)이 등극한 해이기도 하다. 강화도령이었던 哲宗의 대를 이어 고종이 임금 자리에 올랐으나 그의 재위기간은 아버지인 대원군과 왕비인 민비 사이에서 급변하는 시대를 끌어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특히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무너지고 외세의 강압에 못이겨 문호를 개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에 정치활동에 참여하여 개화를 앞당긴 사람으로는 開化僧 李東仁이 있었다. 그를 추종하던 세력들은 개화의 주역으로서 유대치, 김옥균, 서재필 등으로 開化黨을 이끌기도 하였으며, 1884년에는 甲申政變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한편 조선조의 숭유배불정책으로 승려의 사회적인 지위는 八賤으로 전락되었으며, 근근이 法燈을 유지하기조차도 힘에 겨운 지경이었다. 불교계는 도성출입금지로 인하여 정치적인 부당성을 변변히 호소조차도 못하는 상태에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1876년 한일통상조약이 체결된 이후 일본의 淨土眞宗과 日蓮宗등에서는 한국에 포교소를 개설하여 일본불교의 국내포교를 진행하였다. 그런데 신분제도에 의해 조선의 승려에게는 도성출입이 금지되었으나 일본 승려들에게는 도성출입이 자유로웠다.
1894년에는 양반 상민제도가 철폐됨에 따라 500년 동안 조선을 지배해 오던 신분제도에 일대혁신이 일어나게 되었다. 지금까지 지배계층으로 군림해오던 양반들이 없어지게 되므로 자연히 八賤制度도 그 모습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서 불교는 500년 동안 신분적으로 최하층에 속하여 도성출입조차 할 수 없었으나 이후부터 제도적으로는 보장을 받을 수 있는 계층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랜 관습으로 내려오던 신분제도는 단시일에 없앨 수 없었다. 이러한 불교계의 고민을 간파한 일본 일련종의 승려 左野前勵의 활약으로 1895년 4월 24일에 300여년만의 승려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되었다.1)
1) 高橋亨著, 李朝佛敎 (圖書刊行會, 昭和48) p.889

이와 같이 세계의 종교사 가운데 유래가 없는 역사적인 排佛과 宗敎的인 彈壓속에서도 불교의 법맥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엄격히 말한다면 한국불교의 시작은 이때부터라고 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불교는 언필칭 1,600년의 역사라고 하지만, 엄격히 말해서 불교의 布敎史는 100년의 역사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역사는 천주교나 기독교보다도 짧다고 할 수 있다.
사회적인 분위기는 승려의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되긴 하였어도, 오랜 관습으로 내려오던 因習을 하루아침에 바꾸어 놓을 수는 없었다. 출가자나 불교인이라고 하는 사실 하나만으로 사회로부터 천시 받아야 하였으며 숨어서 살아야 했다. 사회적으로 자신의 신분을 보장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도 스스로 출가하여 부처님의 正法眼藏을 위하여 헌신하신 선지식들의 爲法忘軀的인 신심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한편 서구 열강들은 기독교의 선교라고 하는 명분을 앞세워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유교적인 관습과의 마찰로 인하여 많은 박해와 갈등을 낳았으나, 1873년 대원군의 몰락과 더불어 쇄국정책도 점차 힘을 잃어갔으므로 이들의 선교활동은 활발해졌다. 한국 천주교의 역사는 200년이 넘었으며, 기독교도 1876년에 들어왔다. 그런데 불교는 1895년에 도성출입이 해제되었으므로 이제 겨우 100년이 조금 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경우를 서로 비교하면, 1887년에 정동교회와 새문안교회가 설립되었으며, 1892년에 명동성당이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불교는 동대문 밖에 원흥사를 1899년에 세웠으며, 사대문안의 사찰로는 수송동82번지에 覺皇寺를 1910년에 세워 원흥사에서 하던 圓宗宗務院의 업무를 옮겼다. 그 뒤 1937년에는 수송동 44번지에 覺皇寺를 이전하여 太古寺라고 하였으며, 한국불교의 총본산으로 유지하다가 1955년 불교정화운동 이후 오늘날의 曹溪寺로 사명을 변경하였다.2)
2) 김광식, 「각황사의 설립과 운영」, 大覺思想第6輯(대각사상연구원,2003) pp.9-49

그런데 서구세력에 반대하는 민족의 자각운동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東學이라고 할 수 있다. 1889년에 전라도에서 다시 봉기한 전봉준은 양반들의 가렴주구와 민족정신을 서양풍에 빼앗기는 것에 대하여 비분을 느껴 1894년 무렵에는 東學亂으로 변했다. 그러나 이들의 세력은 얼마가지 못하여 전봉준이 체포됨으로써 주춤해졌으며, 1906년에는 천도교(교주 손병희)로 개칭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가치관이 무너짐으로 생기는 정신적인 혼돈과 동서양 종교의 신앙적인 갈등 속에서 불교의 교단 내부는 안정을 되찾지 못하였다.

교단 내부적으로는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되긴 하였으나 우리들의 자주적인 능력에 의해 성취된 것이 아니라 일본 승려의 정치력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자연히 친일불교적인 색채가 농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는 도성출입금지해제를 위해 공로를 세운 左野前勵가 주최한 韓日僧團合同法會를 北一營에서 열기도 하였으며, 여기에는 정부 고관들도 다수 참석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佐野의 야심은 다른 데 있었다. 즉, 조선불교를 자신이 속한 일본의 日蓮宗에 예속시키려고 하는 움직임이 보였다.그는 이러한 작업을 위하여 정부의 고관들과 접촉하였고, 노골적으로 논의하기까지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일련종의 교세가 확장되기 시작하였다.

한국불교의 변화는 1899년 동대문 밖에 元興寺를 창건하여 이를 조선의 수사찰로 삼고 조선불교총종무소를 각 도에 하나씩 두어 각도의 사찰을 관장케 하였다. 나아가서 1902년에는 宮內部所屬으로 하여 寺社管理署를 설치하여 36조문으로 된 寺社管理現行總則을 勅令으로 頒布하여 전국 사찰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여기서 원흥사는 大法山으로 삼아서 국내의 수사찰로 하였으며, 각 도에 中法山 16개소를 두게 하였다. 이것이 1904년에는 폐지되고 업무는 內部地方局에서 주관케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제도는 일본불교의 승정제도와 비슷한 것이며, 1911년 6월에 공포한 寺刹令의 전초전이기도 하였다. 사찰령의 본말사제도는 일본의 에도시대(江戶時代) 초기에 실시된 曹洞宗의 조직제도로서 국가에서 종교를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진 산물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五敎九山制度나 선종의 특유한 叢林制度는 무시된 채 本末寺制度가 도입되었다는 것은 총독부가 불교를 통치하는데 편리한 수단으로 삼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사찰령에는 승려의 독신조항이 삽입되었으나 음성적으로 娶妻를 행하였으며, 1929년경에는 대부분의 본사에서 사찰령의 독신조항을 개정하였다. 이 시기에는 약 80% 정도가 독신조항을 삭제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용성스님이 태어나 살다간 시기는 민족적인 수난기였을 뿐만 아니라 불교적으로도 전통을 잃어가고 왜색화 되어가던 때였다.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 속에서 깨달음을 얻은 선지식으로서의 삶은 바로 보살의 길일 것이다.


Ⅲ. 상경 초기의 거주처

1. 상경과 타종교의 방문
선사의 산중수행과 납자들의 접인은 47세였던 1910년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이미 지리산 칠불선원의 宗主로 있으면서 저술한 歸源正宗에서 산중을 박차고 나와야겠다는 원력이 숨겨져 있는 것 같다. 여기서 각 종교의 문제점에 대한 예리한 지적과 불교교리의 우세함을 적나라하게 논박한 것으로 볼 때, 산중에서 필요한 책이라고 보기보다는 일반대중들에게 읽혀야 할 저술인 것이다. 즉 이러한 저술이 산중에서는 크게 효용가치가 없지만 일반대중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책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지금까지 이러한 교리적인 논박서가 한 권도 없었던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의 상경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수도 한 가운데에서 대중을 상대로 적극적인 포교를 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이미 歸源正宗을 저술하였으므로 각 종교의 문제점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특히 그의 상경은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승납 61세 중 전반기의 30여 년이 山中修行期라고 한다면, 48세 이후의 30년은 大衆敎化期라고 분류할 수 있다. 일생을 30년으로 나누어 뚜렷한 구분을 두고 활동한 분도 그리 흔치는 않다. 그의 후반기 30년은 말 그대로 민족과 함께 한 기간이며, 불교의 앞날을 위해 몸부림쳤던 때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상경하면서 처음에 관심 있게 살펴본 곳이 바로 다른 종교였다.그는 萬日參禪結社會創立記」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爾時에 龍城이 河東郡七佛禪院宗主로 被任이러니 世尊應化二九三九年辛亥에 解任하고 同二月晦日에 入京城하야 周流觀覽則各敎敎堂이 廣大嚴麗하야 聳出中霄하고 每到空日이면 聽衆이 滿堂이러라 自歎久之曰外道敎堂은 鐘聲이 錚錚然如林하되 吾道는 寂寞無人하니 是誰之過耶아 於是乎라고 하였다.3)
3) 龍城禪師語錄卷下, p.24 (龍城全集1-546)

이와 같이 그가 상경하여 처음으로 관심있게 살펴본 곳이 성당과 교회였다. 이는 그가 歸源正宗을 저술할 정도로 다른 종교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눈에 비친 다른 종교와 불교와의 비교는 대단히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이와 같은 술회는 조선글화엄경 12권에 있는 「저술과 번역에 대한 연기」에서도 밝히고 있다.

익년 신해 이월 회일에 경성에 들어와서 시대사조를 관찰한 즉 다른 종교에서는 곳곳마다 교당을 설립하고 종소리가 쟁연하며 교중이 만당함을 보았으나 우리 불교에서는 각황사 하나만이 있을 뿐이고 더욱 우리 선종에서는 한 사람도 선전함이 없음을 한없이 느끼어 탄식하고 즉시 임제선사의 삼ㅅ구로 제접함을 본받아 종지를 거량하였을 따름이었다.라고 하였다.4)
4) 백용성 역, 조선글화엄경권12 「저술과 번역에 대한 연기」 (龍城全集 12-87, 92)

이 글은 위의 것과 비슷한 점이 많으나 당시 불교계의 상황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는 직접 교회에 들어가보고 많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당시는 불교계의 도성출입 금지가 해제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대단히 열악한 환경이었다. 약 300여 년 만인 1895년에 비로소 승려의 도성출입이 자유로워졌으므로 다른 종교의 교세와 비교가 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1899년에 동대문 밖 인 창신동(현 창신 초등학교 위치)에 元興寺가 처음으로 건립되어 전국사찰을 총괄하였으며, 1903년에 궁내부에 있던 관리소를 이곳에 옮겼다고 한다.5)
5) 운허스님의 불교사전 p.659에는 1902년(광무6년)에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석림동문회편 한국불교현대사 (시공사, 1997) p.16에서는 1899년에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음.

여기서 1906년에는 현재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明進學校가 출범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원흥사는 四大門 밖이었으므로 도성 안에는 있는 사찰은 아니었다.도성 안에는 수송동 88번지에 있던 覺皇寺 하나밖에 없었다. 이는 1910년에 동녘의 궁터였던 것을 상궁 千一淸의 도움으로 왕실로부터 하사 받고 건축비는 전국 7천여 승려의 의무금과 원흥사의 대지 일부를 매각하여 충당하였으며, 목재는 해체한 궁궐의 나무를 사용하였다. 건립하게 된 배경은 도성출입 해제에 도움을 준 일본불교계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시작하였으며, 李晦光이 주축이 되어 한․일 불교합병의 상징이 되기도 하였다. 뒤에는 圓宗宗務院을 옮기기도 하였다.6)
6) 姜昔珠, 佛敎近世百年 (中央新書, 1980) p.46

그가 48세 되던 해인 1911년 음력 2월 그믐 경에 처음으로 상경하여 다른 종교의 교당을 살펴보고 있었을 때는 어디에서 머물고 있었을까? 여기에 대한 분명한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분명히 망월사와 같이 먼 곳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서울에 머물면서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을 관찰하던 때였으므로 서울 주변에 주석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당시 불교계의 상황으로 볼 때에 동대문 밖에 있었던 元興寺나 혹은 수송동의 覺皇寺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 중에서도 각황사일 가능성이 더욱 높아 보인다. 왜냐하면 사대문 안에 각황사 하나 밖에 없는 것에 대하여 탄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2. 姜氏佛子家에서 주석
그런 뒤 각황사에도 오래 머물지 않고 신도의 집으로 주석처를 옮기게 된 것으로 보인다. 각황사 하나 만으로는 포교에 부족함을 느끼고 禪宗布敎의 기치를 내세우면서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으며, 그러면서 처음부터 포교당이나 사찰이 아닌 민가에서 포교를 시작하였다.
龍城禪師語錄에 의하면,姜信佛家에 留錫度生하니 時年이 四十八歲러라. 未數三月에 得信徒數百名하다.라고 한다.7)
7) 「萬日參禪結社會創立記」, 龍城禪師語錄卷下, p.25 (龍城全集1-546)

그가 도심포교의 중요성을 깨닫고 포교에 대한 결심을 갖게 된 것은 시대상황과 다른 종교의 포교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는 처음에는 각황사에서 머물렀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姜氏불자의 집으로 옮긴 것 같다. 물론 이에 대해 처음부터 姜氏불자의 집에 머물렀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아마도 가장 처음에는 각황사에서 머물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왜냐하면 서울에 오자마자 절에서 머물지 않고 처음부터 민가에 머문다는 것은 당시 스님들의 일반적인 상식으로 볼 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다만 며칠만이라도 사찰에 머물다가 옮기지 않았을까 주청해 본다.

姜氏집인 민가에서 포교를 시작하게 된 배경과 그 후원의 환경이 이미 조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42세인 1905년에는 禪門要旨라는 책을 저술하였고, 그 해 11월에는 처음으로 경성에 올라와서 望月寺에서 법문을 하였다. 그 해 섣달 그믐밤에 除夜法門을 하였으며, 많은 대중들이 여기에 모여들었다고 한다. 선사의 서울 상경은 이때부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망월사 주석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인연으로 43세(1906) 1월 14일에 望月寺로 궁중에서 林尙宮이 찾아왔다. 선사의 명성은 일찍이 궁중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선지식을 친견하러온 그에게 해인사 장경판의 장식이 많이 낡았으니 이를 보수할 것을 권유하였으며, 그 해 3월에는 당시의 6천원을 내어 이를 보수하는데 보태었다. 또 임상궁의 주선으로 高宗은 二萬兩의 국고를 지원하였으며, 불사의 원만성취를 위하여 담당관으로 林氏와 姜大蓮화상을 파견하고 金聖業을 별감으로 하였으며, 사중의 감독관은 景明, 永海두 스님을 임명하였다.8)
8) 李能和, 朝鮮佛敎通史卷上, p.617

이러한 고종이나 임상궁 등과의 인연으로 볼 때 姜氏의 성을 가진 신도가 나타날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고 보인다. 그는 강씨 집으로 주석처를 옮기고 여기서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따라서 그의 포교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었던 것 같다. 語錄에서는 未數三月」라고 하는데 이는 3개월도 채 못 되어서 신도수가 數百名에 달하였다고 하므로 대단히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도시포교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아마도 그의 法力을 가장 먼저 꼽을 수 있겠지만,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자신의 집에 스님을 모시고 포교를 도왔던 姜氏檀越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당시의 상식으로 생각한다면, 스님들에 대한 천시와 하대는 말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님을 자신의 집에 모시고 그 곳을 포교의 장소로 삼았다고 하는 것은 보통사람으로는 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 신도의 영향력과 신심에 대해서 깊이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지 이름조차 알 수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연구과제로 남겨두고 조사하고자 한다.
姜氏신도의 협조와 후원으로 용성스님의 서울 도시포교는 일단 성공적으로 안착하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신도의 집에서 포교를 하는 것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므로 독립된 사찰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해 몇 신도들과 상의하여 새로운 곳으로 이주를 하게 되었다. 그 곳이 바로 侍郞康永勻의 집이었다.

3. 康永勻家에 포교당을 개설함
姜氏집에서 포교를 시작한지 석 달이 채 못되어 신도가 증가하므로 그 해인 1911년에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康永勻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본격적으로 도시포교를 시작하였다. 아마도 여기서는 康永勻의 집 전체를 빌려서 본격적인 사찰의 면모를 갖추고 시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萬日參禪結社會創立記」에 의하면,
又移去康侍郞永勻家하야 與數十信士로 立參禪法規하며 擧唱宗乘하다.라고 한다.9)
9) 「萬日參禪結社會創立記」, 龍城禪師語錄卷下, p.25 (龍城全集1-546)

康永勻氏집으로 옮겨서 참선을 중심으로 대중을 지도하였다. 그런데 康永勻家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康永勻氏는 고급관리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侍郞이라고 하는 벼슬은 신라부터 있었던 관직으로 고려시대까지는 상당히 높은 벼슬에 해당된다. 요즈음 말하면 차관정도의 관리에 해당한다. 이 康永勻에 대해서도 앞으로 연구과제로 남겨두고자 한다. 용성선사를 따르던 신도들은 궁중의 상궁들과 고급관리들이 많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남자 거사들을 중심으로 포교를 시작한 것 같다. 그는 信士들과 상의하여 參禪法規를 세웠다고 한다.
이 말은 바로 남자 거사들을 뜻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도시포교의 방향을 분명하게 세운 것 같다. 그는 수십 명의 信士들과 상의하여 參禪法規를 세우고 參禪을 중심으로 布敎할 것을 교화의 지침으로 삼았다고 한다. 따라서 단순히 불교의 교세를 확대하기 위한 포교가 아니라 參禪布敎를 지침으로 내세웠다.10)
10) 拙稿, 「백용성스님의 대중포교활동」, 大覺思想第6輯(대각사상연구원,2003) p.58

이는 아마도 참선하는 규칙을 정하였던 것 같다. 청규라고 하기에는 부족할 정도로 단순한 참선규정을 정하고 참선포교를 처음으로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는 산중에서 수선하였으며, 선사로서의 선지식의 반열에 올랐다. 그가 서울에서 도시포교를 하면서도 참선포교를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참선을 포교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문서나 교리로 포교하기는 쉽지만, 깨달음의 과정이며, 선사들이 주로 하는 참선을 일반 신자들에게 가르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포교의 핵심은 참선포교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조선글화엄경 12권에 있는 저술과 번역에 대한 연기」에서도 밝히고 있다.
더욱 우리 선종에서는 한 사람도 선전함이 없음을 한없이 느끼어 탄식하고 즉시 임제선사의 삼ㅅ구로 제접함을 본받아 종지를 거량하였을 따름이었다.라고 하였다.11)
11) 백용성 역, 조선글화엄경권12 「저술과 번역에 대한 연기」(龍城全集 12-87, 92)

즉 그의 參禪포교방법은 臨濟禪師의 三句로 제접함을 본받았다고 한다. 이를 위해 참선법규와 방법을 체계화하였으며, 일반 시민에게 맞는 포교를 시작하였다. 이를 볼 때 그의 포교방법은 분명한 주제를 정하고, 이를 가르치는 방법을 계발하였으므로 성공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보인다.

그는 전통적인 사찰이 아닌 민가에서 가정집을 빌려서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방법은 오늘날 많이 시도되고 있는 포교방법 중 하나이다. 따라서 그는 도시포교, 민가포교당의 첫 시도자이며, 효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도시포교당의 개척은 성공적으로 진척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당시 康永勻의 집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없다. 한편으로는 1911년 康永勻의 집에서 시작된 것이 바로 오늘날 봉익동 1번지인 大覺寺가 아닌가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다음 항에서 다루기로 하고 우선 康永勻의 집이 어디인지 규명할 필요가 있다. 용성스님의 서울 행적에 있어서 초기에 오래 주석하였던 곳은 어디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없지만, 그의 주소지 가운데 1911년 이후부터 1922년까지 자주 등장하는 곳은 京城府嘉會洞211번지이다. 그러므로 康永勻의 집이 京城府嘉會洞211번지가 아닌가라고 추정해본다. 그의 주석처가 가회동임을 처음으로 게재한 자료로는 1913년 6월 10일에 간행된 歸源正宗이다.12)
12) 白龍城著, 歸源正宗 (發行所中央布敎堂, 1913.6.10) (龍城全集8-956)“著者兼發行者白龍城(京城府嘉會洞211番地)”

이 가회동의 포교당은 1922년 대각사가 鳳翼洞2번지로 옮길 때까지도 존립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康永勻의 집을 봉익동 1번지로 보아 대각사의 전신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으로 본다. 그 이유로는 1911년 4월 8일에 봉익동 1번지에 대각사를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시간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먼저 1911년 2월에 상경하여 姜氏의 집에 수 삼 개월 정도 포교하다가 다시 1911년 康永勻집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그러다 보면 4월 8일이 훨씬 더 지나게 된다.
따라서 강영균의 집은 아마도 가회동 211번지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정식으로 포교당을 개원하면서 參禪法規까지도 정하여 宗乘을 擧昌하였다고 하였는데, 그곳의 사찰 이름은 무엇이었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면 사찰의 이름도 없이 단순하게 신도들에게 참선을 지도하는 禪會의 장소로만 존재하였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자세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는다. 그가 그렇게 오래 머물면서 歸源正宗 등을 출판하면서도 주소지로만 되어 있지 사찰의 명칭은 보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듬해에 대사동에 개원한 선종포교당의 開敎師長으로 취임하므로 여기서는 적극적인 포교활동은 못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된다. 가회동 211번지는 주석처로서의 역할이 더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4. 朝鮮臨濟宗中央布敎堂開敎師長취임
용성선사의 49세인 1912년은 용성에게 새로운 포교를 시도한 해이다.지금까지는 단독으로 포교활동을 하였으나 1912년부터는 범불교적으로 조직적이고 체계적이며 공동적인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 당시의 불교 상황은 대단히 복잡하였다.이를 살펴보면,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진지 한 달 만인 10월 6일에 元興寺에 본부를 두고 圓宗종무원장이었던 李晦光이 일본의 曹洞宗과 연합하기 위해 국내의 불교계와는 상의도 없이 7개항의 조항을 체결하였다. 조약 내용을 공개하지도 않으면서 찬성에 날인해 줄 것을 요구하고 다니다가 그 내용이 알려지면서 이회광의 조동종 연합을 賣宗행위로 선포하고 독자적으로 새로운 불교운동을 전개한 것이 臨濟宗운동이다.13)
13) 姜昔珠, 佛敎近世百年 (中央新書, 1980) p.45

여기에는 백양사의 朴漢永, 화엄사의 陳進應, 범어사의 吳惺月, 선암사의 金擎雲, 송광사, 통도사 등 호남지역 사찰과 영남지역 사찰이 합세하였다. 이들은 광주 證心寺에서 기획하여 1911년 1월 5일 규탄대회를 거쳐 송광사에 임제종 종무원을 두고 관장으로 김경운스님을 선출하였으나 韓龍雲스님이 관장대리를 맡게 되었다. 뒤에는 범어사로 종무원을 옮기고 서울을 비롯한 광주, 대구 등지에 포교소를 두게 되었다.
1912년 5월 26일에는 범어사와 통도사 등이 연합하여 大寺洞에 朝鮮臨濟宗中央布敎堂을 개교하였다. 위치에 대해서는 京城府中部寺洞28統6戶라고 한다.14)
14) 白龍城著, 歸源正宗卷上(1913년 6월 10일 간행)에 中央布敎所의 주소가 中部寺洞28統6戶로 되어 있으며(龍城全集8-763),白龍城著, 佛門入敎問答 (1913년 10월 27일 간행)의 판권에는 朝鮮禪宗中央布敎堂의 주소가 京城中部寺洞28統6戶로 되어 있음.

개교식에 모인 대중은 수천 명이었으며,15)
15) 朝鮮佛敎月報5호 <雜報>, <開敎式場> 매일신보 1912. 5. 26 <中央布敎堂開敎式>

한용운은 주무를 담당하면서 취지를 설명하였고, 백용성은 개교사장 즉, 포교의 책임자로서 설교를 하였다고 한다.16)
16) 매일신보 1912. 5. 28 <布敎堂의 盛況>

이처럼 항일운동의 전형을 보여주는 임제종운동의 최일선에 백용성이 서있었던 것은 그의 자주적인 불교정신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후 그의 노선을 짐작케 해주는 단적인 실례라고 할 수 있다.17)
17) 김광식, 「白龍城의 獨立運動」,大覺思想창간호 (대각사상연구원, 1998)p.59

그가 임제종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으며, 범어사와 통도사가 연합하여 설립한 조선임제종 포교당의 포교 책임을 맡은 것에 대한 자료는 萬日參禪結社會創立記에도 언급되어 있다.
次壬子春에 通梵兩寺와 智異山各寺와 聯合하야 新設禪宗敎堂於大寺洞하고 以開敎師長으로 被任하다. 布敎三年에 信者三千餘名이라. 自此로 京城에 始有參禪名이라.18)
18) 「萬日參禪結社會創立記」, 龍城禪師語錄卷下, p.25 (龍城全集1-541)조선의 유사종교, p.327, “1912년 경성 선종 중앙포교원의 포교사로 임명되고…”라고 한다.

그가 여기에 가담하여 한용운과 함께 일하므로 뒷날 3․1운동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말한 바와 같이 1912년에서 1915년까지의 3년간의 포교성과는 대단하였던 것 같다. 당시 서울시내의 포교는 미미하였으나 그의 노력으로 3천여 명의 신자가 증가하였다는 것은 크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또한 서울에서 처음으로 參禪이라는 말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臨濟宗운동으로 시작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에 의해 臨濟宗이라고 하는 宗名을 사용하지 못하고 뒤에는 朝鮮禪宗中央布敎堂으로 개명하였다.19)
19) 拙論, 「龍城스님의 중반기의 생애」, 大覺思想第2輯(대각사상연구원,1999) p. 19

당시 용성스님은 조선임제종 중앙포교당의 개교사장으로 근무하면서 주석처는 가회동 211번지였던 것 같다. 1913년 6월 10일에 간행한 歸源正宗 卷上의 서두에 의하면, 발행소를 中央布敎堂으로 기재하면서 白龍城選述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주소를 中部寺洞28統6戶로 표기하고 있다.20)
20) 白龍城著, 歸源正宗卷上(1913년 6월 10일 간행)에 中央布敎所의 주소가 中部寺洞28統6戶로 되어 있다(龍城全集8-763).

그런데 1921년 7월 15일에 재판으로 출간된 歸源正宗의 판권에는 著作兼發行者에는 白龍城이라고 하면서 그 주소가 京城府嘉會洞211번지로 되어있다.21)
21) 白龍城著, 歸源正宗再版(發行所中央布敎堂, 1921. 7. 15) (龍城全集8-956), “著者兼發行者白龍城(京城府嘉會洞211番地)”

이렇게 볼 때 용성스님은 1912년부터 가회동 211번지에서 주석하면서 寺洞중앙포교당의 개교사장으로 근무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5. 長寺洞의 講究所설립
용성스님은 中部寺洞의 조선임제종 중앙포교당의 개교사장으로 있다가 1915년 5월 14일 경에 長寺洞에 講究所를 설립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한 기록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김광식박사의 조사로 밝혀진 사실이다. 당시 1915년 5월 14일 每日申報의 단편적인 기사에서 찾아낸 것이다. 이에 의하면,
朝鮮臨濟派講究所」 長寺洞講究所에서는 오전 11시부터 백용성화상의 禪宗에 관한 講話가 有하다더라.「禪宗臨濟派講究所」 경성 인사동 범어사 중앙포교당에서 포교에 종사하던 백용성화상은 근일 소위사가 有하다 하여 中部長寺洞에 禪宗臨濟派講究所를 설립하야 每日曜日오전 11시부터 수도자를 위하야 임제어록의 제창도 하고 임제선풍의 진흥에 열심중인대 其제일회 강의는 佛法的大義如左하더라.라고 한다.22)
22) 每日申報 1915년 5월 14일

이 기사를 보면, 용성스님은 1915년 5월경에 中部長寺洞에 禪宗臨濟派講究所를 설립하여 매주 日曜日에 법회를 개최하였던 것 같다. 그 설립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915년 5월경으로 보인다. 이 기사가 1915년 5월 14일이기 때문이다. 이 날 강의한 것이 첫 회의 기사로 나갔다라고 한다면 아마도 1915년 5월 초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 성격으로 보아서 사찰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포교당이나 연구소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 講究所라고 하므로 강의도 하고 연구도 하는 강당과 같은 역할을 하지 않았나 여겨진다. 위치는 정확한 번지를 밝히지 않았으므로 알 수 없지만 지금의 세운상가 쪽인 것 같다. 그리고 얼마나 유지 되었는지도 알려 지지 않았다. 여기서 臨濟錄 등을 강의한 내용이 每日申報 7월 7일자에는 기고문으로 吾宗은 臨濟禪宗」이라고 하여 迦山沙門白龍城이라고 하면서 臨濟錄 강화가 게재되어 있다.23)
23) 每日申報 1915년 7월 7일 1면

이러한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장사동의 강화소는 일요일에 정기 법회를 하던 장소로 여겨진다. 여기서 주석하였거나 사찰로서 신도들의 신앙행위를 한 곳으로는 보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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