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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올린 게시글: 2015-12-13, (일) 8:54 am 

가입일: 2015-01-01, (목) 10:13 am
전체글: 215
1. 들어가는 말
인도에서 재가불교운동은 대승불교운동이라고도 말한다. 이것은 부파불교의 교단구성원과 신행에 비판을 하면서 새롭게 일어난 불교, 대승불교에서는 새로운 변혁이 일어났다. 그러나 재가불교운동이 언제부터, 어느 지역에서, 누구에 의해, 어떤 이유로 발생했을까 하는 물음에 대한 답변을 지금까지 확실한 증거에 의해 답변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이런 데에는 그 원인에 대한 직접적인 역사적인 자료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간접적이고 주변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추정하는 가설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있는 정도로 그치고 있다. 이 글도 이러한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먼저 인도에서 재가불교의 의미는 무엇인지, 그리고 재가불교운동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어떤 이유로 일어나는지를 볼 것이다. 후술하듯이 인도에서 재가불교운동은 붓다의 사리공양, 곧 불탑에 대한 공양에 의한 신앙으로 보고, 그 전개 양상을 살펴보고, 그 후 경전이 성립하면서 불탑공양보다 경전 또는 경권공양신앙을 반야경을 중심으로 논의하고, 마지막으로 근현대에 일어난 불교부활운동, 특히 암베드까르의 불교에의 귀의를 중심으로 그 이전과 그의 활동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인도 재가불교운동의 기원
1) 재가와 재가불교의 의미
재가는 산스끄리뜨어로 gṛhastha(집에 사는 자), gṛhin(집을 소유하고 사는 자), agārika 또는 āgārika(집을 돌보는 자, 집에 사는 자), upāsaka, upāsikā 등 여러 용례가 있다. 이것을 종합하면, 재가란 세속적인 가정을 떠나지 않고 부처님의 법을 믿고 따르는 사람을 일컫는다. 붓다 시대부터 부파불교까지는 출가수행자의 비구와 비구니, 재가신도의 우빠사까와 우빠시까의 사부대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부파불교의 교단구성원과 신행에 비판을 하면서 새롭게 일어난 불교, 대승불교에서는 새로운 변혁이 일어났다. 이른바 보살(bodhisattva)라는 새로운 이름의 교단구성원이 등장하게 된다. 또한 이 보살이라는 수행자와 더불어 ‘선남자’(kulaputra)와 ‘선여인’(kuladuhitṛ)이 등장한다. 선남자, 선여인은 ‘훌륭한 집안의 자식’, ‘고귀하고 유덕한 사람’의 뜻이다. 이들은 대승경전 또는 그 하나의 구절이라도 받아 지니고 독송하고 해설하며 서사해서 경전을 공양하는 사람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불교를 신봉하는 모든 재가신도를 일컫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 재가불교란 일반사회에서 가업에 힘쓰고 가족을 부양하며 사회적인 의무를 책임지고 사회적인 행복을 추구하면서 불교의 신앙 활동을 말한다.

2) 재가불교운동의 배경과 기원
재가불교운동이 언제부터, 어느 지역에서, 누구에 의해, 어떤 이유로 발생했을까 하는 물음에 대한 답변을 지금까지 확실한 증거에 의해 답변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이런 데에는 그 원인에 대한 직접적인 역사적인 자료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간접적이고 주변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추정하는 가설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있는 정도로 그치고 있다. 이 글도 이러한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먼저 인도의 어느 지역에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보기로 한다. 일반적으로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남인도, 서북인도, 동인도에서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면 그 지역에서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남인도와 동인도에서 재가불교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배경은 불교 외적으로 바라문 문화권에서 일어난 박띠(bhakti)신앙과 같은 대중적인 힌두교 신앙운동을 들 수 있다. 둘째, 내적으로는 서북인도를 통한 많은 그리스와 서아시아의 이민족의 끊임없는 침입을 들 수 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상호작용을 통해서 인도에서 재가불교운동이 일어나는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전제하며 논의를 시작한다.
서력 전 4세기에 마케도니아 알렉산더(Alaxandros, BC. 355-323) 대왕의 동방원정을 시작으로 BC 3세기 중엽 그리스인에 의해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박뜨리아 왕국이 건립되었는데, 그 제4대 왕 데메트리오스(Demetrios)는 BC 189년 무렵부터 힌두쿠쉬 산맥을 넘어 간다라(Gandhāra)로 들어와 뻔잡(Pañjab) 지방이나 인더스 강 하류 유역의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딱실라에 수도를 세웠다. 불전에 밀린다 왕으로서 그 이름을 남긴 메난드로스(Menandros)는 아마도 데메트리오스 계통에 속하고, BC 163년 무렵 아폴로도토스(Apollodotos)의 뒤를 이어 샤까라(현 시아르콘트)에 수도를 정하고 서쪽의 스와트 지방에서 동쪽의 마투라(Mathurā)까지 지배한 것 같다. 왕은 젊어서 그리스 군대를 거닐고 뿌샤미뜨라를 샤까라를 추출한 뒤, 다시 중인도로 진입해 들어가 빠딸리뿌뜨라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샤까(Śaka)인은 BC 140년 무렵에 북쪽으로부터 박뜨리아로 침입하여 그리스 세력을 무너뜨리고, 다시 남하하여 지금의 시스탄에 정착하였다. BC 100년 무렵에 이르면 박뜨리아는 북쪽에서는 새로운 침입자 대월씨족(大月氏族)에게 내몰리고, 서쪽에서는 빠르티아 민족에게 압박당해 서북 인도나 인더스 강 하류지역으로 쫓겨나게 된다. 서북 인도는 BC 90년 경 딱실라(Taxila) 지방은 샤까인의 우두머리 마우에스(Maues) 수중에 들어간 이래로 다음 지배자인 꾸샤나(Kuṣaṇa, 貴霜) 족이 침입하는 50년 무렵까지 샤까인의 지배를 받았다.
대월씨족은 BC 2세기 중엽 박뜨리아(Bactria, 大夏=토깔라)를 정복한 뒤, 다섯 명의 토깔라 족의 부족장 가운데 하나인 꾸샤나 족의 부족장 꾸쥴라·까드피세스(Kujūla Kadphises)는 1세기 초엽에 다른 네 부족장을 제압하고 박뜨리아를 통일하고 계속해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간다라 지방으로 침입해 왔고, 다시 그의 아들 비마·까드피세스는 갠지스·야무나의 두 강 유역까지 진출하여 샤까인을 무찌르고 마투라를 손에 넣게 된다. 그는 78년 무렵 인도에서 꾸샤나 제국을 세웠다. 그의 지배권은 서쪽으로 빠르티아, 북으로 소그드 지방에 이르렀다.
이러한 그리스나 서 아시아 세계와 인도의 교섭, 그리고 동서 문화의 교류역사는 언뜻 보기에는 화려한 문화를 발전을 가져다주었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이면에는 기원 전후 300여 년에 걸친 전란의 역사이고, 이에 따른 침략은 북인도의 민중에게 고통을 안겨준 시대였다.
힌두교의 박띠 신앙과 더불어 많은 이민족들이 서북인도를 지배하며 온갖 포악한 행위를 자행함으로써 인도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민중들은 침략자들에게 농토와 가축을 빼앗기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도덕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사회적 혼란과 신변의 위협에 떨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부파불교의 출가수행자들은 이러한 민중의 아픔을 쓰다듬어주기보다는 학문연마와 수행에 의해 번뇌를 끊고 무지에서 깨어나는 성자가 되는 길, 또는 오랜 기간의 명상을 통한 신비한 지혜를 얻는 길을 이상으로 삼고 거기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민중들은 죄악에 빠진 자신들을 구원해줄 수 있는 존재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불교의 신념에 가까운 민중들 사이에서는 붓다에 대한 그리움이 싹 텄으로 보인다. 붓다와 같은 존재가 있다면 이런 고통이 있을 때 그에 대한 대책을 말해주었을 것이지만 붓다는 이미 열반에 든 지 오래되었다. 그러므로 그것을 대신해줄 수 있는 것을 찾았다. 그것이 그의 유골을 모신 사리탑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 둘씩 그곳으로 모여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민중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의지처이다. 그러나 불교는 원래 어디에 기원하는 종교도 아니었지만, 하소연을 할 곳이 없는 민중들은 불탑 앞에서 붓다에게 기원을 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스스로 경전을 읽는다든지 수행을 할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그저 붓다를 흠모하고 존경하며 믿고 따르는 신앙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생겨난 것이 불탑공동체이며, 그 무리 중에서 생업에 종사하면서 나름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서 남에게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도와주는 일에 앞장선 사람이 생겨났다. 그러다가 개인적인 생업에 종사하는 것을 뒤로 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상담을 해주는 활동을 전적으로 하는 사람이 생겨났을 것이다. 이러는 과정에서 그는 지도자로서 민중들의 확고한 지지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원래 보살은 이미 수많은 전생에서 무수한 희생과 봉사활동을 통해서 부처가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던 석존의 전생을 말하듯이, 그때 대중의 지지를 받은 사람은 불탑공동체에서 아주 헌신적으로 신앙을 지도해 주는 대중의 지도자를 보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활동이 불탑 신앙자들을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되면서 지도부가 구성되고, 그 지도부가 보살집단(bodhisattva-gāna)이라는 하나의 교단으로 형성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한편 시간이 흐르면서 불탑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거대한 공동체가 형성됨으로써 불탑을 신앙하는 것이 하나의 새로운 불교로서 자리를 잡아가고, 또 그에 대한 정당성을 이론적으로 정립하기 위해 대승경전을 제작하여 경전숭배를 강조하였고, 경전이 신앙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에 따라 보살사상도 나타나게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3. 인도 재가불교운동의 역사적 전개
인도의 대승불교는 초기에는 재가자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차츰 출가승이 합세하다가 재가자와 출가승이 공존하게 되고, 마침내는 다시 출가중심주의로 바뀌었다. 만약에 이런 주장이 확실하다면 대승 후기에는 재가불교는 위축되거나 그 존재 자체가 무의미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도에서 불교교단이 쇠멸하고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재가자를 중심으로 신앙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그 시기는 19~20세기에 들어서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초기대승불교 시대의 재가불교운동으로 불탑신앙운동과 경전신앙운동을 살펴보고, 인도불교의 부흥으로서의 신불교운동으로 통칭되는 암베드까르의 불교에의 귀의 이전과 그의 신불교운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초기대승불교의 불탑신앙운동
불멸 후 2백년부터 대중부와 상좌부를 위시한 여러 부파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새로운 형태의 불교운동, 곧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 새로운 불교 운동은 재가신도들로부터 출발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출가자와 재가자가 엄격하게 구분되어 출가자는 부처님 법에 따르는 수행만 전문으로 하고, 재가자는 출가승의 뒷바라지만 하는 이분법적인 가르침은 아니다.
부파교단 안에서 진보적인 출가승와 보수적인 출가승들 사이에서 의견 차이가 있어 부파가 분열되면서 끝없는 논쟁으로 치닫는 승가교단에 회의를 느낀 승려들 중에서 불탑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공동체에 개별적으로 한 사람, 두 사람씩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붓다의 가르침에 정통해 있는 일부의 출가자들이 불탑신앙공동체에 참여하게 되는 계기는 붓다의 법에 따르는 실천행에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불탑신앙에는 오로지 재가불교도만 참여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글이 재가불교운동에 대한 것에 있으므로 이에 대한 논의는 생략하기로 한다.
초기 재가불교운동은 불탑신앙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경전 또는 경권이 신앙 또는 공양으로 발전하였다.
붓다의 시대 때부터 불교교단은 비구와 비구니를 중심으로 운영되어 왔다. 붓다가 열반한 뒤에도 그대로 계속되었으나, 한편으로는 변화도 일어났다. 빠알리어 <대반열반경>에 따르면, 붓다가 열반에 가까워지자 아난다(Ānanda)는 붓다에게 불멸 후의 일을 질문하였다. “대덕이시여! 우리는 여래의 사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라고 여쭙자, 붓다는 “아난다여! 너희 비구들은 여래의 사리공양에 봉사해서는 안 된다. 너희들은 최고선(열반)을 위해 노력하여라. 최고선을 실천하여라...... 아난다여! 여래에게 신심이 돈독한 끄샤뜨리야의 현자, 브라흐만의 현자, 거사(자산가)의 현자가 있어 그들이 여래의 사리공양을 할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리공양 또는 불탑신앙이 재가불교신도들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불탑공양은 천계에 태어나는 과보만 있을 뿐, 열반을 위한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기 때문에 불탑의 경영과 유지하는 일은 재가신도들 스스로가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비구들이 머무는 정사에서는 불탑이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설일체유부에서도 불탑신앙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았다. 불탑을 중요시하고는 있지만 불탑을 건립하는 것은 재가자의 몫이었다.
불탑신앙은 기원전 2세기 무렵에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불탑신앙의 전형의 하나는 바르후뜨의 불탑신앙집단을 들 수 있다. 이 불탑신앙집단의 특색은 외래에서 온 참가자들이 많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기원 전 2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바르후뜨 지방에 있는 어떤 명문에는 ‘부모를 위해서’ 불탑에 시여한다고 하는 불탑에 시여하는 목적을 밝히고 있다. 또 기원전 1세기 중엽의 마투라 지방의 난간명문에는 ‘모든 부처님의 공양을 위해’ 불탑에 탑문과 난간을 희사하고, 기원전 1세기 무렵 딱실라 지방의 명문에는 ‘부모에게 공양과 무병의 시여를 위해’ 탑을 조성했다고 새기고 있다.
이와 같은 것들에서 나타나는 불탑신앙의 내용은 현세에서는 무병장수를 위해 시여하고, 내세에는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천상계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존 부파불교의 자업자득의 업설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불탑공양이라는 선행이 자신 이외의 부모 형제 등에게 복을 가져다준다는 사상, 이른바 회향사상의 등장이다. 또 ‘모든 부처님에게 공양하기 위해서’라는 어구는 당시에 나타난 불타관의 변화를 볼 수 있다.
물론 이때 불탑신앙자들이 모두 재가불교신도라는 말은 아니라고 하였다. 바르후뜨의 불탑교단의 명문에 나탄난 것에 따르면 출가자와 재가자의 비율은 대략 1:2이다. 그리고 재가신도들의 사회층은 상공업자에 종사하는 자가 가장 많다. 이러한 사실은 기노야 박사에 따르면, 시기적으로 주요 부분이 성립된 것이 서력 후 1세기 무렵으로 추정되는 <법화경>에 나타난 신시대의 불교신도 집단은 부처님의 유골을 중심으로 숭배하는 불탑신앙에 의해 모인 재가신도의 집단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그 신도집단의 중심을 이룬 것은 도시의 자산가(gṛhapati, 거사), 곧 많은 자산을 보유하고 브라흐만 계급이나 끄샤뜨리야 계급에 버금가는 사회적 지위를 지니면서 중산층 이상의 사회계급에 속하는 도시의 자산가 또는 상인이다.
2) 경전신앙운동
대승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소품반야경>을 지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법사(dharma-bhāṇaka)라고 부른다. <법화경>에도 이런 법사가 등장한다. 거기서는 법화경을 수지, 독송, 해설하는 사람을 ‘법사’라 부르고, 모든 세간 사람들이 존경해야 하는 ‘여래의 사자’이며, 대보살이라 불러야 할 사람이이고, 여래와 같이 보고 공경해야 할 존재이고, 이 법사에게 사사해야 빨리 보살도를 완성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법사는 다시 <대품반야경>, <대보적경>의 가섭품, <화엄경>의 십지품 등에도 등장한다. <소품반야경>에 보면, 이들은 재가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법사들은 새로운 법의 가치를 강조하며 그것에 대한 성실한 신앙과 공양을 설한다. 그것은 경전 또는 경권으로 성문화되고 있었으므로 경전의 독송과 서사를 장려하여 사사된 경전을 안치하고 그것에 향과 꽃을 공양하는 것이 공덕이 뛰어남을 강조하였다.
여기서는 <대품반야경>에 나타난 경전공양에 대해서 보기로 한다. 반야경은 대승불교에서 가장 먼저 성립한 것으로서 대승불교를 일으키는 경전이다. 또한 반야경은 반야바라밀을 향한 신앙심이다. 대품반야경에서 말하는 신앙은 두 가지, 반야경의 신앙과 반야경을 향한 신앙이다. 반야경의 신앙은 경에서 설한 내용대로 행동하는 신앙이고, 반야경을 향한 신앙은 경전 그 자체가 신앙이 되는 것이다. 이 글에서 다루는 것은 후자이다. 반야바라밀의 신앙은 선남자, 선여인이 반야바라밀을 기억하지도 않고 읽지도 않으며 염송도 하지 않고 설하지도 않으며 바르게 사유하지도 않는다 하더라도 반야바라밀경을 책으로 만들어 집에서 공양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품반야경에 나타나 있는 신앙, 곧 대품반야경의 신앙이면서 동시에 대품반야경을 향한 신앙이다.
먼저 반야바라밀 또는 반야바라밀경을 공양한다는 것은 반야경을 예배하고 공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야바라밀경을 공양한다’는 것은 일종의 신앙행위이다. 예컨대 상제보살이 반야바라밀경을 공양하듯이 자기 자신이 직접 경전을 서사하면 더욱 좋겠지만 자신이 직접 서사하지 않았더라도 경전을 구하거나 경전이 안치되어 있는 곳에서 신앙적인 행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야경에서 반야바라밀경을 공양하는 주체는 선남자, 선여인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반야바라밀경을 공양하면 현세의 이익뿐만 아니라 후세의 공덕도 있다고 설한다. 반야바라밀의 공양에 의해 얻게 되는 현세이익은 인간생활 전반에 걸친 좌절로부터의 극복과 순조로운 생활의 희구를 도모하는 것임을 볼 수 있다.

“반야바라밀은 무상의 지혜이고, 제불의 어머니여서 모든 법보 가운데 최고의 보배이다. 만약에 사람들이 들은 대로 일심으로 (반야바라밀을) 믿고 받아 지니고 공양한다면 어찌 현세와 미래의 공덕을 얻지 않을 것인가.”

또 반야바라밀을 듣고 염송하며 공양하면 “아누따라삼약삼보리를 얻어 법륜을 굴리고 소원을 만족하여 무여열반에 든다. 교시가여,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후세공덕이라고 한다.”고 하여 후세에 성불할 수 있다고 설한다.
따라서 반야바라밀의 경전공양은 반야경을 붓다의 사리와 마찬가지로 예배의 대상으로 꽃이나 향 등을 바쳐서 예배하고 공양하는 신앙불교이다. 신앙형태로서는 불탑신앙과 마찬가지로 되어 있지만, 사상적으로는 불탑공양에 의한 공덕보다도 경전공양의 공덕이 불탑신앙의 공덕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많으며, 신앙의 대상이 불탑이 아니라 경전이 된 것이다.

3) 근현대의 재가불교운동
하르샤 왕의 통치 기간(606~647)에 인도의 불교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12세기까지 불교는 서서히 쇠퇴해 갔다. 그 동안 나란다대학과 많은 불교사원들이 무슬림에 의해 파괴되었고, 승려들과 학자들은 티베트, 미얀마와 캄보디아로 흩어졌다. 그 후 인도불교는 현대 인도의 불교가 부활하는 19세기까지 암흑기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인도불교의 쇠퇴는 인도에서 불교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엘리트층의 마음에서만 사라졌을 뿐, 오릿사, 비하르, 아쌈, 벵갈의 외딴 지역(치타곤 등)과 히말라야 오지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타 다른 지역에서는 외국인들에 의한 유적 발굴과 불교관련 출판물들을 초석으로 불교가 부활되었다. 그러나 인도불교의 부활은 신지학회(Theosophical Society)와 그 학회의 많은 영향을 다르마빨라(Anagārika Dharmapāla, 1864~1933)의 불교 활동에서 시작된다.

⑴ 암베드까르 이전의 재가불교운동
근대 인도불교의 부흥의 1차적인 배경은 영국군 장교였던 알렉산더 커닝햄(Alaxander Cunningham, 1814~1893)의 유적지 발굴 등과 다르마빨라의 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인도불교의 부흥 자체는 다르마빨라가 인도인들에게 자신들의 불교유산에 대한 관심을 인도인들에게 일깨워준 뒤이다.
다르마빨라는 영국의 에드윈 아놀드(Edwin Arnold, 1832-2922)가 보디가야(Bodhi Gaya)를 방문한 소감이 실린 손상된 마하보디(Mahabodhi) 사원의 증축을 호소하는 영국 잡지의 기사를 일고, 1891년에 보디가야와 사라나트(Saranath)를 방문한다. 그리고 같은 해에 스리랑카에 ‘마하보디협회’(Maha Bodhi Society, 大覺會)를 설립하여 그 동안 힌두교에게 점령당한 보디가야 사원을 반환받고,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그 곳에 국제 불교 고등학교를 세우고자 하였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것은 유렵 선교사와 신지협회의 활동의 영향을 받아 학교를 설립하는 것, 더 나아가서 신불교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례이다.
다르마빨라의 이러한 일련의 활동에 힘입어 현대 인도불교의 부흥에 초석이 마련된다. 그 이후 다르마빨라의 활동과 별도로, 인도불교도협회를 중심으로 재가불교운동에 불을 붙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는 주로 불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특색으로 한다.
먼저 벵갈 지방에서는 하라 쁘라사드 사스뜨리(Hara Prasad Sastri)는 네팔의 산스끄리뜨로 된 불교의 문헌을 연구하였고, 또 사띠쉬 짠드라 비드야부산(Satish Candra Vidyabushan) 박사는 콜롬보에서 승려와 공부한 뒤 1910년에 켈커타(지금의 꼴까다) 대학의 산스끄리뜨 학장이 되어, 진나(Dignāga)와 용수(Nāgārjuna)의 논리학과 불교철학을 가르쳤다. 그리고 1916년에는 인도불교도협회가 설립되어 신불교운동의 기틀이 마련된다.
근대 인도불교의 학문적인 업적을 남긴 사람들 가운데 고아 출신의 다르마난다 코삼비(Dharmananda Kosambi, ?~1948)가 있다. 그는 뿌네와 바라나시에서 산스끄리뜨어를 공부한 뒤에 1902년에 스리랑카로 가서 빠알리어를 공부하고 인도로 돌아와서 뭄바이 대학에서 빠알리어를 가르치고, 뿌네의 퍼거슨 대학에 불교학 도입하였다. 그는 또한 간디가 세운 구자라뜨 국립대학에서 불교를 가르치면서 <바가반 붓다(Bhagavan Buddha)> 등의 책을 썼는데, 이 책이 암베드까르가 붓다의 생애를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또 마하보디협회를 지지하고 인도독립에 앞장섰으며, 인도대학에 불교학연구를 도입했고, 일반인들에게 불교를 가르쳤다. 그는 불가촉민들에게 불교를 가르치기 위해서 뭄바이의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곳에 아쉬람을 설립하고 불가촉민들에게 불교를 가르치다가 생애를 마감하였다.
코삼비 말고도 1920년에 힌두교(‘이자와’라 부르는 하위 카스트 출신)에서 불교로 개종한 C. 끄리슈난(Krishnan)은 주로 하층계급들의 모임인 께랄라 불교도협회(Kerala Buddhist Association)의 회장에 선출되어 카스트 제도에서 소외받는 하층민들과 힌두사회에서 그들이 받는 신분적 차별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을 위한 교육에 힘썼다. 끄리슈난은 스리랑카에서 온 승려들과 함께 께랄라 대중들에게 불교를 가르쳤고, 1928년 12월에는 켈커타(지금의 꼴까다)에서 300명의 대표들이 참석하는 제1회 전국불교도대회를 개최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신불교운동은 힌두의 하층민들의 불교개종을 잇달아 일어나게 하는 동인이 되고, 20세기에 들어 인도인들에게 불교가 새롭게 인식되는 계기가 된다. 1920년대부터는 인도의 각 대학들이, 인도철학에서 불교학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불교의 학문적 중흥의 발판이 되었다.
이러한 신불교운동은 주로 불가촉민의 지도급 인사들이었고, 그들은 사회개혁에 관심을 가진 자들이 많다. 그 중에서 비탈 람지 신데(Vithal Ramji Shinde)는 마하라스뜨라 주에서 여성평등과 하층민의 교육의 기회균등을 위한 사회개혁의 활동가이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하층민 출신으로서 힌두에서 불교로 개종하여 사회개혁을 주도했던 인물은 암베드까르이다.

⑵ 암베드까르의 불교에의 귀의과 신불교운동
B. R. 암베드까르는 불가촉민에 속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힌두사회에서 겪은 가혹한 차별대우기 마침내 불교로 귀의하게 된 동기로 작용했다. 그의 관심은 인도불교의 부활과 현대 인도의 개혁에 있었다. 그의 사회개혁운동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불가촉민을 위한 19세기의 노력 위에 이미 이루어진 것들이다.
그가 힌두에서 불교로 귀의한 해는 1956년이다. 그러나 그가 불가촉민들과 함께 힌두교를 포기하기로 공식적으로 선언을 한 해는 1935년이고, 그 선언을 ‘욜라선언’이라 부른다. 그는 1935년 10월 13일 나시끄(Nasik)에 있는 욜라(Yeola) 1만 명이 넘는 불가촉민 군중 앞에서 “나는 불행하게도 힌두의 불가촉민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천민으로서 무시당하는 굴욕적인 상황에서 살기를 거부하는 것은 내 능력 안에 있습니다. 나는 그대들 앞에서 엄숙하게 선언하는데, 나는 힌두로서는 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암베드까르가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힌두교를 버리고 불교로 귀의한 이유는 무엇일까? ‘불교의 카스트의 거부와 합리성 그리고 자비의 가르침을 지적했다. 또한 불교가 지배했던 아쇼까 왕 시대를 인도의 황금기로 지적했고, 인도가 독립했을 때 인도가 국가적 상징을 통해 아쇼까의 불교로 돌아왔다고 말한다.’
암베드까르는 붓다의 가르침이 “붓다는 비폭력만 말한 것이 아니다. ..... 종교의 일부로서 사회적 자유, 지성적 자유, 경제적 자유, 정치적 자유를 가르쳤다. 그리고 그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등뿐만 아니라 남자와 여자 사이의 평등을 가르쳤다.”고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1950년 부처님 오신 날에 뉴델리에서 행한 연설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연설에서 ‘붓다의 가르침은 인간의 도덕성에 기초를 두고 있고, 자유와 평등에 기초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같은 해에 세계불교도대회에 참석차 스리랑카에서 한 “인도에서의 불교의 흥기와 쇠퇴에 대하여”라는 연설에서 “나는 불가촉민에게 불교의 가르침 이외에는 해방의 길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불교는 겉으로는 인도에서 소멸했으나 정신적인 힘은 여전히 남아 있다.”라고 하며 스리랑카 거주하는 힌두의 불가촉민들에게 불교에 귀의할 것을 권했다.
그는 1955년 인도불교도협회를 창립하고, 1956년 부처님 오신 날에 그해 10월에 불교로 귀의할 것을 발표한다. 1956년 10월 14일에 마드야쁘라데쉬(Madhya Pradeshi) 주의 나그뿌르(Nagpur)에서 불교에의 귀의의식이 열리기 전 날 밤에 암베드까르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의 불교는 붓다 자신에 의해 가르쳐진 불교로 대승․소승 이전의 것이다. 예전에 나는 간디에게 개종할 때가 오면 우리나라에서 해악이 적은 방법으로 개종한다고 말했다. 불교도 인도문화의 일부이다. 나는 이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손상하지 않는 방법을 선택하려고 마음먹었다. 오늘 이후 10년 내지 15년 사이에 집단개종의 물결이 전 인도에 퍼져 나갈 것이다. 그래서 인도는 불교국이 되고 브라흐만은 맨 마지막으로 개종하는 자가 될 것이다.”

이때만 해도 암베드까르를 따르는 자들 사이에는 개종을 주저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던 것 으로 보인다. 그들은 개종함으로서 불가촉민 해방운동이 분열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고, 또한 불가촉민에게만 주어지는 의회의 보류의석, 관직 우선 채용, 장학금 등의 특권을 잃을까 해서 걱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키기라도 하듯이 개종식이 있는 날 아침에 흰 옷을 걸친 30만 명(일설에는 50만 명 또는 60만 명이라고도 함)이 “바바 사헤브(Baba Saheb)가 부르셨다. 누구든지 불교를 받아들이자. 하늘을 감동시키고, 땅을 감동시키자! 불교로 돌아가서 새롭게 살자!”를 외쳐댔다. 암베드까르는 인도의 최고 승려 찬드라마니(Chandramani) 장로와 4명의 비구, 그리고 초대된 비구들과 함께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의식을 거행하고, 5계를 주자, 암베드까르는 마라띠어로 복창하였다. 5계에 이어서 암베드까르 자신이 준비해온 22가지 서약을 선포했다. 주요 골자는 이렇다. ‘힌두의 신들과 여신들을 믿지 않고, 그들에게 절하지 않으며, 붓다를 비슈누의 화신으로 여기지 않고, 죽은 자를 위해 힌두의례를 행하지 않을 것이며, 종교의례를 위해 브라흐만을 초대하지 않을 것이고, 붓다가 보여준 길을 걸어갈 것 등’이다.
그러나 암베드까르는 아쉽게도 1956년에 불교에의 귀의를 한 지 40여 일만에 죽고 만다. 그래서 그가 희망하고 기대했던 인도의 불교부흥은 많은 부분에서 오늘날에도 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그래도 인도불교의 부흥에 암베드까르가 남긴 영향은 강력했다. 암베드까르가 인도불교의 부흥을 위해 남긴 유산은 그가 창립한 세 기관에서 잘 드러난다. ‘민중교육협회’, ‘인도불교도협회’, 그리고 ‘인도공화당’이 그것이다. ‘인도교육협회’는 암베드까르의 지도 아래 1946년 소외계층의 교육을 육성하기 위해 싯다르타 대학을 설립했고, 도 아우랑가바드에 밀린다 대학을, 이외에 소외계층을 위한 9개 대학과 19개 숙박소를 지었다. ‘인도불교도협회’는 대중들에게 붓다의 길을 알려주고자 그 지역 불교신도들이 사원을 건립하고, 공부모임을 유지하였다.


4. 맺는 말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도에서 재가불교운동은 부파불교의 교단구성원과 신행에 비판을 하면서 새롭게 일어난 불교운동이다. 그 기원은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남인도, 서북인, 동인도 등에서 일어났다. 그 이유로는 불교 외적으로는 힌두교의 박띠신앙과 내적으로는 서북인도에서 이민족의 빈번한 침략과 부파불교교단의 신행에 대한 비판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 기원은 앞의 이유 때문에 민중들의 고통과 애환을 달래주는 의지처에서 찾았는데 그것이 붓다에 대한 그리움, 곧 그의 유골을 안치한 사리공양, 불탑공양운동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경전이 성립하면서 그 경전에 대한 공양하는 신앙이 불탑신앙을 대신하게 된 것을 보았다. 이것은 대승불교는 경전의 제작과 함께 성립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학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시대가 흐르면서 초기의 재가신도 중심의 불교에서 재가와 출가가 공존하다가 후대에 이르면 출가중심으로 되돌아갔지만 자료의 한계와 발표자의 능력의 부족으로 그 이후의 재가불교운동은 살펴볼 수 없었다.
그리고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서양 사람들 통해 인도인들이 불교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게 된다. 그것을 계기로 스리랑카에서부터 불교부활운동이 시작된다. 그때 중요한 인물이 다르마빨라이다. 그러나 그는 재가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논외로 하였다. 그리고 그의 운동의 영향을 받아 인도에서도 불교에 대한 재인식이 일어나면서 주로 학문적인 면에서 재가자들, 특히 힌두에서 개종한 사람들을 통해서 불교를 연구하고 대중들, 특히 불가촉민들에게 불교를 전하기 시작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암베드까르이다.
그는 근현대의 불교운동의 중심인물인데 이 글에서는 그의 불교에의 귀의과정과 불가촉민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권익보호라는 면에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불교로 귀의하고 나서 얼마 안 있어 타계하고 만다. 그래서 현대에서 인도의 재가불교운동은 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이 말은 그가 공언했던 브라흐만까지 불교로의 개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미완의 운동이지만, 그래도 그의 불교운동의 성과는 그가 조직한 단체를 중심으로 미약하지만 진행 중에 있음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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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제7회 학술대회
한국재가불교운동의 현황과 과제 /
일시 2009년 5월 30일(토) 오후 1시~6시
장소 부산대학교 성학관 1층 102호
주최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부산대 철학과
주관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부산불교지도자포럼
후원 범어사, 여여선원, 안국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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