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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올린 게시글: 2016-08-13, (토) 11:05 pm 

가입일: 2015-01-01, (목) 10:13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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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전자가 윤회하는 알라야식이다
- 고대 불교인들이 1,000억 개 뇌신경세포와 500조 개 뇌신경회로의 존재와 기능을 알았다면 따로 알라야식을 상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 망상책과 망상꾼들을 멀리하면 망상을 벗어날 수 있다

불교는 무아론(無我論)을 주장하지만 윤회론도 주장한다. '무아라면 윤회를 하는 주체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까다로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알라야식이 등장했다. 알라야식은 모든 과거기억을 저장하는 초특대 식(識 의식)이다. (통속적인) 불교에 의하면 모든 생명체는 시간상 시작이 없이 존재해 왔으므로(이런 주장을 부처님이 했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부처님은 ‘우주에 시간적인 시작과 끝이 있느냐’는 질문에 답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즉 무한한 시간을 살아왔으므로, 알라야식의 용량은 사실상 무한대이다. 기억(정보)을 한 생에 또는 일 겁에 한 비트씩만 저장하더라도, 무한 생 또는 무한 겁에 저장되는 양은 무한대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뇌는 유한이므로 무한한 기억을 다 담을 수 없다. 그래서 무한한 과거 생을 다 기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 그 무한한 기억을 저장하는 알라야식은 (만약 있다면) 필연적으로 우리 뇌 밖에 있어야 한다. 일종의 무한용량 클라우드이다. 혹은 과거생 위키피디아이다; 물론 무한히 크다. 수행을 통해서 이 클라우드에 접속하면(밖에 있으므로 이론적으로는 누구나 접속이 가능하여 타인의 전생을 알게 되는 숙명통이 가능하다), 유한한 우리 뇌일지라도, 전생을 다 알게 된다. 한 생 두 생이 아니라 500생, 5,000생, 50,000생, 무한 생을 다 알게 된다(달라이 라마에 의하면, 부처는 과거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기억한다. 이 말은 신비해 보이지만, 결국, 부처가 되면 ‘무한용량 클라우드에 접속하는’ 능력을 얻는다는 말이다).

이처럼, '무한한 전생'과 '유한한 뇌용량'은 필연적으로 '무한한 용량의 알라야식을 뇌 밖에 상정하게 되어', 초월적인 유아론에 빠지게 한다. 설사 우주공간이 유한하더라도 시간이 무한하면 우주공간 속에서 무한히 윤회하는 각각의 생명체에 벌어지는 누적 사건량(事件量)은 무한이 되므로, 이런 ‘무한한 양의 정보보관소’인 알라야식은 필연적으로 '유한한 우주 밖에 존재하는 초월적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무한한 과거의 무수한 윤회를 믿는 이들이 (유한한 뇌에 대한 연구인) 뇌과학을 수용하지 못하는 이유다. 만약 고대의 위대한 불교수행자들이 지금 환생한다면, 절대로 '무한용량'의 알라야식을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그런 주장을 한 것은, 유한개인 1,000억 개 뇌신경세포와 500조 개 뇌신경회로가 기억을 담당한다는 걸 몰랐기 때문이다. 문제는, 설사 이들이 지금 환생을 해서 자기들의 과거잘못을 고치려 한다 해도, 이들보다는 이들이 남긴 엉터리 주장을 담은 경전을 불변의 진리로 신봉하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심하게 배척을 당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미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은, 불교핵심사상인 무아론(無我論)을 위배하지 않기 위해서, (윤회의 주체로서의) 알라야식은 '변하는 식(識 의식)'이라고 주장한다. 무한한 세월을 통해서 (즉, 무한 번 윤회를 통해서) 새로 습득하는 정보의 기억이 알라야식에 새로 저장되므로, 알라야식은 (저장량이) 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창고의 내용물이 변할 뿐이지 창고 자체는 변화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 '창고적 유아론'이 된다.) 집지식(執持識)이라는 이명을 지닌 알라야식은 새로 들어온 정보를 절대 잃어버리지 않고 저장한다. 그래서 저장되는 정보의 양에, '증가'라는, 변화가 온다. (여기서 중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알라야식에 저장된 정보의 질에 대한 문제이다. 많은 경우에 우리가 얻는 정보는, 우리 자신의 불완전한 정보파악능력으로 인하여, 완전하지 않고 왜곡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가짜 정보가 입력되는 경우도 있다. 입력된 정보는 나중에 입력되는 정보의 영향을 받아 왜곡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알라야식은 망식(妄識)이다.

개는 색깔을 잘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개가 본 경치는 인간이 본 경치와 다르다. 개의 알라야식에 저장된 저녁노을 풍경은 인간의 알라야식에 저장된 것과 다르다. 개가 훗날 인간으로 환생해 깨달음을 얻으면, 예전에 개의 눈으로 본 저녁노을의 색깔이 자동적으로 진짜 색깔로 변환이 될까? (그럼 그 부처가 개 시절에 본 저녁노을을 회상할 때, 자기가 보지 않은 총천연색 노을을 본 걸로 회상을 할까? 이런 일은 불합리해 보이므로, 흑백영화 필름에 칼러를 입히는 것과 유사한, '알라야식 채색작업'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부처는 과거 인간시절에 맡은 ‘어설픈 냄새’도 ‘치밀한 총천연색 냄새’로 다시 채향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누군가를 신격화하면 온갖 모순이 발생한다.)

부처에게는 눈이 육안 말고도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 등 4개나 더 있다는데, 적외선을 보는 눈은 없는가? 혹시 천안에 그런 기능이 있는 것일까? 혹시 암흑물질(暗黑物質 dark matter)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는 건 아닐까? 물리학자들 주장에 의하면, ‘우주가 생각보다 훨씬 더 느리게 팽창하는 것’은 ‘우주의 질량이 관측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관측이 안 되는 물질을 암흑물질이라고 한다. 부처가 이런 암흑물질을 볼 수 있다면 멋진 일일 것이다. 암흑물질안(眼)! 그러면 다음과 같이, 금강경 개정도 가능해 보인다.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암흑물질안부? 수보리 백불언, 여시 세존, 여래유암흑물질안." 그런데 왜 불경에는 이런 내용이 없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에 어느 누구도 암흑물질이 있는 줄 몰랐기 때문이다. ‘개가 색깔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것도 몰랐는데, 무슨 수로 암흑물질이 있는지 알았겠는가? 그러므로 함부로 자기 스승에게 천안통이나 천이통(天耳通) 등의 ‘물질적인 세계에 대한 신통력’을 부여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리하다가는 오히려 자기 스승을 욕보이게 된다.

이처럼 알라야식이 변하는 '창고로서의 식' 즉 ‘장식(藏識)'이라면 이 식에 저장된 내용이 거의 없었을 때, 즉 영(0)이나 마찬가지였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아예 없었을 때가 존재했을 것이다. 즉 없던 알라야식이 생겨났을 때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무(無)에서 유(有)로 나아가는, 진화론을 인정할 수 있는 기반이 생긴다.

‘지구 생명체에게 시작이 있었다’는 진화론에 비추어보면 (경전 안팎에 글로 남아있는) 과거 불교인들의 온갖 헛소리를 감별할 수 있다. (파렴치한 불교인들은 자기들의 헛소리를 부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라 우기면서 '자기들 말을 헛소리라고 비판하는 것은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고 주장하며, 적반하장격賊反荷杖格으로, 자기들의 망상이 초래한 불합리한 잘못을 합리적인 비판력을 지닌 사람들에게 뒤집어씌운다. 부처님을 비방하는 건, 다른 이들이 아니라, 바로 이들이다! 감히, 자기들 망상을 부처님에게 돌리다니!) 예를 들어 진화론은, 위경일지 모른다고 의심을 받는 대승기신론의 위경·진경 여부를 의미 없게 만든다: 그냥, (불생불멸하고 상주불변하는 식인 불변진여不變眞如를 내세우는 그 유아론적인) 핵심 주장이 헛소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 글에서의 진여는 불변진여를 뜻한다.) 대승기신론은 심오해 보이지만 단순한 논리구조이다: 도를 닦으면 (도를 닦기 전에 생겨난) 탐진치가 없어지므로 탐진치는 생멸심生滅心이고, 도를 완성한 이의 '탐진치가 없는 청정무구한 마음'은 생멸하지 않으므로 (무한한 과거부터 무한한 미래까지) 영원히 존재한다. 부연하자면 이렇다: 시간은 변화가 있는 곳에만 존재하므로, 그리고 탐진치는 시간 속에서만 존재하므로, 더 이상 변화가 없는 청정무구한 마음인 진여는 시간을 초월한다. 이런 사상은, 진여와의 합일(合一)을 추구하는 불교신비주의이다. (목표가, 진여와의 합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진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주장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결국 진여만 남기 때문이다.) 이 사상의 문제는, 설사 이런 합일에 이르는 이들은 있(었)더라도 극소수라는 점과, 현실 세계에 도움이 안 되어 현실세계 속에서의 '의식주결핍·질병·자연재해 등으로 발생하는' 절대다수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지 못해, 그리고 중생을 현실도피적으로 만들어, 중생의 고통을 오히려 증가시킨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일은 안 하고 진여와의 신비적 합일을 목표로 명상만 하는' 아버지나 어머니는 모든 어린 자식들의 공적(共賊)이다!

불교에 진정 해를 끼치는 자들은, '과학을 지지하고 영혼과 상주불변하는 참나(眞我 아트만)를 배척하는 사람들을' 유물론자라고 비난하는, 소위 영적인 거룩한 사람들이다. (이들 생각에는 자기들 망상에 위배되는 것은 모조리 다 유물론이다. '중세 마녀사냥' 사상과 동일한 사고방식이다. '와서 보고 확인해 보라'는 부처님 사상과 정반대 사상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진화론·지질학·우주론 등 실증적인 과학적 발견을 배척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이들이 증거라고 내세우는 것들은 남들에게 들은 소문이나 미신적인 주장들뿐이다. 그러면서도 이미 과학적인 사실로 증명이 끝난 진화론은 죽기살기로 반대한다. 그러면서도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과학이다’라고 큰소리치며 자랑한다.) 이들은 승려들 중에도 있고 재가자들 중에도 있다. 바글바글하다.

이들은 불교를 통째로, 즉 84,000경을 문자 그대로 다 믿는다. 몽매주의자(蒙昧主義者)들이 가진 유일한 무기는 '무조건 다 믿자'이다. 84,000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을 일일이 다 감별해서 취사선택하려면,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냥 다 믿는 것이 쉬운 일이다. 예수가 '보지 않고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라 했지만, 사실은 '그냥 다 믿는 게 가장 쉬운 일'이다. 좁은 길이 아니라 넓은 길이다: 생명의 길이 아니라 죽음의 길이다. 84,000개나 되는 경전의 내용 중 어느 게 참이고 어느 게 거짓인지 감별하려면 필경 머리에 쥐가 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모조리 다 믿으면, 신심이 깊다고 신도들에게 크게 존경을 받는다. '맹신으로 인한 망상이 크게 높임을 받는' 기이한 현상이다. 이는 '그냥 다 믿는 것'을 더욱 용이하게 만든다. 경전상·교리상의 서로 모순되는 그리고 현대과학에 위배되는 내용들은 비판대상 또는 버려야할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뇌로는 파악이 불가능한 '인간 뇌를 초월한 신비'로 격상된다. 이 장면에서는 '나무아미타불' 소리가 아니 나올 수 없다. 필자가 진화론·생물학·지질학·물리학 등 과학을 내세워 일부 승려들의 사상을 비과학적이고 고루(固陋)한 망상이라고 비판하지만, 만약 우리 지구보다 문명이 만 배는 더 발달한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해서 이러저러한 이유를 들어 필자의 사상을 비판하면, 아직 그들만큼 지성이 발달하지 못한, 미욱하기 이를 데 없는 필자 역시 '그들의 비판을 막무가내로 거부할' 가능성이 클 것이다. 유한한 뇌를 지닌 생명체의 한계이다.

'무한한 과거에 무한히 오래 살았다'고 주장하면 필연적으로 무한용량을 가진 식(識)을 상정하게 되고, (무한한 과거생의 무한한 기억의) 저장기능을 하는 뼈대로서의 '무한한 크기의 창고'를 인정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유아론(有我論)으로 흐르게 된다. 창고의 저장물인 기억이 아니라 '무시무종으로 존재하는 창고 자체가 상주불변하는 실체'라고 누가 주장하면, 처음 듣는 사람은 정신이 혼미해지고 반박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에도 아킬레스건이 있다. 창고에 내용물이 그것도 지저분한 내용물이 '항상' 들어있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아무리 소량일지라도) 악업이 있었다'는 말과 동일하여 인과론(因果論)에 위배된다는 점이다. 이는, '원인(因)이 없이 업(業)이 있다'는 소리이므로, 일종의 원죄(原罪 original sin)사상이다. '인간과 생명체가 시작이 없는 무한한 과거에, 항상 악행을 지었다는 말은, 항상 악업을 짓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염세적으로 흐르는 이유일 것이다.

만약 알라야식(藏識)을 창안한 대승불교 수행자들이 '뇌 세포와 (수상·축색)돌기의 존재와 기능'을, 그중에서도 특히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전환하는 기능을 하는’ 해마(海馬 hippocampus)의 존재와 기능을, 알았다면 기억창고(能藏·所藏·執藏)로서의 알라야식을 상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유는, 컴퓨터에 무지한 사람은 컴퓨터의 어마어마한 정보 '저장기능'에 감탄한 나머지 '컴퓨터에 알라야식이 있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컴퓨터의 구조와 저장기능을 잘 아는 사람은 '절대로 컴퓨터에 알라야식이 있다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과 동일하다. 가감승제(加減乘除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는) 4칙연산능력은 인간의 영성·영혼·참나·주인공 등과 무관하다. 진여와는 더욱 무관하다. 전혀 무관하다. (우리 뇌의)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기능일 뿐이다. 이 사실을 처음으로 통찰한 것에 앨런 튜링(1912~1954)의 위대함이 있다. 그는 계산기를 만듦으로써 자신의 통찰이 옳다는 것을 증명했다. 즉 인간의 지성으로부터 계산기능을 분리해냈다. 이 사건은, 당시 사람들이 가감승제 계산기능을 ‘다른 생물에게는 없는’ 인간 지성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텔레비전 화면에 나타난 쥐를 본 허기진 고양이는 쥐를 잡으려고 텔레비전 뒤로 돌진한다. 초월적인 알라야식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고양이 같은 (지적 허기를 엉터리로 해결하려는) 사람들이다.

(알라야식에 해당하는 것이 유전자이다, 즉 생체유전자와 문화유전자이다. 유전자는 획득한 정보를 잃지 않으므로 집지(執持)이며, 저장하므로 함장(含藏)이며, 표현형을 만들어 내므로 종자(種子)이다. 또 유전자는 끝없이 이어지지만 돌연변이를 통해서 변하므로, 불단(不斷)이고 무상(無常)이다. 모든 생명체는 천만 종(種)이 넘는 숱한 종(種)으로 나뉘지만, 식물·동물을 가리지 않고 유전자가 서로 대부분 일치하므로,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즉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묘한 관계인 불일불이(不一不異)이다.)

사족(蛇足)을 좀 붙이자면 이렇다. '착한 일을 하면 착해지고 악한 일을 하면 악해진다'고 말하면 끝이지, 왜 '우리 마음에는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상주불변(常住不變)하는 착한 마음이 있다'는 식으로 착한 마음을 실체화해야 하는가?: 왜, '나쁜 일을 하면 본래부터 있는 착한 마음이 오염된다'고 말하는가? 왜, '착한 일을 하면 (과거 무한한 시간 동안) 본래부터 있는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상주불변(常住不變)하는 나쁜 마음이 정화된다'고 말하면 안 되는가? 왜, 겨우 100년 정도 사는 주제에, 우주의 시작과 끝을 (없다고) 논하면서, '불생불멸 상주불변하는 마음'(진여 眞如)을 만들어내야 하는가? 그런 초월적인 마음만 주장하지 않는다면 대승기신론은 훌륭한 책이다. 특정 종교의 모든 경전을 모두 진리로 간주하는 것은, 모든 종교를 진리로 간주하는 것보다야 덜한 망상이지만, 여전히 대단한 망상이다.

'진여가 오염된다'는 대승기신론의 주장은 '맑은 거울과 같은 마음에 때가 끼지 않도록 부지런히 닦으라(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勿使惹塵埃)'는 신수의 주장과 같다. 하지만 이 사상은, '마음은 맑은 거울이 아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으므로 때가 낄 데가 없다(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는 육조혜능의 핵심사상과 정면으로 위배된다. 조계종은 육조혜능을 종조(宗祖)로 하므로, 대승기신론을 추앙하는 것은 큰일이다: 감히 종조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다. 그런데 불세출의 한국인 불교도 원효가 대승기신론을 완벽한 경전으로 치므로 한국 불교도들로서는, 원효와 혜능 둘 중 누구를 따라야 할지, 딜레마이다: 대승기신론소와 육조단경 중 어느 쪽을 믿어야 할까? 심하게 말하면, 한국불교는 잡탕이다: 서로 모순되는 이론들을 만들어 놓고는 아무 문제의식도 없이 각자 맘에 드는 걸 골라 믿는다. 심한 경우에는 동시에 둘 다 믿는다: '한 물건도 없다'고 하면서, 동시에, '물드는 한 물건인 진여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고는, 여러 교리철학 사이의 내재적인 모순과 문제점을 거론하지 않는 걸 '화쟁(和諍)'이라 여긴다. 모든 논쟁을 무력화할 차원 높은 견해를 제시하는 게 화쟁이지, '속으로는 서로 다투면서도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척하는 것'이 화쟁일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지동설이 사실로 밝혀지면서, 천동설체계 내에서 발생하는 '태양계 행성들이 운행방향을 거슬러 거꾸로 가는' 불가사의한 행성들의 역행(逆行)현상을 설명할 수 있었다. 지동설은 모든 행성의 역행현상을 해결했다. 아니 그런 현상은 '착각'이라는 걸 밝혔다. 움직이는 지구를 고정되어있다고 본, (그리하여 자신도 고정되어 있다고 믿은) 지구인의 눈에 비친 착각이라는 걸 밝혔다.

고대의 윤회론도, 유전자를 몰랐던 고대인들의 눈에 비친 착각일 수 있다. 움직이는 유전자를 움직이지 않는 영혼(아트만 참나 주인공)으로 착각한, 착각일 수 있다. 자신을 움직이지 않는 존재(힌두교 불이일원론에 의하면 아트만은 윤회하지 않는다. 윤회는 착각이다)로 본 데서 생긴 착각이다. 자기를 움직이지 않는 불멸의 존재로 보면 온갖 망상이 일어난다. 그러면 '고정된 지구와 천동설'에 의한 행성 역행현상이 일어나고,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 주전원(周轉圓 epicycle)을 도입해야 하듯이, 불교가 움직이지 않는 영혼을 인정하면 참나 진여 등 온갖 무리한 이론을 도입하게 된다. 그 결과, 지혜는 개발되지 않고 진화론을 인정하지 않는 어리석음이 생긴다.

불교도들은 불교(경전과 승려들 주장)에만 묻혀 살 것이 아니라 진화론과 생물학도 공부하시라. 생명의 기원과 발생과정에 대한 설명은 과학에 있지 종교경전에는 없다. 오히려 종교경전에는 망상이 가득하다. 그것도 대형 망상들이다. 생명과 우주의 기원과 발생에 대한 초대형 망상들이다.

'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은 망상에도 적용된다. 망상(으로 가득찬 사람들과 경전들)을 멀리하고 과학을 가까이 하면(불교는 본시 종교가 아니라 과학이다: 마음의 구조와 작동원리에 대한 과학이다. 사람의 행·불행의 원인을 신·운명 등 초월적인 이유가 아닌 실증적으로 밝히려는 과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이라면 경기를 일으키는 불자들은, 신비로운 연구대상이다), 분명 망상과 멀어질 것이다. 그러면 망상을 제거한 순수한 눈부신 불법(佛法)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불법은 대자유(大自由)를 선사한다. 망상으로 잘못 생각한 자유가 아니라, 망상에서 해방된 진정한 대자유가 찾아온다.

* 부처가 ‘삶은 고(苦 괴로움)’라 했는데 이 고는, 정신적인 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고와 정신적 고, 둘 다이다. (부처님의 직제자이자 아라한인 밧칼리와 찬나는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했다.) 인생의 고를, 물질적 고를 배제하고, 정신적 고라고만 주장하면 의식이 발달하지 않은 생물의 고를 인정하지 않게 되어 그냥 잡아먹고 학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의식과 정신활동이 뇌에서 일어나는 것을 알고 인정하게 되면, 하등 동물들의 고통도 이해하게 된다.) 부처가, 벌레가 새에, 새가 매에 잡아먹히는 것을 보고 '삶이 고라고 느꼈다'는 그 고는 벌레·새 입장에서 고이어야지, 부처입장에서만 고이고 벌레·새 입장에서는 고가 아니라면, 벌레·새는 고를 벗어나기 위한 목적으로는 도를 닦을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부처가 되기 위해, 즉 윤회를 벗어날 지혜를 얻기 위해, 인간으로 환생할 필요도 없어진다. 그러면 '윤회의 고통'이라는 말이 성립하지 않게 된다. 이처럼 만약 윤회가 있다면, ‘부처의 가르침은 동물도 고통을 받는다’고 가르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소카 왕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동물학대를 금지시켰다.

뇌과학과 생물학은 동물도 고통을 받는다는 것을 밝혔으며, 인간과 동일한 뇌 구조를 가졌으므로 고통을 안 받을 수가 없다. 단, 고등의식이 없어서 인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정신적인 고통이 훨씬 적다. 거의 없다. 형이상학적 환망공상이 초래하는 고통은 아예 없다. 종교는, 본래 존재하지 않는 환망공상적인 고통을 양산한다.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공갈장사이다: '지옥과 개 돼지 닭 소로 환생한다'고 겁을 주는 것이 전형적인 예이다. 인간은 가축을 잡아먹고 끓여먹고 구워먹고 잘라먹고 부려먹고 구타하므로, 가축으로 태어나 험한 꼴을 당하는 걸 두려워한다. 도살장으로 끌려갈까봐 두려워한다. 문어로 환생하면 산 채로 끓는 물 속으로 던져진다. 죽을 때까지 무거운 솥뚜껑이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윤회론이 먹힌다. 고대의 잔재인 이런 사상을 벗어나 현대과학을 받아들여야 진정한 불교인이다.

2016년 08월 08일 (월) 강병균 교수(포항공대) cetana@gmail.com
불교닷컴 [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112. 보지 않으면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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