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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올린 게시글: 2015-12-21, (월) 6:23 am 

가입일: 2015-01-01, (목) 10:20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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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결과 - 내분기의 제도화를 중심으로 – 1
중앙승가대 포교사회학과 교수(승 무)

Ⅰ. 머리말

한국불교의 정체성(Identity)을 이해함에 있어서 정화운동은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도 정화운동 자체가 한국불교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기간의 대부분에 걸쳐서 장기간 진행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때문에 정화운동과의 관련성을 무시하고서 현대 한국불교의 모습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째, 정화운동은 일제 36년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구조화된 한국불교의 구조 전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데 성공한 일종의 성공한 사회혁명이었다. 이는 그만큼 정화운동을 통한 변화의 폭과 깊이가 넓고 깊었음을 의미함과 동시에 일본 등지의 불교와의 차별성을 의미한다. 셋째, 정화운동의 주체 혹은 주역들이 이후 한국불교의 전 영역을 주조(鑄造)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모두 이후 한국불교에서 가장 영향력을 가진 리더로서 존경을 받았고, 또한 그들이 속해 있는 문중이 종단의 전 영역에서 지배력을 행사해 왔다는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대한 부정은 곧 그 구성원들과 그들의 스승에 대한 부정과 동일시 되기 때문에 현대 한국불교의 정체성은 별다른 변고가 발생하지 않는 한 향후 지속될 것이다. 넷째, 셋째와 결부되어 정화운동의 후유증 혹은 부정적인 결과가 쉽게 치유되거나 극복되지 못하고 그것마저도 한국불교의 정체성의 일부가 되었다. 이는, 비록 그러한 부정적인 결과가 불교의 시대적 대응과 자체 변화 및 발전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더라도 쉽게 제거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듯 정화운동이 한국불교의 정체성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정화운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충분하지 못하다.1) 무엇보다도 정화 시기구분에 대한 학문적 합의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한국불교 근현대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김광식은 정화운동의 시기를 1947년 2월에서 1970년 5월까지로 한정짓고 그 전개과정을 다섯 단계로 구분하고 있으며(김광식, 2001), 사회학적 시각에서 정화운동을 해석하고 있는 강인철은 그 시기를 1945년에서 1960년까지로 보고 있고(강인철,2000), 종교사회학자인 박승길은 정화운동을 미군정기부터 1990년대 종단개혁까지로 설정하고 있다(박승길, 2001). 또한 불교근현대사 자료를 집대성했을 뿐만 아니라 불교언론에 오랫동안 몸담은 바 있는 박경훈은 정화과정의 시작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지만 1962년 통합종단이 만들어진 것을 정화운동의 종결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선우도량 한국불교근현대사연구회, 2002, p.295). 다음으로, 정화운동의 원인에 대한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아직까지 대부분의 연구들은 이승만의 정화유시를 그 시발점으로 이해하고 있는 반면에 최근 일부 연구자들이 불교계 내인론을 주장하고 있다.2) 마지막으로, 아직까지 정화운동의 종결 및 그 사회적 결과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유일하게 박승길(2001)이 정화운동의 사회적 영향이나 정체성 문제를 일부 논의하고 있지만 짧은 논문에서 20세기 전 과정을 다룸으로써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해명하는 데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그는 베버의 인식 틀에 입각하여 정화운동을 부정적인 사건으로 전제함으로써 균형 잡힌 평가라고 보기 어렵다.3) 정화운동의 과정보다는 그 결과, 즉 제도화가 오늘날 한국불교의 정체성 혹은 그 형성과정에 실제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에 대한 연구가 극미흡하다는 사실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는 과거의 연구가 오늘날 및 미래의 교훈으로 이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문제의식이 과거연구에 반영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이는 정화운동의 연구성과가 오늘날의 불교현실을 이해하고 그 문제점을 해결하는데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글의 목적은 부분적이나마 현대 한국불교의 정체성 형성의 근원을 밝혀 보는데 있다. 이를 위해 이 글에서는 정화운동의 사회적 결과를 논의해고자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글은 현대 한국불교의 현실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1960, 70년대 한국불교의 흐름을 정화운동과 연관시켜 이해해 보는데 있다. 때문에 이 글의 초점은 정화운동의 원인, 전개과정, 그리고 시기구분의 문제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정화운동의 종결시점 및 그 사회적 결과에 놓여 있다. 그러나 끝은 처음과 연관되어 있고 결과는 원인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 또한 사회적 결과에 대한 논의는 다소의 평가를 수반할 수밖에 없는 바, 이를 위해서는 정화운동의 기본성격을 바라보는 이 글의 시각이 제시되어야 한다. 이에 제2장에서는 이와 관련된 약간의 예비적 논의를 시도하고 이 글의 시각을 제시할 것이다. 아무쪼록 이 글이 오늘날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한국불교의 발전에 미약하나마 시사점을 제공하는데 기여하기를 기대해 본다.

Ⅱ. 논의

인간사회의 집단생활 속에서 의도적이고 조직적이고 장기적인 집합행동이 발생하였을 때, 우리는 그것을 통상 사회운동(social movement)이라 부른다. 이렇게 볼 때, 한국불교의 정화운동을 일종의 사회운동으로 간주하는데 별다른 이의가 없을 것이다.

당시 한국불교계 내부에서는 왜 이러한 사회운동이 발생했는가? 대표적인 사회운동론자로 알려진 스멜서(N.J. Smelser)의 부가가치 이론(value-added theory)에 따르면, 사회운동이 일어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계기적 결정요인이 선행되어야 한다. 즉, 어떤 집합행동이 일어나는데 필요한 사회구조적․문화적 선행요건인 구조적 유인성(構造的 誘因性; structural conduciveness), 사회적 환경 속에서 어떤 형태의 박탈, 갈등, 규범과 가치관 사이의 모순 내지 괴리가 있는 상태인 구조적 긴장(構造的 緊張; structural strain), 이러한 구조적 긴장 상태에 대해 구성원들이 어떤 공통의 해석, 믿음, 신념을 발생시키고 확산시키는 일반화된 신념(一般化된 信念; generalized belief), 실제로 집합행동을 일으키는 극적인 사건을 가리키는 촉발요인(促發要因; precipitating factors), 사람들의 행동을 조직화하는데 필요한 참여자의 동원(行動을 위한 參與者의 動員; mobilizing of participants for action), 이상의 다섯 가지 요인들에 의해 누적된 사회적 힘을 방해하고 억압하려는 반결정요인(反決定要因; counter-determinant factors) 등이다.4) 이러한 일반적인 틀5)에 비추어 볼 때, 서세동점과 일제 이후 서양문명이나 근대화의 충격과 그에 대한 세 가지 반응, 즉 개화론, 수구론, 그리고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과 같은 절충론 사이의 대립은 구조적이고 사회문화적인 유인요인에 해당할 것이다. 다음으로, 일제시대 이후 지속되어 온 대처승의 확대 및 선승(비구승 혹은 수좌)의 심각한 박탈 상태, 그리고 불교 계율의 혼란 등은 구조적 모순의 축적과 구조적 긴장에 해당될 것이다. 셋째, 당시의 선승들은 당시 한국불교의 상황이나 계율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과 거리가 멀다는 신념과 확신을 가졌고 봉암사 결사 등을 통해 이를 확산시켰는데 이는 일반화된 신념에 해당된다. 게다가 일제의 패망은 한국불교를 정화해야 한다는 확신을 더욱 확고하게 하였다. 넷째, 촉발요인으로는 이승만의 정화유시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며, 다섯째, 당시 선학원에서 진행된 각종 회의와 동원령은 참여자의 동원에 해당된다. 여섯째, 대처 측의 저항이나 물리력 행사, 그리고 법적 고소, 고발 등은 반-결정요인에 해당한다. 만약 이러한 분석이 가능하다면, 한국불교의 정화운동은 이상과 같은 여섯 가지 요인들이 상호 상승작용을 일으켜서 발생한 전형적인 성공한 사회운동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정화운동의 시대구분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일종의 사회운동으로서의 정화운동의 객관적 조건(사회문화적 변화와 모순의 축적)은 이미 구한말부터 일제시기에 이르는 긴 기간에 걸쳐 서서히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 조건이 갖추어졌다고 해서 곧 사회운동이 발발하는 것은 아니다. 구성원들이 그러한 조건을 총체적으로 조망하고 인식하며 목적의식적으로 무엇인가를 실천하려고 할 때 비로소 사회운동은 발발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폭압적 사회통제를 구사하고 있었던 일제 하에서는 이러한 실천이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뒤집어서 말하면 이는 일제의 패망으로 비로소 정화운동의 예비단계가 시작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실제로 해방이 되자 기존의 교단 집행부는 스스로 퇴진하였고 곧이어 과도적인 임시 집행부인 조선불교혁신위원회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약 한달 뒤인 1945년 9월 22~23일 태고사에서 전국승려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를 계기로 교단은 새롭게 정비되었다.6)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제도개혁이나 소수의 인적 청산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였고 이러한 한계는 해방직후부터 우후죽순처럼 결성되기 시작한 불교혁신단체들의 저항에 직면하였다. 그리고 기존교단과 혁신세력 사이의 갈등이 지루하게 지속되었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7) 이렇게 볼 때, 해방 직후부터 정화운동의 촉발요인, 즉 이승만의 유시까지는 예비단계에 해당한다.

그리고 정화유시라는 촉발요인이 정화의 불길에 점화를 하면서 정화운동은 대중화 단계에 들어간다. 이 단계에 이르면서 정화운동은 비구 측과 대처 측은 각각 ‘우리’와 ‘그들’의 관계, 즉 적대적 관계로 뚜렷하게 양분 되었다. 그러나 대중화 단계는 길지 않았다. 1955년 8월 12일 전국승려대회를 계기로 정화운동은 공식화 및 조직화 단계로 곧바로 진입하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는 대통령의 유시라는 합법적 근거와 교단 내부의 프로그램에 따라 실제적인 정화과정이 착수되었다.8) 그러나 1960년 4.19혁명과 함께 이승만 정부가 붕괴되면서 대처승에 의한 반동(counter-movement)이 시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2년 통합종단을 성립시킴으로써,9) 정화운동은 마지막 단계인 제도화 단계로 들어갔다.

그런데 문제는 이승만 정권의 붕괴와 함께 시작된 반동이 10년 이상 지속되었고 1971년 태고종의 창종으로 일단락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처 측의 분종을 계기로 종단은 안정화 단계로 진입하지 않고 기나긴 내분에 휩싸였으며 이는 1970년대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정화운동의 제도화조차도 크게 반동기인 1960년대의 제도화와 내분기인 1970년대 이후의 제도화로 구분하여 논의하는 것이 불가피하다.10) 물론 제도화는 80년대 이후까지 지속되지만 여기에서는 70년대에 한정하여 논의하고 한다.

한편 정화운동의 사회적 결과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정화운동이 어떠한 성격 혹은 유형의 사회운동이었던가?’를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운동의 성격에 따라 운동의 결과는 결정적으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회운동의 성격 및 유형을 복고적 사회운동, 보수주의적 사회운동, 개혁주의적 사회운동, 혁명적 사회운동으로 구분한다면, 정화운동은 당시 종단 질서를 그대로 유지하기를 원했던 사람들이 벌인 보수주의적 사회운동이 아니다. 정화운동은 일제 이후부터 왜색화 되어온 종단질서를 바꾸려는 사람들에 의해서 추동된 사회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화운동은 개혁주의적 사회운동도 아니다. 일반적으로 개혁주의적 사회운동은 기존 사회질서의 큰 골격은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 중에서 가장 불만스러운 부분을 바꾸려는 운동인 반면에 정화운동은 당시의 종단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혁명적 사회운동인가? 정화운동이 당시 한국불교의 구조 전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려고 했다는 점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통상 혁명적 사회운동은 미래지향적 성격을 갖는데 반하여 정화운동은 전통지향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11)에서는, 그렇지 않다. 후자의 측면에서는 오히려 복고적 사회운동이다. 이렇게 볼 때, 정화운동은 복고적이면서 혁명적인 사회운동이라 할수 있다.12)

정화운동을 복고적이고 혁명적인 사회운동으로 규정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성공한 혁명이기 때문에, 이러한 성격은 이후 제도화과정이나 종단의 정체성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에 아래에서는 이러한 영향이 제도화과정에 구체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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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직까지도 정화운동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수준은 정화운동과 관련된 일차자료를 발굴하고 수집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다. 정화운동 관련 자료와 관련해서는 선우도량 한국불교근현대사연구회에서 수집한 기사자료와 구술사 자료가 상당한 가치를 지닌다.
2) 그 대표적인 예로 김광식(2001)은 미군정기 불교계 내부의 여러 요인의 복합적 결과가 정화운동의 원인이 되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3) 베버가 불교를 달인의 종교로 개념화한 것 자체가 서구의 개신교 윤리와 대비되는 부정적 질문의 경험적 근거를 찾고자 하는 노력의 소산이라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베버의 이러한 오류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해밀튼(1992)을 참고하기 바란다.
4)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라우어(1992)를 참고할 것.
5) 그러나 필자는 정화운동을 온전히 스멜서(N.J. Smelser)의 이론 틀에 억지로 끼워 맞출 생각은 추호도 없다. 특히 필자는 그의 이론 틀이 지닌 구조기능주의적 측면을 결코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필자는 정화운동을 세력들 사이의 정치적 갈등관계로 보는 신그람시학파의 시각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 분석해 나갈 것이다. 여기에서는 다만 스멜서가 제시하는 분석적 요인들을 수용하고자 한다.
6) 1946년 3월 제 1회 중앙교무회에서 ‘조선불교교헌’이 통과됨으로써, 사실상 교단제도는 합법적으로 새롭게 재구성된 것이다.
7)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2001)을 참고하기 바란다.
8) 이와 관련해서는 김광식(2000)의 「불교 정화의 성찰과 재인식」 및 「사찰정화대책위원회의 개요와 성격」을 참고하기 바란다.
9) 1962년 2월 22일 불교재건비상종회가 발족되어 동년 3월 22일 대한불교 조계종 종헌을 발표하였고 동월 25일 종헌을 공포하였다. 이는 한국불교 통합종단의 출범을 의미한다.
10) 석림동문회(1997)는 이와 유사한 시각으로 정화운동이 정리되긴 했지만, 10년 단위의 기계적인 시대구분에 따르고 있을 뿐 왜 그러한 시대구분이 가능한가에 대한 별도의 논의는 없다.
11) 이러한 점에서는 한국의 또 다른 전통종교인 유교의 위정척사론과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정화운동은 한국불교의 왜색화를 극복한다는 점 이외에도 당시 ‘근대화 = 세속화’로 인한 불교적 가치관 및 계율의 혼란을 우려하여 발발한 운동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다.
12) 김광식(2001)은 정화운동이 복고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박승길(2002)은 이를 근본주의로 개념화하고 있다. 또한 강인철(2000)은 정화주체세력의 이데올로기적 지형을 보수로 개념화함으로써 정화운동이 일종의 보수적 운동임을 시사하고 있다. 물론 필자가 주장하는 ‘복고적 성격’이라는 규정도 이러한 논의와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에서는 정화운동의 혁명적 성격을 강조하지는 않고 있다는 점에서 필자의 견해와는 확연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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