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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글 제목: '진아와 연기아'
전체글올린 게시글: 2015-03-14, (토) 3:48 am 

가입일: 2015-01-01, (목) 10:13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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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반가사유상의 사유-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9
불교닷컴 강병균 교수 2014년 07월 29일

요즈음 우리 불교계에는 ‘참나’니 ‘진아(眞我)’니 하는 괴이한 용어가 돌아다닌다. 우리 불교계가 불경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기상천외(奇想天外)한 말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사람 저사람, 승속(僧俗)을 가리지 않고 마구 사용한다. 이 말을 입에 올릴 때면,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그 어떤 물건을 아는 듯, 얻은 듯, 묘하고 엄숙한 표정을 짓는다(그 표정은 과연 진아가 짓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종정(宗正) 스님조차도 이 말을 애용한다. 급기야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 우주)가 ‘진아’로 꽉차버렸다. 어리석은 자손들의 행동에 분노한 조상님이 관뚜껑을 열어젖히고 벌떡 일어난다더니, 부처님이 무여열반을 무르고 나타나셔서 크게 꾸짖을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말의 정체를 밝히기 위하여 무차대회(無遮大會 승속 남녀노소 빈부귀천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다 같이 모여 마음껏 견해를 밝혀 토론하고 논쟁하는 법회)라도 열어야 할 판이다.
참나는 진아(眞我)라는 한자어의 우리말이다.
이 말은 용수보살의 중관(中觀)에 위배된다. 진(眞)이 성립하려면 가(假)가 먼저 서야 하는데, 진과 가는 서로 의지해 존재하는 유위법의 세계일 뿐이다. 이처럼 서로 의지해서 발생하고 존재하는 세계를 연기(緣起)의 세계라고 하며, 이 연기의 세계는, 모든 물질세계의 근저(根柢)에 있는 소립자의 세계처럼, 잠시도 같은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끝없이 생멸•변화한다. (타들어갈 정도로 뜨거운 방바닥 위에서 폴짝폴짝 발을 뛰고 있는 사람들을 멀리서 창을 통해 보면, 마치 춤을 추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소립자가 발이요 춤이 물질이다.) 그리고 어느덧 힘이 다해서, 모여 서로 의지하던 것들이 흩어지면 사물과 현상은 사라진다.

사물의 견고성은 사물을 경험하는 ‘우리 의식의 거칢’에서 발생하는 환상이다. 변화량이 100년에 1cm나 1g을 넘지 못하는 변화를, 센티미터 단위나 그램 단위밖에 측정하지 못하는 거친 측정기구로 측정을 하면, 마치 아무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우리 의식은 그처럼 거친 측정•관측도구이다.
물리학적인 측정도구는 상상을 초월하는 정밀성을 지닌다. 1cm의 백만분의 일의 길이까지, 1그램의 백만분의 일의 무게까지, 그리고 백만분의 일초의 시간까지 측정할 수 있다. 그러면 비로소, 끝없이 생멸변화하는 사물의 가변성을 목격할 수 있다. 우주는, 우리의 자연적인 감각기관으로는 절대로 감지할 수 없는, 백만분의 일초도 머무르지 않는 무서운 변화의 대양(大洋) 위에 떠있는 세계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견고한 세상이다’라는 생각은 환상이다. 하지만, 환상이되, 몹시 ‘자연스러운’ 환상이다.

우리몸은 얼핏 보면 단기적으로는 변하지 않는 것 같지만, 몸(뇌도 포함됨)을 이루고 있는 원자들과 분자들은 끝없이 교체되고 있으며(놀랍게도 반년이면 모두 교체된다. 자동차의 자동차부품을 끝없이 교체해도, 심지어 엔진이나 변속기 같은 핵심부품까지 갈아치워도, 우리는 ‘그 차가 같은 차’라는 ‘정체성에 대한 착각’을 고집스럽게 유지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몸과 마음은 끝없이 교체된다. 섭취하는 음식은 몸에 들어가 살과 뼈 속의 낡은 원자와 분자를 몰아내며, 섭취하는 지식과 감정은 마음을 끝없이 업데이트하고 있다. 음식과 정보 이외에 직접 우리 몸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도 있다. 예를 들어, 피부 원자들과 분자들은 우주공간을 통해 전해지는 빛과 끝없이 상호작용하며 변하고 있다(그러다 잘못되면 피부암이 발생한다).

이러한 몸과 마음의 무아성(無我性 실체가 없음)에 대해서는 초기불경에 단호하고 분명하게 기술되어있다. 지겨울 정도로 반복해서 적혀있다(그만큼 인간이 곰처럼 멍청하고 미련하며, 늙은 염소처럼 완고하고 고집스럽다는 뜻이다. 45년 동안이나, 입에 혓바늘이 돋을 정도로, 같은 말씀을 되풀이하신 부처님의 인내심에 경의를 표한다).

아(我)는 오온(五蘊)이라고 불리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라는 다섯 개 요소들의 무더기일 뿐이라고. 여기서 색은 하드웨어인 육체를, 그리고 수상행식은 정신인 소프트웨어를 나타낸다. 감각기관인 눈, 코, 귀, 혀, 피부, 신경회로는 하드웨어요, 감각작용과 지식의 생성, 저장, 분석, 처리는 소프트웨어이다. 이 수상행식은 육식(六識)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중 의(意)에 해당한다(초기불교에서는 7식이나 8식이 나타나지 않는다).

의(意)에는 크게 다섯 가지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감각기관(안이비설신 이외의 정보획득기관)으로서의 의(意)요, 둘째는 저장기관으로서의 의요, 셋째는 정보처리기능(언어, 논리적 사고, 분석)으로서의 의이며, 넷째는 정보생성기능(통합, 추론 등)으로서의 의이고, 다섯째는 의사결정기능으로서의 의이다.

감각기관으로서의 의(意)는 비물질적인 정보인 타인(사람과 동물)의 마음과 주변상황에 대한 인식, 계절에 따른 기후와 먹이의 변화, 적대적이거나 해로운 생물(뱀 맹수 적)접근의 위험지각 등 비물질적인 정보를 취합하고 받아들이는 기능을 말한다.
저장기관으로서의 의(意)는 취득한 정보를 저장하는 하드웨어로서의 기능이다.
정보처리기능으로서의 의(意)는 정보를 죽은 상태로 놓아두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처리해서 생존과 욕망충족을 도와 삶의 질을 개선하려는 활동이다.
정보생성기능으로서의 의(意)는 주어진 정보로부터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내는 것을 말한다. 특정한 사람의 과거 행동에 대한 정보를 종합하여, ‘저놈이 지금까지 한 행동으로 보아서 분명히 나나 우리 집단에 해를 끼칠 나쁜 놈이다’라는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낸다. 추상적으로는, 이성과 추론의 힘을 이용하여 수학 물리학 화학 천문학 지질학 생물학 의학 등의 자연과학을 통해 얻어지는, 새로운 지식의 생성을 말한다. 피타고라스 정리나 만유인력 법칙의 발견 등이 그 예이다.
마지막으로, 의사결정기능으로서의 의(意)는, 예를 들어, ‘그러므로 위험한 저놈을 피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제거하자’라고 결정을 내리는 기능이다.

의(意)는, 오온(五蘊)으로서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수상행식(受想行識)에 해당하는 기능이다. 여기서 ‘수’는 감각된 대상에 대한 호(好 좋다), 불호(不好 싫다), 무기(無記 좋지도 싫지도 않은 중립상태)를 결정하는 기능이며, ‘상’은 표상하고 생각하는 기능이며, ‘행’은 의지작용이며, ‘식’은 정보 취득, 처리, 생성, 저장기능이다.

색은 물질세계에, 수는 어류의 뇌에, 상은 파충류의 뇌에, 행은 포유류의 뇌에, 그리고 식은 영장류의 뇌에 해당한다. 이것은 정확히 진화의 순서와 일치한다. 그리고 인간의 육체적 구조와도 일치한다. 척추 위에 소뇌•간뇌(파충류의 뇌)가, 그것을 감싸고 변연계(포유류의 뇌)가, 다시 그것을 감싸고 대뇌(영장류의 뇌)가 존재한다. 영장류의 뇌에서 대뇌전전두엽이 발달하면 이마 앞부분의 뇌가 커지면서 앞으로 튀어나옴으로써, 이마가 지면과 수직으로 변한다. 바로 인간의 뇌의 출현이다.

참나니 진아니 하는 주장은 현대 뇌과학에도 위배된다. 뇌과학에 의하면 우리의 의식은 '데카르트의 극장(Cartesian Theater)'도 아니고, 우리의 의식배후에는 그 극장에서 영화를 감상하듯 제현상을 경험하는 '기계속의 유령(ghost in a machine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영혼이다)'도 없으며, 뇌는 신비로운 단일체가 아니라 수많은 모듈들의 모임인 복합체(composite)이다.

부처님의 위대성은 이미 2,500년 전에 명상(우뇌)과 사유(좌뇌)를 통해서, 현대과학이 이제서야 밝히고 있는, 무아(無我)를 깨달으셨다는 점이다. 부처님의 빛나는 통찰은, 제대로 먹지도 않고 숨도 쉬지 않던 6년 고행을 집어치우시고, 니련선하(尼連禪河 Nairanjara) 강변에서 드신 영양가 있는 우유죽 힘으로 보리수 밑에 앉아, 이레 동안 명상과 사유를 하던 마지막 날 새벽, 계명성(啓明星)의 별빛처럼 찾아왔다.

보름날 청명하고 시린 암청색 새벽하늘에, 한줄기 유성처럼 내리꽂히는 통찰을 보라!
아뿔싸, 나란 본시 존재하는 것이 아니구나! 질문을 던진 자와 답을 얻은 자는 같은 자가 아니구나. 이런 생각조차 끝없이 변하는 연기의 산물일 뿐이로구나!
나는 ‘질문을 던지고 구도하는 나’라는 것이 대상에 대한 주관으로서의 ‘불변하는 존재’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구나.
나는 연기의 산물이므로 그래서 천지와 더불어 공히 변하므로, 내가 집착해야 할 고정불변하는 나(我)나 고뇌(苦惱)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구나. 뿐만 아니라 나라는 것은 몸과 의식이라는, 즉 신체와 뇌라는, 다시 말해서 ‘신체기관과 정신기관(하드웨어)’과 ‘신체작용과 정신작용(소프트웨어)’이라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다섯 가지 요소의 연기적이고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구나. (모든 연기적인 현상은 일시적이다.)
35년 동안 내내 질문을 던진 자와 지금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자는 같은 자가 아니구나. 끝없는 의식의 흐름이 있을 뿐이로구나.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음을 얻은 것은 인내력(忍耐力)과 사유력(思惟力)의 덕이라고 고백하셨다. 이 두 힘이 없었으면 설산 6년 고행과 보리수 밑의 7일간 정진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하신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이 두 힘을 기를 것을 권유하신다. 그리하면 무여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고 격려하신다. (증일아함경 화멸품 火滅品)

그러므로 우리 불자들은 주인공이나 진아나 참나와 신비적으로 합일하는 힌두교적인 괴이한 체험을 꿈꿀 것이 아니라, 불법에 대해서 사유하여야 한다. 삼법인, 사성제, 그리고 연기법에 대해서. 비록 힘이 들지라도 인내력으로 밀고나가, 날마다 사유를 해서 부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할 때까지 멈추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수행은 국보 제78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金銅 彌勒 半跏 思惟 像)에 진실하고 아름답게 나타나 있다. 미륵보살이 의자에 앉아 반가부좌를 하고 한쪽 손가락에 턱을 고이고, 깊은 사유(思惟)를 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고인 손은 오른손이다. 오른손은 사유를 담당하는 좌뇌左腦 소관이다.) 진실로 국보를 옳게 대접하는 길은, 그 국보가 행하고 있는 사유(思惟)를 우리도 같이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을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보고 따라 배우라고.) 이것이 바로 육바라밀(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최종목표인 지혜로 가는 길이다. 지혜 바라밀 바로 전의 선정(禪定) 바라밀의 본래 이름이 ‘사유수(思惟修)’임을 유의하시라. 사유수란 ‘마음을 한곳에 모아, 잡념에 의한 어지러움이 없이, 자세히 사유하는 수행’을 뜻한다. 이것은 또한 색계4선정 중에 나타나는 심사(尋伺 심은 거칠고 얕은 사유, 사는 세밀하고 깊은 사유를 뜻한다)에 해당한다.

이런 사유를 통해서 우리의 아(我)가 변하고 진화한다. 아는 연기아(緣起我)이다. 불변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 마음이 깨닫는 것이 아니라, 안팎으로 수없이 상호작용하며 바뀌어 가는 것이 아(我)이다. 그리고 그 과정자체가 바로 우리 마음이고 아(我)이다. 즉, 깨달음이 아(我)가 아니라 깨달아가는 과정이 아(我)이다.

약관 37살에 노벨상을 받은 그리고 불란서 최고 훈장인 레지옹도뇌르 훈장으로 빛나는 천재물리학자 드 브로이(De Broglie)에 의하면 물질도 ‘파동(物質波 matter wave)’이므로 세상은 온통 ‘흐름’일 뿐이다. 그러므로, 아(我 몸과 마음)란 파동아(波動我)이다, 삼천대천세계 우주공간을 채우는 파동이다. 파동으로서의 마음과 몸이 그리고 몸과 몸이 상호작용하고 회통(會通)하고 융합하는 것이 이사무애(理事無礙)이고 사사무애(事事無礙)이다.

그래서 삶은 흐르는 강물이다. 발원지(發源地)는 깨알만 한 샘물이며, 중간에 수많은 지류가 합류하고 탈퇴하고, 강둑을 침식당하고 흙과 자갈이 밀려들어오고, 햇님에게 잡아먹히고 빗물이 살려주고, 입으로 들어가고 오줌으로 나오고, 그 과정에서 가늘어지고 굵어지며 끝없이 변하며 굽이굽이 흘러내리는 강물이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아(我 나)란 무상아(無常我) 또는 연기아(緣起我)이다. 즉, 단일체가 아니라 여러 요소로 이루어진 복합체로서의 ‘나’이다. 그리고 고정불변하는 ‘나’가 아니라, 안팎의 무수한 조건이 영향을 미쳐, 끝없이 변하고 진화하는 ‘나’이다. (나란 발足도 없이 신비로운 영혼의 힘으로 미끄러지듯이 물위를 떠다니는 백조가 아니라, 수면아래서 부지런히 괴상하게 생긴 물갈퀴를 끊임없이 움직이는 미운 오리새끼이다.)

그리고 물질파의 관점에서 보면 아(心身 몸과 마음)란 삼천대천세계를 채우고 흐르는 파동이다, 즉 파동아(波動我)이다. 다른 말로 하면, 아는 존재적인 측면에서는 연기아(緣起我)요, 작용측면에서는 파동아(波動我)이다.

이상(以上)은 잡아함경에 다음과 같은 말로 멋들어지게 그리고 간결하게 표현되어있으며, ‘참나’를 주장하는 이들이 잊지 말아야할 명구(名句)이다.
‘업(業)을 짓는 자도 그리고 업을 받는 자도 없지만 업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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