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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올린 게시글: 2015-12-13, (일) 10:32 am 

가입일: 2015-01-01, (목) 10:13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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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봉(白峰) 김기추(金基秋) 거사를 중심으로 -

1. 들어가기-생애(生涯)
김기추(金基秋) 거사의 법명은 백봉(白峰)(이하 백봉거사라고 함). 1908년 2월 2일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으며 뒤늦은 56세에 불법을 만나 1985년 8월 2일 78세 입적하기까지 속가(俗家)에 머물면서 거사풍(居士風) 불교를 크게 일으켰다. 그의 생애를 간단히 살펴보면 불법을 만나기까지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백봉거사의 아버지는 한의원을 경영하였다. 어린 시절을 전통적인 유학(儒學)의 분위기에서 성장했으며, 부산 영도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부산상업학교(釜山商業學校: 현(現)부산상고의 전신(前身)임)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중학교 2학년 때 일제(日帝)가 교명(校名)을 부산제2상업학교로 바꾸자, 조선어와 조선역사를 교과목에 넣어주길 요청하고 학교 교명을 바꾸려는 교명반대운동을 주도(主導)하였다가 주모자로 지목되어 퇴학을 당했다.
학교 중퇴 후에는 많은 독서(讀書)를 통하여 국가와 세계의 상황을 파악하고, 서울을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어 민족 단결과 조선 해방에 뜻을 같이 한 학교 선배이자 동네 친구인 일송(逸松) 정영모(鄭永謨)와 같이 항일독립운동 단체인 ‘청년동맹’을 결성하고 초대 총무(總務)로 활동하다가, 초대 회장인 정일송이 형무소에 투옥되자 제2대 회장(會長)을 이어받아 항일운동을 계속하던 중 일제의 재판을 받고 부산 동대신동 형무소에 투옥되어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적에 첫째 동생 김양추(金良秋)가 읽을거리로 불교서적인 <벽암록(碧巖錄)>을 반입(搬入)해서, 불교와 첫 인연을 맺게 되면서 백봉거사는 <벽암록(碧巖錄)>에 붙은 부록에서 참선법에 대한 짧은 글을 읽고 무작정 면벽(面壁)을 했다.
당시 그는 사회운동과 민족주의 사상에 전념하던 시절이었기에 불교나 기독교 등의 종교를 미신으로 치부하던 무신론자였다. 이러한 생각은 일제하의 탄압과 해방 후의 온갖 시련을 거치면서 ‘사람이란 무엇인가?’라는 회의로 발전했지만, 스스로 내린 결론은 ‘양심적으로 살다가 깨끗하게 죽으면 그만이다’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출감(出監)한 후에도 일제에 항거하는 활동을 계속하는데 대해 왜경(倭警)이 요시찰인물(要視察人物)로 지목하여 행동에 제한을 받게 되어, 생계와 일제의 검거를 피해 만주(滿洲)로 이주(移住)를 한다.
만주에서 광산(鑛山)관련 직업을 가지고 생활하던 중에 그곳에서도 일제(日帝)의 감시를 피하지 못하고 결국 헌병대에 검거되어서, 독립활동을 이유로 사형수(死刑囚)감옥(監獄)에 투옥되게 된다. 감옥 생활을 하는 도중 자기도 모르게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란 다섯 글자를 감방 벽에다 빽빽하게 써 놓았다. 담당 왜경(倭警)이 그 광경을 보고는 “내 어머니가 항상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염불하는데” 하고는 호의(好意)를 표하였다고 한다. 백봉거사는 만주의 헌병대에서 이 ‘관세음보살 사건’으로 살아났다고 술회하고 있다. 하지만, 백봉거사는 여전히 종교와는 무관한 삶을 살았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백봉거사는 일정한 직업 없이 지냈다. 물론 주위에선 취업을 하도록 종용했지만, 그의 마음은 움직여지질 않았다. 그러다가 광복을 맞게 되고, 해방 후에도 격동하는 현대사의 조류에 휩쓸려 모진 시련과 좌절을 겪었다.
해방 직후에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 산하단체인 부산(釜山)건준위에서 남부(南部)위원장을 맡아서 해방직후 민생(民生)을 돌보다가 미군정(美軍政)당국에 의하여 또 투옥생활을 하게 된다. 당시 일제(日帝)가 저장했던 양곡(糧穀)을 시민(市民)들에게 무상(無償)으로 배급을 했는데, 그 배급이 미군정령(美軍政令)에 위반된다고 하여 군법(軍法)재판에 회부되었지만, 1년 뒤에 무죄(無罪)로 석방된다.
백봉거사는 교육을 위해서는 학교의 설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여, 영도에 부산남여상(釜山南女商)이라는 여자고등학교를 설립하면서 설비추진위원장직을 맡아 지역 유지들을 설득하여 육영사업에 관여하게 하기도 하였고, 정치에 뜻을 두고 국회의원에 입후보했으나, 여의치 않자 서울에서 사업을 크게 하던 동생 김양추(金良秋)의 권유로 서울로 이사를 하여 동생이 경영하던 회사(會社)에서 사장직을 맡아 사회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굴곡이 심한 생활에서 오는 시련과 좌절로 인해 그는 인생의 무상함을 철저히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56세 때 불법을 공부하기 전까지 그의 종교관은 앞서 말했듯이 아주 소박한 것이었다.
어느 날 신거사의 소개로 처음 절에 가게 되고 이러한 계기로 백봉거사는 조주선사의 무자 화두로서 정진하게 된다. 정진하고 있던 1964년 1월의 어느 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이 후 백봉거사는 부산을 거점으로 보림선원을 운영하며 거사불교의 선두자로서 참선수행과 함께 계속해서 교화에 힘을 기울였다. 선원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오는 도반들로 해마다 여름과 겨울에 두 차례씩 일주일에 걸쳐 철야를 하면서 정진을 하는 전통을 지켜왔었다. 그러던 중 1985년 여름철 철야정진(徹夜精進) 기간에 백봉거사는 자신이 자주 인용하던 자신의 <최초구>(最初句)라는 게송을 하얀 천의 위에 써서 제자들을 시켜 기다란 대나무 장대 위에 걸어서 선원 입구에 세워놓게 하고 8월 2일 일주일간의 정진이 끝나는 날 아침, 백봉거사는 철야정진 해제식(解制式)을 끝내는 마지막 설법을 하고 조용히 입적했다.


2. 오도(悟道)
청소년시절부터 일제강점시대라는 역사적으로 힘든 시대를 살아오면서 겪어야만 했던 수많은 시련과 그러한 그의 인생에서 절실하게 느낀 무상(無常)함으로 백봉거사는 삶이라는 문제에 대해 회의를 품은 채 미미하나마 감옥생활에서 인연을 맺은 <벽암록>, 관세음보살 등으로 불교에 대한 관심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백봉거사는 충북(忠北) 청주(淸州)에 있는 심우사(尋牛寺)에 놀러 가게 되고, 얼떨결에 여름 철 참선(參禪) 정진(精進) 수련법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술친구인 원경(圓鏡) 신(申)거사가 주도한 그 열흘간의 정진대회에서 처음으로 자존심(自尊心)이 크게 상(傷)하는 경험을 한 백봉거사는, 분심(忿心)에 신통(神通)을 얻고자 불교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신통(神通)과 오도(悟道)를 구분조차 못하던 문외한이었던 백봉거사는 주지스님으로부터 조주무자(趙州無字) 화두를 받게 되고 그 화두를 해결하기 위하여 일구월심 쉼 없이 참구(參究)를 한다. 너무 열심히 한 탓에 상기병(上氣病)으로 위험에 처하기도 했는데 마침 상경한 친구 정일송(鄭逸松)이 응급실로 이송해 가서 수개월 치료를 받은 적도 있다. 이처럼 백봉거사는 결사적(決死的)으로 화두(話頭)에만 몰두한 것이다.
1964년 12월에 청주 심우사(尋牛寺)에서 겨울 정진을 할 적에는, 화두(話頭)일념(一念)에 빠져 새하얀 얼굴이 시커먼 얼굴로 변해버렸다고 한다. 그러한 백봉거사의 모습을 보고 염려한 신원경(申圓鏡)거사가 <무문관> 책을 가지고 그에게 다가가서 ‘비심비불(非心非佛)’을 펴보이자, 백봉거사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그 때 백봉거사의 시커먼 얼굴에서 광채가 나면서 온몸에서 방광(放光)을 했다고 한다. 이 광경을 목격한 도반(道伴)들은 자신도 모르게 백봉거사를 향해 무수히 절을 하자 멍하니 서있던 백봉거사는 언젠가 읽었던 무거무래역무주(無去無來亦無住)라는 <화엄경>의 글귀를 떠올리며 “그래. 무거무래역무주(無去無來亦無住)지.”라고 했다.
이렇게 하여 깨달음을 얻은 그 다음 날 저녁 무렵에, 마당에 있는 바위에 앉아 있을 때, 아래 마을에서 울려오는 교회 종소리를 듣고 백봉거사는 깨달음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종성(鐘聲)’이라는 게송(偈頌)이다.

종성(鍾聲)
홀문종성하처래(忽聞鐘聲何處來)
요요장천시오가(寥寥長天是吾家)
일구탄진삼천계(一口呑盡三千界)
수수산산각자명(水水山山各自明)

홀연히도 들리나니 종소리는 어디서 오나
까마득한 하늘이라 내 집안이 분명허이
한 입으로 삼천계를 고스란히 삼켰더니
물은 물은, 뫼는 뫼는, 스스로가 밝더구나
정진을 마치고 하산(下山)하는 길에, 신원경(申圓鏡)거사가 백봉거사에게 말을 건넨다.
“팔만사천법문을 한 마디로 말해봐라.”
그러자 백봉거사가 “원경(園耕)”하고 부른다. 신원경거사가 “왜 그래?” 하니,
백봉거사가 “내가 다 일렀다.”고 한다.


3. 교화(敎化)
백봉거사는 1964년 깨달음을 얻은 후 1965년 재가 불교단체인 보림회를 결성하고 1969년 보림선원을 개창하여 본격적인 대중교화를 했다. 교화에 있어서 학인들에게 불교 공부 바탕마련을 위한 설법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 항상 설법을 하였고 처음부터 재가불자들에게 맞는 수행방법으로 일주일이나 열흘 동안 철야정진을 부정기적으로 실시하다가 재가불자들의 사정을 감안하여 그에 적합한 수행방법으로 매주 토요일 철야정진을 실행하고 1년에 2회 일주일 철야정진으로 하여 학인을 개오시키는 방편으로 실시하였다. 철야정진은 1974년 여름을 1회로 정하고는 여름, 겨울 1년에 두 차례씩 정기적으로 실시하여 1985년 23회 까지 참선과 설법으로 직접 지도 하였다. 입적 후에도 철야정진을 놓치지 말라는 유지에 따라 전국에 걸쳐 있는 보림회 회원들이 그대로 철야정진을 계승하여 부산 대자선원, 화엄사 및 서울 보림사 등에서 토요일 철야정진과 일주일 철야정진을 빠짐없이 실시하여 지난겨울 2008년에 70회를 맞이하였다.
현재도 부산, 마산, 충청지역의 도반들은 가양에서 모여서 일정한 기간을 정하여 정진 중에 있고, 서울은 도반뿐만 아니라 일반인으로서 백봉거사의 설법과 수행방법을 따르는 사람들로서 20명에서 30여명이 모여 매주 토요일 철야정진과 매년 두 차례의 일주일 철야정진을 실시하고 있다.

1) 최초의 금강경(金剛經) 설법(說法)
어느 날 신원경(申圓鏡)거사가 백봉거사에게 신소천스님의 <금강경>번역본을 주면서, “한 번 보게”라고 한 일을 계기로 백봉거사가 불경(佛經)이란 걸 처음으로 보게 된다. 백봉거사는 <금강경>이 너무 좋은 나머지 밤새 읽어가면서 시흥(詩興)이 나서 각분(各分)마다 게송(偈頌)을 부쳤다. 먼동이 틀 무렵 마지막 게송을 짓고 그길로 신원경거사를 찾아가서 <금강경>을 돌려주면서 게송(偈頌)지은 걸 보여준다. 신원경거사는 밤새 백봉거사가 지었다는 게송을 읽고는 “이것 책 내자. 자네만 알기에는 아깝다. 책 내고 설법해라.”는 권유로 그 게송(偈頌)에다 설명하는 글을 약간 더 붙여서 <금강경강송>을 출판했고, 무교동 술친구를 주축으로 하여 ‘제1회 금강경강의’를 열었다. 설법장소는 정능(貞陵) 계곡이었다.
“거사(居士)가 견성했다.”는 소문이 나면서 서울의 불교계는 화젯거리가 생겼고, 백봉거사의 금강경강의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기가 드높았다. 유명한 나절로 법사가 백봉거사의 강의를 들은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춘성(春城)스님이 그 금강경강의를 빠트리지 않고 청강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2) 거사풍(居士風)을 세운다
당시 조계종(曹溪宗) 종정(宗正)이었던 청담(靑潭)스님은 백봉거사에게 출가(出家)하기를 종용했지만, 백봉거사는 유엽(柳葉)스님의 권유를 받아들여 거사풍(居士風)을 진작(振作)시키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는 보림회(寶林會)라는 거사 중심의 불교 모임을 결성하고, 거사(居士)로 살면서 교화(敎化)를 펴서 불법을 선양하기로 작정한다. 교화방법으로는 불경(佛經) 강의(講義)에 주력하면서, 그 뒤로 <유마경강론>도 내고, <벽오동>이라는 선시(禪詩)를 모은 책도 출판하였다. 그는 불교는 삼계유심(三界唯心)을 배워서 진리(眞理)를 터득하는 것이지, 타종교처럼 덮어두고 맹신(盲信)하는 신앙(信仰)이 아니라고 하면서, 출가 수행자만이 오도(悟道)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재가(在家)인 거사(居士)들도 얼마든지 견성(見性)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보림회의 강령(綱領)으로 보림삼강(寶林三綱)을 내세웠다. 즉

우리는 불도(佛道)를 바탕으로 인생(人生)의 존엄성(尊嚴性)을 선양한다.
우리는 삼계(三界)의 주인공임을 자부하고 만법(萬法)을 굴린다.
우리는 대승(大乘)의 범부(凡夫)는 될지언정 소승(小乘)의 성과(聖果)는 탐(貪)하지 않는다.

그는 기복(祈福)이 불교의 진면목이 아님을 강조하여, 오도(悟道)를 위한 수행만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 설법도 무상(無相)을 주제로 하는 대승(大乘)도리였으므로, 자연히 그의 주위에는 돈 많은 신도(信徒)가 없고, 공부에만 열심인 가난한 제자들만 항상 모여들었다.
그러나 거사(居士)들은 현실적으로 생계를 유지해야하는 까닭에 공부에 전념할 여건이 안 되므로, 수행방법도 승려(僧侶)와 다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수행한다고 가족을 팽개치는 그런 의리(義理)없는 짓은 하지 말아라”고도 했다. 그가 주장한 거사풍의 내용은 “거사풍을 세운다”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하지만 거사풍(居士風)은 그 목적이 비록 승가풍으로 더불어 같다고 이를지라도, 그 수단과 방편(方便)이 다르다. 세속에서 맺어진 생업(生業)을 가지고 혈연(血緣)을 보살피면서 스승을 찾기는 하나 집을 지킨다. 한갖 덤불에 걸린 연이요 우리에 갇힌 매이지마는 항상 푸른 꿈이 부푼 것이 남과 다르다. 이러기에 승가풍은 입성부터가 단조로움도 비리를 엿보지 않음이니 공부를 짓기 위함이요, 먹성이 간략함도 淫心을 일으키지 않음이니 공부를 짓기 위함이요, 머무름이 고요로움도 자성을 어지럽히지 않음이니, 모두가 공부를 짓기 위하는 수단이요 방편이다. 까닭에 일상생활은 벌써 체계를 갖춘 도인의 風道라 않겠는가.
거사풍(居士風)은 그렇지가 않다. 가정을 가꾸는 시간과 공간에서 마음과 몸을 다스리는 시간과 공간을 짜내어야 한다. 사업을 가꾸는 견문과 각지에서 말씨와 거동을 다스리는 견문과 각지를 짜내어야 한다. 사회를 가꾸는 도의와 신념에서 목숨과 복록을 다스리는 도의와 신념을 짜내어야 한다. 문화를 가꾸는 윤리와 감정에서 이제와 나중을 다스리는 윤리와 감정을 짜 내어야 한다.
바야흐로 돌이켜 보건대, 무거운 업력(業力)으로 하여금 어지러운 世情 속에서 내일을 위하여 마음을 가다듬고 인생의 원리와 누리의 본체를 캐어내는 방향으로 키를 바꿔 튼다는 사실은 입장과 조건에 따른 그 수단과 그 방편에서 비상한 각오와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승가풍 이상의 각오와 노력이 없어서는 한갖 벽에 그리어진 떡이나 마찬가지나 종요로이 큰 뜻을 세우는데 있어서만이 우리는 苦에서 樂을 취함으로 말미암아 고를 여의되 마침내엔 낙도 여인 줄 알며, 악에서 선을 취함으로 말미암아 악을 여의되 마침내엔 선도 여인 줄을 알며, 邪에서 正을 취함으로 말미암아 사를 여의되 마침내엔 정도 여인 줄을 알며, 생사에서 열반을 취함으로 말미암아 생사를 여의되 마침내엔 열반도 여인 줄을 안다. 때문에 구르고 굴리이는 온갖 차별현상은 그대로가 절대성의 굴림새로서인 상대성 놀이라는 사실을 깨쳐 알므로 하여금 법을 따라 관찰하는 것으로서 수단과 방편을 삼는다. 무슨 까닭으로써이냐. 다시 말하자면 승가풍(僧家風)은 색상신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먹고 입고 머무는데 아무런 걸거침이 없을 뿐 아니라, 時空에도 쫓기지를 않는다. 다만 선지식과의 인연만 닿으면 도를 이룰 길은 스스럼없이 트이게 마련이지마는, 거사풍(居士風)은 입장이 다르다.” (중략) “허공이 끝이 없다 하여서 어찌 남의 허공이며, 산하가 비었다 하여서 어찌 남의 인연이며 과업이 허망하다 하여서 어찌 남의 과업이랴. 부모형제가 소중한 것도 오로지 나의 소중한 바이요, 국가민족이 소중한 것도 오로지 나의 소중한 바이니 모든 法緣을 얼싸안고 절대성인 대원경지를 향하기 위한 거사풍(居士風)을 세우는 바이다.”

라고 하여 거사풍을 말하고 있다.
그 후에 서울을 떠나서 대전(大田)에서 두 해 정도 머물다가, 1972년 여름에 남해(南海) 보리암(菩提庵) 구경 차 고향 부산(釜山)에 잠시 들렀다가, 친구들과 자운(自運) 이점준(李点俊)거사의 강권에 따라 그길로 부산에 주석하여 만년(晩年)을 보냈다.
부산에서 12년간 머물면서 강의와 집필을 쉬지 않았다. 백봉거사는 매년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 일주일 철야정진대회를 열어서, “거사(居士)들도 철야정진을 하여야 공부에 진척이 빠르다”고 말하였다. 강의 교재로 쓰던 <금강경강송>과 <유마경강론>은 증보판을 내고, 선시(禪詩)는 <백봉선시집>을 다시 손질하였다. 미국의 유명한 선교사라는 ‘빌리 그래함’ 목사가 내한(來韓)하자 부산(釜山)MBC방송(放送)과 상의하여 그와 ‘동서(東西)의 종교(宗敎)에 대한 대담(對談)’을 제의하여 약속을 받았으나, 그 대담이 무산(霧散)되고 말자 그 목사를 위해서 <절대성과 상대성>이라는 소책자를 집필하기도 했다. 만년에 백봉거사는 혜심(慧諶)선사가 편찬한 <선문념송(禪門拈頌)>에 역주(譯註)를 부쳐서 <선문염송요론(禪門拈頌要論)>을 집필하는데 주력하다가, 세연(世緣)이 다하여 30권 모두 완간(完刊)하지 못하고 제15권(卷) 중간에서 그치고 말았다.
이렇게 거사(居士)들의 공부를 위하여 불철주야로 부지런하게 활동하더니, 1984년 어느 날 갑자기 “시정에서 교화(敎化)하다가 마지막에는 산(山)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하면서 지리산으로 거처를 옮기고는, 그 이듬해 1985년 양력 8월2일, 여름 철야정진을 끝마치고 그 육신(肉身)을 내버리고 입적했다. 세수 78세였다. 마지막 수련대회(修鍊大會)에 내다 건 깃발에는, 그의 최초구(最初句)가 이렇게 나부꼈다.

無邊虛空一句來
案山踏地大圓鏡
於此莫問知見解
二三六而三三九
가이없는 허공에서 한 구절이 이에 오니
허수아비 땅 밟을 새 크게 둥근 거울이라.
여기에서 묻지 마라 지견풀이 가지고는
이삼이라 여섯이요 삼삼이라 아홉인 걸.
3) 지견(知見)을 바로 세우자.
현대인은 과학적(科學的)인 지식(知識)을 토대로 하여 불교공부를 하기 때문에, 옛날 사람보다 불법에 대한 바른 지견(知見)이 빨리 나고, 견처(見處)를 얻기가 쉽다고 한다. 즉 “불교는 사실을 사실대로 이야기 하는 것이므로, 학교에서 배운 과학(科學)을 이용하면 이른바 정지견(正知見)이 날 수 밖에 없다.”고 하면서, 정지견(正知見)이 나는 것을 은근히 장려했다. 이 점은 화두(話頭)를 들어서 단번에 확철대오(廓徹大悟)할 것을 주장하는 선종(禪宗)의 간화(看話)공부와 판연히 다르다.
특히 거사(居士)들은 생계를 위하여 직업(職業)에 종사해야 하므로 공부에만 전념(專念)할 수가 없으니, 화두일념을 강조하는 간화선은 거사들에게 권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경전(經典)이나 선서(禪書)를 공부하여 불법(佛法)에 대한 정지견(正知見)을 먼저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바른 지견(知見)을 개발하고자 종종 시험문제를 내걸기도 하고, ‘보림삼관(寶林三關)’에 대답을 제출하라고 독촉하기도 하면서, 제자들의 공부정도와 견처(見處)를 일일이 점검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금강경강송>에 보면 보림삼관(寶林三關)을 다음과 같이 새겨놓고 있다.

제1관: 不去不來處에 生者何物 滅者何物인가?
自答: 泰山이 刮目來하고 綠水가 掩耳去로다
가고 옴이 없는 곳에 산자는 무엇이며 죽는 자는 무엇인고?
자답: 태산이 눈을 부릅떠서 오니, 녹수는 귀를 가리고 가누나.

제2관: 心外無法處에 迷者何物 悟者何物인가?
自答: 古路에 草自靑하니 正邪를 俱不用이라
마음 밖에 법 없는데 미한 자는 무엇이며 깨친 자는 무엇인가?
자답: 옛길에 풀은 스스로가 푸르러니, 바름과 삿됨을 아울러 안 쓴다.

제3관: 人我皆空處에 說者何物 聽者何物인가?
自答: 若論今日事하면 忽忘舊時人이다
너와 내가 비었는데 말하는 자는 무엇이며 듣는 자는 무엇인가?
자답: 만약 오늘 일을 논의하면 문득 옛 때 사람을 잊으리.

배우는 제자들이 지견(知見)이 나서 삼관(三關)이나 공안(公案)에 옳게 답을 하면 공개적으로 인가(認可)를 하고, 같이 공부하던 도반들에게도 인가(認可)를 받은 도반에게 큰 절을 세 번씩이나 하게 하였다. 이런 그의 독특한 인가(認可) 방식은 견처(見處)를 얻은 제자에게 한 고비를 넘었다는 것을 인증(認證))하는 의미도 있지만, 학인이 스스로 자신감을 가지도록 하여 견성(見性)을 위한 수행(修行)에 장애를 없애주려는 의미가 있다. 즉 불법(佛法)에 대한 더 이상의 필요 없는 치구(馳驅)하는 마음을 쉬도록 하는 데 의도(意圖)가 짙었다. <유마경강론>에 이런 글귀가 있다.

“도(道)는 구할려고 한즉 멀어 지느니, 안 구함에 구하라. 도(道)는 머물려고 한즉 어긋나느니, 안 머뭄에 머물라. 도(道)는 닦을려고 한즉 어긋나느니, 안 닦음에 닦으라.”

그렇다고 화두(話頭)를 통해 바로 견성(見性)하는 간화선(看話禪)의 돈오(頓悟)를 부정(否定)하지는 않았으니, 스님들에게는 지견(知見) 이야기를 하지 않고,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해야지”라고만 하였다.

4) 수행(修行)은 ‘새말귀’로 한다.
지견(知見)이 나면 다시 거사(居士)에게 적당한 수행(修行) 방편(方便))이 있어야 한다고 하여, 이른바 ‘새말귀’라는 거사의 공부를 내세웠다. 즉 화두(話頭)를 잡는 대신에 “모습을 잘 굴리자”라는 새로운 말귀를 가지고 수행하도록 한 것이다. 즉 “아무 모습도 없는 내가, 허공(虛空)으로서인 내가,” 일상생활에서 “모습을 잘 굴리자”라는 것이 가장 적당한 수행법이라고 보았다. 제자들이 새말귀를 가지고 수행을 하다보면 언젠가는 견성(見性)하게 된다는 확고한 자신감을 나타내 보인 적이 많다.

“참으로 삼계의 火宅을 벗어나기 위한 공부를 짓는 데에 염불, 간경, 기도, 呪誦(주송)이 방편이기는 하나, 화두를 수단으로 삼는 선(禪)은 방편중의 방편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방편인 선(禪)은 수단인 화두를 일념으로 순일하게 지닌다는 그 사실이, 지극히 엄숙하면서, 지극히 분명하고, 지극히 靜默(정묵)적이면서, 지극히 독선적이다. 지극히 엄숙하기에 스승을 섬기고, 지극히 분명하기에 집을 뛰쳐나고, 지극히 정묵적이기에 恩情을 끊고, 지극히 독선적이기에 世緣을 등지는 것이니, 내일의 대성을 위하여 돌진하는 승가풍의 모습이다. 세속과는 동떨어진 승가풍이니, 이를 가리켜 몰인간성이요 몰사회성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은정을 끊음은 뒷날에 그 은정으로 하여금 한 가지로 보리도를 증득하기 위한 우선의 끊음이요, 세연을 등짐은 뒷날에 그 세연으로 더불어 같이 열반계로 이끌기 위한 우선의 등집이란 의취를 모르기 때문이지만, 실로 화두를 순일하게 가지는 데는 혈연을 향하여 눈을 돌리고 세간을 향하여 귀를 기울일 틈도 없거니와 또한 있어서도 안 됨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거사풍은 그렇지가 않다. 인간성이기 때문에 가정을 꾸미고 사회성이기 때문에 世間을 가꾼다. 가정을 꾸미기 때문에 오늘을 살면서 내일의 안정을 걱정하고, 세간을 가꾸기 때문에 오늘을 엮으면서 내일의 번영을 꾀하기 위해 시간을 쏟는다. 이러히 시간을 쏟기 때문에 아무리 생사의 뿌리를 캐어내는 좋은 수단이요 방편이라 할지라도 24시간 모두가 공부를 지을 수 있는 승가풍과는 달리 24시간 모두가 가정을 꾸미고 세간을 가꿔야만 하는 거사풍으로서는, 화두를 순일하게 지닌다는 것이 지극히 어렵다기 보다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럴진댄 무엇보다도 시간적으로 용납이 안 된다. 하여서 생사문제의 해결을 포기함이 옳을까! 안될 말이다. 생사문제의 해결을 포기함이란 바로 인생을 포기함이니, 도대체가 인생이란 무엇이며 어떠한 존재인가. 천하의 양약도 내 몸에 해로우면 독약이요, 천하의 독약도 내 몸에 이로우면 양약이니, 화두도 이와 같아야 그 분수에 따른 福力과 신념, 지혜, 용기, 疑團과의 알맞은 조화가 이루어진다면 즐거운 열반락을 증득하는 양약이 되려니와, 만약 분수대로인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평생을 그르치는 독약밖에 안 될 것이니, 이에 독을 독으로 다스리듯이 운명적인 거사풍이라 한탄하지 말고, 이 시점에서 去聖의 혓바닥에서 뛰쳐나온 화두는 도로 거성의 혓바닥을 향하여 되돌려 보내되. 이에 代治法을 과감히 세워야 할 책임을 느껴야 한다, 무슨 뜻이냐. 사회문물의 발달에 따라 생활면의 각 분야는 분주하다. 이 분주한 생활선상에서 얽히고 얽히인 인생인지라 화두를 순일하게 가질 수 없는 그 책임은 뉘라서 져야 하는가. 선지식이 져야 한다. 선지식이 지지 못한다면 뉘라서 져야 하는가. 부처님이 져야 한다. 부처님이 지지 못한다면 뉘라서 져야 한다. 내가 져야 한다. 필경에는 내가 져야 하기 때문에 과감하게 대치법을 세우는 것이다.

代治法이란 이렇다. “緣에 따르는 바깥 경계를 굴리고 또한 경계에 굴리이는 것은, 실로 나의 無相身이 그 心機의 느낌대로 무정물인 色相身을 걷어잡고 행동으로 나툰다”는 도리를 깊이 인식하고, “모습을 잘 굴리자”라는 말귀를 세워서 나아가자는 뜻이다. 去聖의 화두가 말귀이고 대치법도 말귀일진댄, 무엇이 다른가. 말귀는 말귀이나 말귀로서는 같지 않은 말귀이니 그 말귀를 굴리는데 따른 수단의 좌표가 다르고, 그 수단의 좌표가 다르기 때문에 방편의 초점도 다르기 마련이다. 무슨 까닭으로써이냐. 예를 들어서 만약 핸들을 돌리고 키를 트는 데도 잘 돌리고 잘 틀어야 할 것이니, “모습을 잘 굴리자”라는 말귀와는 통하여서 그 실을 거둘 수가 있겠으나, 화두가 순일하여서는 또한 잘 안될 것이다. 事理가 이러하니, 학인들은 거사풍이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서, 아침에는 “모습을 잘 굴리자”라는 뜻으로 세간에 뛰어들고, 낮에는 “모습을 잘 굴린다”라는 뜻으로 책임을 다하고, 저녁에는 “모습을 잘 굴렸나”라는 뜻으로 희열을 느끼고, 시간을 얻어서 앉을 때는 나는 “밝음도 아니요 어둠도 아닌 바탕을 나투자”라는 여김으로 삼매에 잠길 줄을 알면, 이에 따라 깨친 뒤의 수행도 또한 “모습을 잘 굴리자”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새말귀는 논리적(論理的)으로 보면 문제점이 있는 공부방법이라고 할 수도 있다. 즉 “모습을 굴리는” 주체(主體)인 ‘나’가 전제(前提)가 되므로, 이른바 분별(分別)이 덜 떨어진 공부라고 나무랄 수도 있다. 물론 초보자가 이 새말귀를 들면 분별이 붙은 공부라서 견성(見性)을 기대하기 어렵다. 새말귀 공부를 위하여 백봉거사는 정지견을 요구한다. 즉, 주체인 ‘내’가 공적(空寂)하여 마치 허공같이 아무 모습이 없는 줄 확실히 아는 사람, 견처(見處)를 얻은 사람이라야 비로소 ‘새말귀’ 공부가 가능하다고 하였다.

5) 자기자신의 살림살이가 있어야 한다.
백봉거사는 “공부하는 사람은 십원짜리든, 백원짜리든, 자기의 살림살이가 있어야만 한다.”라는 말을 자주한다. 그의 “인생선언문(人生宣言文)”은 불교에 대한 그의 견해를 잘 나타내고 있다.

“太虛는 영역이 없다. 그러나 그 體性面은 空寂하면서도 호연하니 상하와 四維를 두어서 삼계를 세우고, 심성은 邊際(변제)가 없다. 그러나 用相面은 확연하면서도 蕩然(탕연)하니 正邪와 돈점을 두어서 만법을 굴린다.
이 가운데에 인생이라는 명자가 있으니 이 명자는 생노병사를 두어서 부귀빈천을 굴리고 부귀빈천은 희노애락을 굴려서 恩怨憎愛(은원증애)를 말아내니 이 理이냐. 이 眞이냐 이 假이냐, 어즈버야, 이와 사의 앞소식에 이와 사가 따로 없으니 야반에 兎角杖(토각장)을 짚음이요, 진과 가의 앞소식에 진과 가가 따로 없으니 風頭에 龜毛拂(구모불)을 가짐이로다.
이 당처인지라 의취가 심오하니 사람들은 제가 모르고 화택 중을 향하여 달리며 울부짖을 뿐이니 노사나불의 얼굴에는 봄바람이 가심이로다. 그러나 머리를 크게 돌릴새 이에 불자가 있으니 삼계를 처리하고 만법을 정리할 의무도 있지마는 권리도 당당히 있는 불자이다. 우리 불자들은 문수의 채를 신호로 보현의 춤에 발을 맞추어서 대도를 행하며 가기를 천하에 선언하노라.

1. 나는 인생본래의 면목을 되찾기 위하여 번뇌와 塵勞(진노)가 전부인 이러한 인생을 거부한다.
2. 나는 인생본래의 면목을 되찾기 위하여 생노와 병사가 전부인 이러한 인생을 거부한다.
3. 나는 인생본래의 평등을 되찾기 위하여 기복과 구명이 전부인 이러한 인생을 거부한다.

선(禪)에 대한 살림살이를 ‘삼선(三禪)’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즉 그의 ‘삼선(三禪) 칠구(七句)’라는 선시(禪詩)에서 이른바 여래선(如來禪)과 조사선(祖師禪)이라는 명칭(名稱)에 대해서는 보림선(寶林禪)이라는 자기의 살림을 내 놓고, 다시 선가(禪家)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후구(末後句). 향상구(向上句). 격외구(格外句). 전신구(轉身句)라는 용어(用語)를 사용하면서도, 다시 최초구(最初句). 향하구(向下句). 기특구(奇特句)라는 자기(自己)의 용어를 내놓았다. <금강경강송>과 <백봉선시집>에 보면 삼선(三禪)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如何是 如來禪
不藏一粒米(부장일립미) 不耕一莖草(불경일경초)
如何是 祖師禪
殺人刀與活人劍(살인도여활인검) 虎頭虎尾一時收(호두호미일시수)
如何是 寶林禪
說頭也落說不着(설두야락설부착) 無限淸風捲大地(무한청풍권대지)

또,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에 대한 그의 살림살이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문: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무엇을 가리키심이니까?
답: 뱀이 대통에 들어서 가는 소식이로다
문: 서쪽에서 오신 뜻을 물었는데 어찌하여 뱀이 대통에 들어서 가는 소식이라 하십니까?
답: 너는 어찌 한 빛깔이 그 한 빛깔 가운데 있지 아니하고 한 구절이 그 한 구절밖에 있음을 모르느냐.
문: 어리둥절 합니다.
답: 무엇이 어리둥절 하느냐. 方位가 없으므로 하여금 능히 方位를 두고, 去來가 없으므로 하여금 능히 去來를 두는 것이니, 「본래로 검지도 희지도 않으나 곳에 따라 푸르고 누름을 나투네」 이르는 의취이기도 하다.
문: 더욱 답답할 뿐입니다.
답: 너는 오로지 어리둥절하고 답답한 것만을 끌어 잡고 뒹구는구나. 단단히 들어라.
石男이 밑빠진 바리의 밥을 먹으니 「도솔을 여의지 않으시고 이미 왕궁에 오셨으며,
木女가 줄없는 거문고를 뜯으니 「어머니의 태를 나오시지 않으시고 이미 중생을 건져 마치시다」 이르신 소식이기도 하니 알몸으로 달려들어서 이 문제를 처리하라.


3. 맺음말- 설법은 알기 쉽게
설법을 알기 쉽게 하기 위하여 백봉거사가 주장한 수행방편의 특색은 여러 가지 있으나 그 중에서 현대에 증명된 과학지식을 활용하여 불타(佛陀)의 가르침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고자 노력했으며, 한글세대와 불교를 쉽게 교화하기 위한 의도로 ‘예불문’의 문장도 한글을 주로 사용하여 알아듣기 쉽게 바꾼 점이다. 예불(禮佛)할 적에 반드시 외우는 반야심경을 비롯하여 선원에서 독송되는 대부분을 “그 의미를 알면서 암송(暗誦)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한글로 번역한 것을 사용하였다. 뜻을 이해하고 외우기에 어려운 한문으로 독송하는 것은 불교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교화하기가 쉽지 않은 것임을 일찍이 알고 시행한 것이다. 또한 설법에 사용하는 비유(譬喩)도 현대(現代)의 감각에 맞게 새로운 내용을 창안한 것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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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제7회 학술대회
한국재가불교운동의 현황과 과제 /
일시 2009년 5월 30일(토) 오후 1시~6시
장소 부산대학교 성학관 1층 102호
주최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부산대 철학과
주관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부산불교지도자포럼
후원 범어사, 여여선원, 안국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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