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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올린 게시글: 2015-08-29, (토) 3:23 am 

가입일: 2015-01-01, (목) 10:13 am
전체글: 205
<1>
세계의 기원을 빅뱅으로 상정함으로써 세계관을 정립한 과학자들은 다양한 관점과 이론체계를 원용하여 새롭게 세계를 이끌었다. 과학자들은 (1)세계를 새롭게 이끌 수 있는 이론(paradigm)을 정립하고, (2)정립된 패러다임과 같은 맥락에서 사회를 리드하는 메카니즘, 즉 다양한 과학적 학문체제를 만들었다. 새로운 학문체제는 3세기 동안 과학문명을 향도해 왔다.

18세기 이후 인류의 삶을 향도한 이론과 논리체계의 근원에는 세계의 기원은 물론 자연과 환경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자연과 환경을 성찰한 과학자들은 전체와 부분, 세계(世界)와 존재(存在)간의 커넥션을 관조한 연후에 이론을 체계화했을 것이다. 때문에 세계와 존재, 전체와 부분에 관한 이론은 자연과 환경을 직시한 과학자들의 머리로 산출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전체와 부분을 보는 관점의 기저(基底)에는 과학자의 눈으로 성찰한 자연과 환경의 영향이 깊게 작용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전체와 부분에 연관된 일체의 이론은 자연과 환경의 변환(變換)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말이다.

(1)중국의 거대한 평원을 바라보며 공자(孔子)가 전체와 부분의 연관성을 성찰한 내용과 (2)아제르바이잔 카스피해의 경관을 앞에 하고 서서 차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가 자연과 자신의 연관성을 성찰한 내용과 (3)지중해 연안의 아테네에서 전체와 부분의 연관성을 보았던 플라톤의 관점과 (4)카이사르가 로마의 고대 도시를 앞에 하고 서서 세계와 자신의 연관성을 성찰한 내용이 동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공자의 이기론(理氣論)을 기저로 한 유교,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는 짜라투스트라의 관점에 기저를 둔 자이나교,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서는 플라톤의 원자론(原子論)이 등장하여 세계의 기원은 물론 전체와 부분의 연관성을 언급했다. 그러나 원자론, 이기론, 창조론과 같은 이론체계들은 모두 고대에 등장한 이론이다.

우리는 자연과 환경에 기저를 두고 출발한 이론과 논리체계를 검증할 때, 15세기 이전과 16세기 이후를 구별하여 이야기를 전개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16세기까지는 전과학시대(前科學時代)에 예속되며, 17세기부터 과학시대(科學時代)에 편입되기 때문이다.

인류는 16세기부터 전근대적 사고방식(前近代的思考方式)을 청산하고,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전환하여 자연환경과 국지적이며 문화적 배경을 고려한 <삶의 세계>를 창안 했다. 미개했던 시대에는 미개한 관점과 논리를 취택하여 <삶의 세계>를 설명했으리라고 보지만,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세계를 다시 열었을 때는 열린 그만큼의 새로운 관점과 논리를 원용하여 <삶의 세계>를 체계화했다. 따라서 17세기부터 인류의 노력으로 이론과 논리체계를 재정립한 <삶의 세계>는 17세기 이전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를 들어서 말한다면, 있는 그대로의 지구는 초속 28km로 태양의 궤도를 달려가고 있다. 초속이 28km라면, 시속이 얼마나 되는가? 지구의 시속은 무려 100800km나 된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말한다면 우리는 거대한 지구라고 하는 별에 앉아서 매시간 100800km를 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삶의 세계>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의 정황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지구의 시속이 얼마인지, 이 거대한 땅덩어리가 왜 100800km나 되는 고속으로 달려가는지 전혀 모르고 사는 것이다.

문화의 발전을 지향했던 현인들의 머리에 들어온 관점과 이론은 수없이 다양했겠지만, 실질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이론은 그렇게 많지 않은 듯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론, 다시 말하면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아닌, 인간의 관점과 논리를 통해 개념적 체제로 정립된 <삶의 세계>에 영향을 끼친 이론은 얼마나 되며, 그 각각의 중핵이 어떠한 내용인가를 숙지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다양한 이론을 모르면, 다양성이 무엇인지 몰라 도그마에 떨어져 무지한 삶으로 가게 될 확률이 높음은 물론 자기가 취택한 세계관만이 가장 고귀한 것이며, 타인이 선택한 세계관은 무가치하다는 망발을 일삼기 쉽다. 대단히 공평하고 평등한 이론의 가치를 공인하지 못하고 어느 하나를 폄훼(貶毁)하는 어리석음을 짓게 되는 것이다.

<2>
최근에 일어난 '가이아가설'을 비롯하여 13종에 이르는 세계를 보는 관점과 논리(論理)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가이아가설(Gaia hypothesis): 영국 과학자 J.러브록이 언급한 이론.
②양자론(量子論): M,플랑크의 양자가설을 기초로 하여 정립된 이론.
③유기체론(有機體論): 화이트헤드가 언급한 이론.
④불확정성원리(不確定性原理): 하이젠베르크가 밝힌 이론
⑤시스템이론: 프리죠프 카프라가 주장하는 이론
⑥이원론: 세계는 정신과 물질로 형성되었다는 데카르트의 이론.

⑦환원론(還元論): 서구의 과학자들이 정립한 이론.
⑧기계론(機械論): 서구의 과학자들이 정립한 이론.
⑨진화론(進化論): 다윈이 주장한 이론.

⑩창조론(創造論): 기독교의 세계관.
⑪원자론(原子論): 그리스 철학자들이 주장한 이론.
⑫이기론(理氣論): 유교의 세계
⑬중연화합생기론(衆緣和合生起論): 불교의 세계관

이상 언급한 이론체계 중에서 16세기 이전에 있었던 것은 원자론, 이기론, 중연화합생기론, 창조론에 불과하다. 그러나 17세기 이후에 등장한 이론체계는 아주 다양하다. 다시 말하면, 고대의 이론체계에 비해 17세기 이후 근대에 나타난 이론체계가 매우 다양 하다는 말이다. 17세기 이후에 등장한 이론 가운데 환원론과 기계론이 큰 영향력을 발휘하여 사회를 이끌어 나가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세계>, 즉 우리가 살아가는 현장에는 다양한 관점을 갖춘 이론(理論)이 있지만, 이들 각각이 완전무결하게 전체(世界)와 부분(存在)의 히든커넥션을 조명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의 이론체계가 완전무결(完全無缺)하다면, 이토록 서로 다른 관점과 논리가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이론이 사실무근한 것도 아니요 터무니없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일리는 있지만, 전체와 부분, 세계와 존재를 모두 포괄하는 깊고 넓은 완전무결한 이론은 못 된다는 뜻이다.

고대에 있어서, 이론정립의 근거를 제공하는 세계의 기원에 관한 거시적 안목은 자연환경의 포괄적 변환과 국지적 변환을 인간의 눈으로 엄밀하게 관찰하지 못했다. 이론의 기원을 제공하는 자연환경이 국지마다 상이했었기 때문에 각 지역에서 발생하는 변환을 엄밀하게 성찰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체계화한 이론의 근저에는 우주적 차원에서 전관적(全觀的)이며 통시적(通時的)인 눈으로 직시할 수 없는 지역적 특성으로 있었기에, 관점 그 자체가 국지적 관점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운 취약점을 내포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들 이론이 전관적 통시적 관점을 원용한 이론은 아니더라도 국지적 환경과 각 민족의 문화를 잉태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도 폄훼하거나 소홀하게 취급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3>
어떻든,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세계>는 신(神)이 만든 세계는 아니다. 사람이 세운 <세계의 기원>과 <이론체계>를 믿고 의지하면서 삶을 살고 있다. 사람이 밝힌 세계의 기원과 이론체계는 우리 육안으로만 직시할 수 있는 것에 한하여 근거를 두고 있지 않다. 사람이 만든 <세계의 기원>과 <이론체계>는 인간의 정신과 영혼에 근거를 두고 <상정된 세계>이기에 그렇다. 인간의 정신에 근거한 <세계의 기원>과 <이론체계>에 의지해서 재구성되어진 세계가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세계>이다. 따라서 사람이 만들어 나가는 삶의 세계의 <말>은 인간이 상정한 <삶의 세계>에 뿌리를 내리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삶의 세계>에 있어서 <말>이라고 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있어서 설명되는 <말>과는 다르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 달리, 인간의 정신과 영혼에 근거를 둔 <세계의 기원>과 <이론체계>에 의존하여 재구성된 <삶의 세계>에서의 <말>은 대단히 존귀하다. 그 말은 대단히 존귀한 <말>이지만, 사람이 하는 말에는 적용성의 한계라는 결함이 내포되어 있다. 그 어떠한 인간의 <말>일지라도 그 <말>의 내면에는 <적용성의 한계>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하는 <말>의 내면에는 불확실한 <세계의 기원>과 <어림셈>이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의 <말>이 세계의 확실한 기원에 뿌리를 내리고, 시대와 역사의 변천에 영향을 받지 않는, 다시 말하면 적용성의 한계를 지니지 않은 <완전한 참>이었다면, 16세기 이전의 이기론, 원자론, 중연화합생기론, 창조론으로 세계와 존재, 전체와 부분을 남김없이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어떤 이론을 원용하더라도 전체와 부분의 히든커넥션을 완전하게 설명하지 못하도록 구조 지워져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세계관이 수없이 등장했던 것이다. <완성된 참>에 접근이 안 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말>은 적용성의 한계를 지니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말>에 기저를 둔 <삶의 세계>의 <진리>라고 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의 <진리>와 거리가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삶의 세계>에서 준용되고 있는 <진리>, 즉 <적용성의 한계를 가진 진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세계>의 <진리>를 파악하지 못한 입장에서는, 사람의 관점과 이론체계에 의존된 <어림셈>의 지속적 반복을 경유하여 <진리>로 <진리>로 접근해 나갈 수밖에 없다.

만물제관(萬物齊觀)에 뜻을 둔 사람들이, <어림셈>의 지속적 반복을 경유하여 <진리>를 향해 다가갈 수밖에 없다는 입장에 서서 살펴볼 때, <모든 이론에는 적용성의 한계가 내포되어 있다>는 하이젠베르크의 말이나, <누구나 틀릴 수 있다>는 아인슈타인의 말은 타당하며 매우 적절한 지적이 된다.

사람의 관점과 논리에 의존된 <삶의 세계>는 시시각각 움직여 나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또 의식해야 한다. 사람의 관점과 논리가 한 지점에 정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 변화를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관점과 논리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례를 하나 들면, 다음과 같다.

발전주의가 세계의 역사를 쥐고 흔들던 1972년에 <로마클럽>은 당시의 논리와 정황에 반대되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로마클럽>은 1972년, 문명세계의 앞날에 관한 중요한 메시지를 발표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발전 가능한 세계>와 <발전 불가능한 세계>로 나누어서 <삶의 세계>를 설명한 후에, 우리가 지속적인 <발전 가능한 세계>로 나가려면 <성장의 속도를 줄이자>는 표명이었다. 이 메시지의 표제가 <성장의 한계>이었다.

오늘의 세계를 살아가는 인류가 계속해서 발전주의와 역사주의를 기치로 하여 자연 착취를 반복하고, 경제를 일으키고, 생산을 확충하는 일을 경쟁적으로 반복한다면 <생태계>가 파괴되고 지구가 병들어 더 이상 <삶의 세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는 메시지였다.

1972년에 로마클럽의 메시지를 접한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은 <성장의 한계>를 무시한 채 발전주의를 더욱 힘차게 외쳤다. <성장의 한계>따위는 일별(一瞥)도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발전주의를 높이 들고 앞으로만 나갔다.

그러나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지구의 미래를 위하여,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하여 이산화탄소의 배출량을 줄이고 발전의 속도를 늦추자는 로마클럽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 로마클럽의 메시지에 반기를 들었던 인류가 불과 30년 뒤에 전폭적으로 지지를 보내고 있는 사례를 지켜보노라면, 사람의 관점과 논리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도 의식하게 된다.

<4>
우리는 1972년에 로마클럽이 발표한 <성장의 한계>를 읽지 못했다. 대량 생산을 위하여 거대한 공장을 짓고,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제품을 생산하고, 규범을 바꾸고, 법을 개정하고, 서구문화를 수용하면서 국민소득을 올리려고 애를 썼다. 100년 전과 다름없이 변법개조(變法改造)와 전반서화(全般西化)에 매달려 살았다.

속된 표현으로 근대화와 서구화를 마구 섞어 비빔밥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빨리빨리 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서구사회에서 300여 년이나 소요된 근대화를 단시일에 감행하느라 이것저것 살필 겨를이 없었다. 로마클럽에서 발표한 <성장의 한계>는 물론이요 <발전이 가능한 세계>라는 메시지가 우리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성장의 한계>, <발전 가능한 세계>라는 표제가 우리 사회에 알려지게 된 시기는 우리 내부에서 지속가능위원회가 만들어질 무렵인 2002년경으로 알고 있다.

30년 전에 세계를 흔들었던 메시지를 30년이 지나서 읽게 된다는 것은 안타까운 노릇이다. 국제화와 세계화를 통해서 개념이 동일한 <삶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마당에, <우리의 삶의 세계>는 30년가량 늦다는 것을 우리는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오늘도 예전과 같은 정황에 놓여 있다. 60년 전에 서구화를 단행하여 서구인들과 동일한 개념을 갖추고 21세기의 <삶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데, 우리는 <21세기 세계 질서 재편의 핵심적 변수>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누구도 21세기 세계 질서 재편의 핵심적 변수가 무엇이 될 것인가를 지적하지 않고 있다.

<성장의 한계>가 발표되었을 당시에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정황과 동일한 모습이다. 1972년에 <성장의 한계>라는 메시지를 모르고 살았던 것과 다름없이 2010년에도 <21세기 세계 질서 재편의 핵심적 변수>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같은 패러다임으로 열어나가는 <삶의 세계>에서 66억이나 되는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는데 왜 우리는 모르는 것이 이처럼 많은지 알 수 없다.
우리 눈앞에서 진행되고 있는 <삶의 세계>, 다시 말하면 <과정적 삶의 세계>에 관하여 우리는 명확한 개념을 확정짓지 못하고 있다. <과정적 삶의 세계>란 한 과정 한 과정마다 각각 다른 매듭으로 삶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일진대, 매듭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을 서로 미워하고 질타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5>
첫 매듭을 딛고 일어서서 두 번째 매듭을 형성해 내지 못한 채 주저앉거나 쉬어버리면 안 되는 세계가 <과정적 삶의 세계>이다. 그것은 마치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일학년이 되면 그것으로 그만이 아니라 2학년, 3학년, 4학년, 5학년, 6학년 과정으로 변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또,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면 그것으로 그만인가. 아니다. 중학교 과정, 고등학교 과정, 대학교 과정, 석사과정, 박사과정, 취직하여 열심히 일하는 과정, 결혼해서 2세를 얻은 다음 자신의 성장과정과 동일하게 아이를 양육하는 과정, 가정교육을 시키는 중년의 과정, 완숙한 장년의 과정, 노년의 과정 등등을 거쳐 가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에게 다가오는 모든 과정 과정을 필하면서 독립된 매듭을 짓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우리 인생에 주어지는 <과정의 진행>을 중도에서 멈추거나 포기할 수 없다. 인간은 과정을 무시하거나 그만둘 수도 없다. 그러므로 과정 과정마다 확실한 매듭을 짓고 다음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과정으로 넘어가지 못하면 인생 전체의 성립은 중단된다.

과정적 삶의 세계에 한번 참여한 사람은 세계를 리드하는 패러다임에 따라서 과정 과정을 충실하게 경영해야 한다.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모든 과정을 충실하게 보내는 일에 동참하여 인생을 완결해야 한다.

우리가 삶의 질을 향상한다는 말은, 따지고 보면 <과정적 삶의 세계>를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면 이룩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우리 앞에 놓인 <삶의 세계>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는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16세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관점의 논리화>를 통해서 직조하듯 재구성하고, 이론적으로 체계를 세워서 성숙시켜 나온 세계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두뇌를 동원해서 만든 <체계화된 삶의 세계>이다. 우리 앞에 놓인 세상은 300년 동안 인류가 만들어 나온 <체계화한 삶의 세계>이지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16세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관점의 논리화>를 통해서 직조하듯 재구성하고, 이론적으로 체계를 세워서 성숙시켜 나온 <삶의 세계>를 무시할 수는 없다.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된 <삶의 세계>를 이끌고 나가는 관점과 논리를 따르지 않으면 길을 잃은 미아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삶의 세계에서 미아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삶의 세계>가 어떤 세계인가를 구체적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세계를 구체적으로 알아야 자기의 영혼을 성숙시키게 될 것이며, 자녀들의 교육을 제대로 시키게 되리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알기 위하여 노력해야 하지만, 역학체계에 의한 <부분의 패러다임>과 <인간중심주의>를 주축으로 해서 구조와 운행원리를 갖춘 <체계화된 삶의 세계>를 철저하게 파악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체계화된 삶의 세계를 알지 못하면 오늘의 인생을 영위하기가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

<6>
발견과 발명으로 조성된 인류 문명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인류는 뛰어난 두뇌를 원용하여 세계를 설명했으며, 자유로운 손을 활용하여 삶에 필요한 도구를 만들었고, 멀리 보는 눈을 원용하여 미래를 준비하는 비전을 상정했다.

자연의 질서에 호기심을 가진 인류는 우연과 필연이 교차하는 가운데 창의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발명해냈다.

인류 역사의 출발과 발전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46억 년 전 빅뱅으로 지구 탄생
□인류의 출현
□농경시대- 석기,청동기,철기를 사용
□105년 종이 발명
□이슬람- 화학, 인쇄술, 나침판 발명
□1543년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1686년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
□산업혁명
◐1712년 증기기관
◐1769년 자동차
◐1858년 다윈의 진화론
◐1881년 전기 상용화
◐1903년 비행기
◐1928년 페니실린
◐1948년 반도체
◐1957년 인공위성
◐1969년 인터넷
□지식정보화 추진
◐2001년 인간유전자 지도완성
*지혜와 감성의 시대

인류 문명은 고대와 중세에는 평행선을 그으며 농경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증기기관의 발명과 산업혁명을 전기로 하여 급진적인 과학문명을 일으켰다.

<7>
21세기부터 세계화와 지식정보화를 지향하는 동시에, 개방화와 자유화를 추진하는 데에 긴요한 지혜와 감성을 중시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지식을 중시해 나왔지만 앞으로는 마음과 지혜를 중요한 가치로 상정하고 있다.

특히 여성의 능력과 여성의 힘을 비롯하여, 여성의 두뇌를 활용할 수 있는 길을 열게 될 것이다.
자본이나 상품 혹은 인력을 중요한 재료로 상정하는 동시에 인간을 중시하는 경영으로 전환하게 될 것이다.

21세기로 들어선 후 지난 10년 동안 많은 사람들은 세계 1등 기술과 1등 산업을 구축하는 동시에, 스포츠와 문화 예술에도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글로벌기업(다국적기업, 친환경, 사회공헌, 윤리경영)
‣무형자산의 증가- 정보, 기술, 마케팅, 브랜드
‣전문성, 다양성, 창의성-인재, 속도, 국제화
‣과학기술- 사회, 문화에 영향

<2015.8.28> 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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