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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올린 게시글: 2015-12-21, (월) 6:26 am 

가입일: 2015-01-01, (목) 10:20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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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결과 - 내분기의 제도화를 중심으로 – 2
중앙승가대 포교사회학과 교수(승 무)

Ⅲ. 제도화 ; 60년대

이승만 정권의 붕괴로 인하여 정화운동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된다. 곧 대처 측에 의한 반동이 시작된 것이다.13) 그것은 대처 측의 기득권 박탈에 대한 불만을 억눌러 왔던 국가의 강제가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동은 10년 이상 지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태고종의 창종으로 일단락 되었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반동의 기간이 길었으며 끝내 분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는가? 그것은 정화운동의 성격과 깊은 관련성을 지닌다. 다시 말하면 정화운동이 복고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혁명적 성격의 사회운동이었고 바로 그러한 점에서 대처 측과의 타협의 여지를 완전히 제거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통합종단은 어떻게 탄생하였으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그리고 60년대의 제도화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그것이 반동과는 또 어떻게 연관되어 있었는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탄생

비구-대처 사이의 갈등이 통합종단으로 봉합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5.16 군사정부가 모든 사회단체를 정리하기 위해 등록사업을 펼치면서 불교계에 분쟁해결을 촉구했기 때문이다. 이에 1961년 12월 9일 문교부는 ‘불교재건위원회조례안’을 제시하고 여기에 찬성한다는 각서와 위원후보명단을 동년 12월 25일까지 문교부에 제출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개입에 의한 이러한 수습 노력도 비구 측과 대처 측의 커다란 의견 차이로 끝내 수포로 돌아갔다.14) 그 후 문교부는 당국의 불교재건위원회조례안을 철회하고 자율적으로 분쟁을 해결하도록 종용했다. 이에 1962년 1월 18일 양측대표가 문교부에서 만났으며, 동월 20일에는 위원명단을 제시하여 동월 22일 불교재건위원회 결성식을 가졌으며, 이 자리에서 양측 대표는 화동단결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불교재건위원회는 동년 1월 31일 4차 회의에서 새로운 통합종단 구성을 위한 불교재건비상종회칙과 종회의원 30명을 선임하고 발전적 해체를 하였다. 동년 2월 12일 불교비상종회는 새 종단의 명칭을 대한불교조계종으로 하고 교조는 보우국사로 하는 등 종명/종지에 완전히 합의하였다. 그러나 승려 자격문제에서 비구 측은 ‘출가독신자에 한함’을 주장하고 대처 측은 ‘선통합/후재건’을 주장하여 의견이 대립하였다. 이에 또 문교부가 개입하여 갈등을 자율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직접 조치하겠다고 경고하였다. 이에 대처 측에서는 중앙종회 의원을 각파 반수로 한다는 조건 아래 문교 당국의 견해에 찬동하였고 1962년 3월 25일 ‘대한불교조계종 종헌’이 공포되었다. 이를 계기로 정화운동은 법적으로는 제도화에 진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년 4월 1일 불교재건비상종회 9차 회의에서 종정으로 효봉을, 총무원장으로 임석진을 추대하였고 11일에는 종단구성을 완료하였다. 이로써 통합종단은 역사적인 출발을 하였다. 그리고 동월 13일 양측이 새 종단의 간부에게 모든 사무를 인계하였고, 동년 4월 14일 ‘대한불교조계종’이라는 명칭으로 문교부에 정식 등록함으로써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이 비로소 성립했다. 또한 동년 5월 31일에는 불교재산관리법이 공포되었다(석림동문회, 1997).

2. 제도화와 반동

어떤 한 사회나 집단을 새롭게 제도화함에 있어서 가장 첫 작업은 법제화이다. 통합종단의 경우에도 제도의의 영순위로서 법제화를 서둘렀고 통합종단이 문교부에 정식으로 등록(1962년 4월 14일)된지 4개월만인 1962년 8월 15일 대한불교조계종 종헌을 공포했다. 그러나 당시 통합종단의 종정이었던 국성우는 이를 불법이라고 주장하고 비구승 측의 효봉스님을 피고대표로 하는 ‘사찰정화대책위원회 결의 무효소송’을 서울 민사지방법원에 제기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1962년 8월 25일 대한불교조계종 제 1대 중앙종회는 개원되었고 동년 8월 30일까지 열린 제 2회 중앙종회는 전문 11장 95조의 중앙종회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동년 9월 10일 종회의원 의석비율(비구승 측 32명, 대처승 측 18명)에 불만을 가진 대처승 측은 비구승과 다시 투쟁할 것을 선언했다. 게다가 대처 측은 동년 10월 4일 비구승 측 청담스님 등 15명을 상대로 서울지법에 ‘종헌 및 종정추대 무효소송’을 제기했다. 이로써 통합종단은 반년만에 또다시 분규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 결과는 동년 12월 22일 서울시에 의해 대처승 측의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간판을 내리라는 계고장이 발부되기에 이르렀다.15) 이렇듯 제도화는 그 첫 작업인 법제화에서부터 반동에 직면하였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이후 60년대 말까지 결코 해결되지 않았다.16) 이처럼 종헌의 효력을 둘러싼 소송이 1969년 말까지 이어졌다는 그때까지도 양측의 갈등이 해결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반동의 지속을 의미한다. 실제로 1960년대 내내 대처 측에 의한 반동은 치열하고 다각도로 진행되었고 이에 맞서 비구 측도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했으며, 국가에 의한 중재노력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고소고발 사태가 이어졌다.17) 그렇다면 이렇듯 반동이 지속된 직접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비구 측이 대처를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인데,18) 이는 복고적이고 혁명적인 정화운동의 성격과 직결되는 결과이다. 그렇다면 반동은 왜 성공하지 못했는가? 직접적으로는 통합종단의 종헌에 따라 효봉스님을 종정으로 하는 대한불교조계종이 불교재산관리법에 의해 사회단체등록으로 등록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복고적 사회운동이 성공함으로써 불교의 전통성 및 정통성이 확보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두 측면은 모두 대처의 부정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결국 대처 측에게는 통합종단에 이탈하거나 별도의 종단을 만들어 스스로의 신분을 인정받던가 혹은 통합종단에 귀속되던가의 선택만이 남아 있었다. 실제로 1969년 3월 26일 대처승 측은 다시 분종을 공포하고 ‘종권수호 전국불교도대회’를 열어 통합종단 백지화를 재천명하였다. 또한 이 무렵 비구 측 내부에서는 청담스님 측과 총무원 진용을 장악하고 있던 경산스님 사이에 종권을 둘러싼 갈등이 발생하였으며, 청담스님의 탈종발표와 원로원장 복귀와 같은 내부혼란도 발생했다.19) 이에 대법원은 1969년 10월 23일 “통합종헌이 유효하다”는 최종판결을 내렸고, 통합종단의 합법성 여부를 둘러싼 비구 측과 대처 측 사이의 갈등은 최소한 법적으로는 종결되었다.20)

3. 제도화의 의의

정화운동의 복고적이고 비타협적 성격은 3대 종책사업을 비롯하여 수행 및 교학체계, 복식제도, 사원경제 등의 제도화가 지체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당시 대처 측에서는 각 분야의 전문가나 명망가에 의해 3대 종책사업을 비롯한 다양한 영역의 제도화 방안이 마련되어 있었으나21) 통합종단의 제도화 과정에서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통합종단에서 제도화시킨 것은 오직 승려교육의 제도화인데 그것마저도 전통교육의 제도화에 그쳤을 뿐이다. 이는, 당시 한국사회에서 근대식 교육제도가 일반화되어 있었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복고적 사회운동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 결과, 역경의 제도화는 운허스님의 개인적 원력에 의해, 그리고 포교는 70년대 말에 제도화되었다.22) 한마디로 한국불교의 지체된 현대화로의 귀결이었다.23) 다른 한편, 60년대 제도화는 사실상 제도 그 자체를 둘러싼 운동과 반동의 악순환으로 일관하였다. 이는 제도적 권위(합법적/합리적 권위)의 불신이라는 부정적 파급효과를 낳았다. 오히려 종단 내부의 갈등이 제도권 내에서 자율적으로 해결되기보다는 국가나 사법기관의 개입에 의해 해결되었다. 이는 종교의 자율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했고 이는 세속기관에의 의존성이나 국가에 의한 식민지성을 강화하는 부정적인 면을 낳았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60년대 제도화는 왜색화의 해소라는 일제잔재 청산의 의의24)와 불교전통의 회복이라는 의의25)를 남김으로써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회복하였고 교리적 정당성을 확보했으며 계율의식을 고취하여 계율을 재정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이로부터 한국불교계에서는 비구승 특히 선승들이 존경받고 선불교적 전통이 강화되는 결과도 파생되었다. 이렇게 볼 때 정화운동의 결실은 한마디로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정통성을 회복한 데 있다.

Ⅳ. 제도화; 70년대

1. 발생

1970년 5월 8일 대처 측이 ‘한국불교태고종’을 창종하고 불교재산관리법에 의거하여 문화공보부에 등록하였다. 그리고 1972년 대법원에서 통합종단으로부터 이탈한 대처 측의 종헌 무효에 대한 상고 모두를 기각판결을 하였다. 이로써 최소한 법적으로는 비구-대처 사이의 갈등이 종결되고 동시에 통합종단의 시대가 종언을 고한 셈이었다. 또한 이는 대한불교조계종이 비구승 단일 종단으로 새롭게 출발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새로움은 무색하였다. 이미 내분의 불씨는 지펴져 있었다. 1969년 7월 6일 당시 장로원장이었던 청담스님이 ‘불교유신 재건안’을 총무원에 제의했으나 총무원 측이 거부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주로 선학원 측 중진들인 청담스님 지지파와 당시 총무원을 장악하고 있던 경산스님 지지파들 사이에 내분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 내분은 워밍업에 불과했다. 태고종의 창종으로 정통성 및 정체성과 관련된 법적 시비는 끝났지만 아직도 종단 제도화의 길은 멀기만 한 것이 사실이다. 정화운동의 제도화와 관련하여, 60년대가 한마디로 대처-비구간의 정통성 및 정체성 시비로 일관했다면 70년대는 종무행정체계의 제도화와 연관된 시비로 일관했다. 중앙집권체제와 지방분권체제 사이의 갈등, 종정 중심제와 총무원장 중심제 사이의 갈등, 조계사파(종정 중심제)와 개운사파(종회) 사이의 시비로 이어진 일련의 내분이 그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내분은 왜 발생할 수밖에 없었으며, 정화운동과는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

행정체계란 중앙과 지방 사이의 권력 및 자원 배분뿐만 아니라 입법, 사법, 행정 사이의 권력배분의 제도화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행정체계의 제도화는 정치적 이해관계 및 물질적 이해관계와 직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직결되어 있어야 한다. 이는 행정체계의 제도화가 불가피하게도 제 세력들 사이의 갈등을 동반하는 이유이다. 대한불교조계종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다만 대한불교조계종의 경우 종정이라는 독특한 행정단위가 있다는 점26)과 정화운동의 결과 당시(1970년대) 종정의 카리스마적 권위가 매우 높았다는 점이 독특하다. 특히 당시 한국사회의 지배질서가 이미 합법적/합리적 권위에 기초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법적/제도적 권위에 대한 요구가 종단 내부에서도 요구될 수 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정화운동의 결과 당시 대한불교조계종에는 카리스마적 권위가 오히려 강화되어 있었다.27) 이는 1970년대 종무행정의 제도화 과정과 그로 인한 갈등의 중심에 종정이 놓여 있었던 이유이다. 이렇게 볼 때, 정화운동은 1970년대 내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셈이다.

2. 제도화와 갈등

내분은 이미 1969년부터 시작되었지만, 종무행정체계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내분은 1971년 초에 발생하였다. 1971년 3월 조계종은 교육․역경․포교 등 종단 3대 사업을 강력하게 추진할 것을 결의하고 총무원 기획위원회(위원장 청담스님)를 소집했다. 원로회의에서는 종정 직속으로 ‘종정지도위원회’를 설치하고 종무행정 개선을 위해 당해 연도 한 해에 한해서만 세 차례의 종정지도위원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동년 6월 26일 총무원간부들은 동년 7월 5일 임시종회에서 종헌개정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총사퇴하기로 결의했다. 그렇다면 기존 종헌의 무엇이 문제였는가?

그것은 종단의 최고 행정수반인 총무원장이 행정력을 발휘하는데 필요한 권력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28) 게다가 크고 작은 토지매각 사건은 종무행정에 대한 대중들의 불신을 극도로 자극하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제기된 것이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냐’ 혹은 ‘본사중심체제의 지향이냐’의 문제였다.29) 그러나 이러한 논의가 해결되기도 전에 종무행정체계와 관련된 또 다른 사건이 터졌다. 1973년 5월 29일 당시 총무원장이었던 경산스님이 사회국장 해임안을 종정스님께 제출했는데 종정스님이 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종정 중심체제’인가 혹은 ‘총무원장 중심체제’인가와 관련된 내분의 시작이었다. 이 내분의 결정판은 1975년 서옹스님이 종정으로 추대되면서 시작된 내분이었다. 서옹스님은 종단의 상징적 권위라는 관례를 깨고 ‘실무종정’으로서의 역할을 시작하였다. 동년 8월 28일 관음사 주지 교체의 건으로 서옹스님은 총무원에 보관하고 있던 종정직인을 반환하고 총무원 감찰원의 국장급 이하 모든 직원들로 하여금 사표를 제출하도록 하고 종정의 재신임을 묻는 긴급종령을 선포했다. 그러나 총무원 측은 4부장의 단합으로 이를 거부하고 종정에게 종령 철회를 건의했다. 이에 종정은 동년 9월 5일 전원 사표를 내지 않으면 종정의 임면권을 발동해 전 직원을 새로 임명하겠다고 최후 통첩을 보냈다. 그러나 총무원 측에서는 관례를 무시한 독선이라고 주장하면서 종회에서 이를 해결하자고 요구했다. 이렇듯 갈등이 심화되자 당시 총무원장이었던 동년 9월 12일 경산스님은 구두로 사퇴의사를 표명하고 총무원을 떠났다. 이는 종정이 인사권을 가지고 있음으로 인해 발생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 내분은 2년 뒤인 1977년 9월 15일 동화사 주지 경질과 관련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동화사 신도들은 서옹스님의 총무원 인사조치가 재야 측을 지지한 주지에 대한 보복조치라면서 대구 보현사에서 규탄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동년 10월 7일 마침내 해인사에서 열린 제 49회 임시종회에서는 ‘이서옹 종정추대결의 무효선언’과 ‘종정 불신임’을 결의했다. 그리고 동년 11월 9일 재야 측 종회의원들은 다시 ‘종정직위해임 확인청구소송’을 내자 동년 11월 11일 종정 서옹스님은 ‘불교진흥을 위한 비상종령’ 제 37호를 발표하고 종회 해산을 명령하는 동시에 17명의 ‘중흥종회’를 구성했다. 이때부터 종정 지지세력과 총무원장 지지세력 사이의 내분은 종정 파와 종회 파의 내분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갈등은 마침내 조계사파 총무원과 개운사파 총무원으로 양분되는 극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이후의 사건들은 사사건건 법정 시비로 비화되었다. 또한 신도회가 개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내분이 종결된 것은 후로도 약 3년의 세월이 흐른 1980년 초였다. 1980년 2월 15일 대법원은 전 종정 서옹스님이 개운사 측을 상대로 항고한 ‘가처분집행 취소결정’을 다시 기각함으로써 개운사 측이 완승했다.30) 그러나 그 뒤를 기다린 것은 내분의 원만한 해결이 아니라 세속권력에의 예속성과 같은 60년대와 동일한 문제의 반복, 종무행정 이외 다른 영역의 지체된 제도화31), 그리고 ‘10․27 법란’이 기다리고 있었다.

Ⅴ. 맺음말

지난 20세기 아시아를 비롯한 제 3세계에서 근대성 혹은 근대화(modernization)-종교적 차원에서는 세속화-는 일종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Procrustean bed)였다. 한국사회를 비롯한 동아시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에 대응하는 길은 크게 세 갈래로 나타났다. 하나는 고유의 전통을 고수하는 길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근대화의 길로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길이었으며, 나머지 하나는 절충하는 길(중국의 ‘중체서용론’, 일본의 ‘화혼양재론’, 한국의 ‘동도서기론’)이었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36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일본제국의로부터의 식민 상태를 경험하였다. 때문에 20세기 한국사회는 또 하나의 과제 즉, 일제 식민지로부터의 독립과 일제 잔재의 청산이라는 과제와 민족분단의 극복이라는 독특한 민족적 과제를 갖게 되었다.

20세기 중․ 후반 한국불교계에서 발발한 정화운동은 이러한 시대적 도전(challenge)에 대한 일종의 응전(a response)이었다. 이는 정화운동 그 혹은 그 사회적 결과가 근현대 한국불교의 정체성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사회문화적․구조적 이유이다.

정화운동은 복고적이면서도 혁명적인 일종의 사회운동이었다. 정화운동은 한국불교계를 지배하고 있던 일제의 식민지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고 한국불교의 세속화 물결을 되돌려 놓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해방 직후부터 준비되기 시작한 정화운동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이승만의 정화유시가 발표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밀고 밀리는 일종의 전쟁이었다. 대통령의 정화유시가 9차례 발표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 말까지도 한국불교의 정화는 종결되지 않았고, 1960년 4․19 혁명과 함께 정화유시의 촉발요인이자 받침대였던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면서 대대적인 반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정화운동은 1962년 통합종단의 탄생과 대한불교조계종 종헌의 공포라는 결정적인 진지를 확보하였다.

통합종단의 성립과 종헌의 공포는 정화운동이 제도화의 단계로 진입할 수 있는 발판이었다. 그러나 혹은 바로 그랬기 때문에 반동은 강도를 더해갔다. 운동과 반동 사이의 혼란은 정부가 개입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사사건건 고소고발사태도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은 통합종단의 종헌이 유효하다는 대법원의 판결(1969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끝내 분종으로 결말이 났다.

정화운동의 상흔은 결코 적지 않았다. 사원경제의 피폐화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불교의 제도적 규정력이 대내외적 영향으로부터 쉽게 흔들렸다. 세속화․왜색화 경향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비타협적인 태도로 일관했지만 세속적 권력에는 오히려 편승했다. 그 결과는 정권에의 예속성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나타났다. 한국불교의 현대화도 더디게 이루어질 수 없었고 종책사업의 성과는 크지 않았다. 이렇게 볼 때, 정화운동은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립이라는 큰 족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60년대 저발전의 본질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저발전의 끝은 분종이 아니었다. 1970년대의 내분이 불교발전을 가로막고 나섰다. 물론 1970년대의 내분에는 행정체계의 제도화에 따른 이해 갈등의 표출이라는 불가피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내분이 쉽사리 종결되지 않고 오히려 격화되고 장기화되고 있었던 데에는 정화운동의 여파, 특히 종정의 절대적 권위와 그의 행정적 개입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볼 때, 1970년대의 내분은 왜색화․세속화의 물길을 전통속으로 역류시키는데 성공한 정화운동의 업보다.

이제 정화운동도, 그 운동의 업보도 모두 과거의 역사로 기록될 뿐이다. 문제는 오늘날 한국불교가 프로크루스테스에게 잡혀 다리를 절단당할 것인가 혹은 그 무시무시한 도둑놈을 잡아다가 처단할 것인가의 기로에 놓여있다는 점이다. 정화운동은 비록 무수한 부정적 상흔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정통성을 회복시켰을 뿐만 아니라 한국불교가 프로크루스테스에 잡혀서 다리가 절단되는 일을 막아 주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는 더없이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이렇게 볼 때, 프로크루스테스를 잡아 처단하는 일과 한국불교를 다시 발전시켜 나가는 일, 즉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아야 하는 과제가 미래 한국불교의 숙제로 남아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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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960년 4월 27일 대처승 측은 조계사 탈취를 기도했고, 이어 부처님 오신날 기념행사 직후 ‘비구승은 물러가라’는 현수막을 들고 안국동 일대를 누볐다.… 이 때 해인사․화엄사․통도사 등 큰 사찰과 10여 개의 사찰을 대처승이 다시 점거했다”(석림동문회, 1997).
14) 당시 비구 측은 수정안을 사실상 거부했고 대처 측은 수정안을 제시한 것이다. 비구 측에서는 대처 측과의 통합을 사실상 원하지 않은 반면에, 대처 측이 수정안을 제시한 것은 불교재건위원회조례안 4항에 “대표를 추천할 때는 축첩자 및 분규발생 이후 물의를 일으킨 자와 당파의 간부로 있던 자는 제외한다”는 내용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15) 이상의 내용은 석림동문회(1997)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16) 1심에서는 대처 측 승소(1965.6.11), 2심에서는 비구 측 승소(1965.9.7)로 이어졌다. 그래서 이 소송은 대법원으로 지속되어 1969년 10월 23일 비구 측의 승소로 막을 내렸다.
17) 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석림동문회(1997)을 참고할 것.
18) 당시 비구측에서는 승려의 자격을 ‘출가독신자에 한함’으로 규정하였는데 이는 대처를 교단의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사표현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의사표현이 종헌에 삽입되었음을 말할 것도 없고 당시 문교부의 중재안에도 삽입되었다.
19) 이는 사실상 1970년대 종단 내분의 시작이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다음 장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20) 석림동문회(1997)를 참고하기 바란다.
21)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현대불교사(1962)를 참고하기 바란다.
22) 유승무(2002)는 통합종단 이후 3대 종책사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평
가를 시도하였다.
23) 1960년대 제도화의 성과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은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2001)을 참고하기 바란다.
24) 한국불교계는 한국사회에서 유일하게 일제의 완전 청산에 성공한 집단으로 꼽기에 손색이 없으며, 국가적 차원에서 일제잔재 청산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점과 비교할 때, 그 의의는 적지 않다.
25) 1962년에 제정된 종헌 1조는 ‘신라 도의국사가 창수한 가지 산문에서 기원하여 고려 보조국사의 중천을 거쳐 태고보우국사의 제종포섭으로 조계종이라 공칭하여 이후 그 맥…’이라고 밝힘으로써 조계종의 정체성이 한국불교의 선불교전통과 맞닿아 있음을 분명히 한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이러한 정체성 규정은, 당시 대처 측의 대표적인 이론가였던 李南采가 한국불교를 통불교적 전통을 가진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이러한 정체성을 부정하였다는 점과 비교해 보면,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왜 선불교가 그토록 중요시되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게 한다. 이남채의 논의에 대해서는 현대불교사(1962)를 참고하기 바란다.
26) 종무행정체계와 권력 배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논의는 심익섭(1996)과 유승무(1996)를 참고하기 바란다.
27) 당시 청담스님의 귄위가 절대적이었던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28) 대표적으로 당시 주지 인사권을 종정이 갖고 있었다.
29) 이에 대한 자세한 사실은 석림동문회(1997)을 참고하기 바란다.
30) 이상의 논의는 주로 석림동문회(1997)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31) 물론 종단 내분의 와중에도 수행체계 및 교육체계가 갖추어지기 시작하였고, 1977년에는 포교법이 통과되고 포교원이 별원화 되는 등 다소간의 제도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화는 당시 한국사회 전체의 비약적 발전과 비교해 볼 때 지체된 현대화의 현주소라고 밖에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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