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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글 제목: 켄 윌버의 참나
전체글올린 게시글: 2016-03-06, (일) 4:13 am 

가입일: 2015-01-01, (목) 10:22 am
전체글: 9
한국선불교 거장들의 참나 / 진제, 서암, 청담, 혜국, 혜민의 참나
[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89

- 신이건 인간이건
자신이 완벽하다고 주장하는 존재는 완벽하게 비판을 받아야 한다

아일랜드 성공회 주교였던 버클리(George Berkeley 1685~1753)는 극단적인 유아론(唯我論 solipsism)으로 유명하다. 우주 삼라만상이, 객관적인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의식상에 아이디어(idea)로서만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즉, 우주 삼라만상은 우리가 인식할 때만 존재한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오직 영(spirit 의식이 있는 주체, 마음, 心王 심왕)과 아이디어(idea 의식적인 경험, 마음의 작용, 心所 심소)뿐이다. 즉, 의식과 의식의 작용뿐이다. ‘그럼 당신이 인식을 안 할 때 우주도 사라지느냐’고 반격을 당하자, 그는 ‘설사 개별 인간의 개별 의식이 사라지더라도, 하나님의 의식은 항상 존재하므로, 하나님의 의식 속에서 우주는 아무 문제없이 존재한다’고 대답했다. 버클리의 ‘하나님’에 해당하는 것이 현대한국불교의 ‘참나(眞我 true atman)’이다. 한국선사들의 주장에 의하면 순수의식인 참나에 의해서 우주가 존재한다. 참나는 우주가 존재하기 전부터 존재했으므로, ‘우주가 참나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절대로 거꾸로가 아니다. 즉, 의식으로부터 우주가 탄생했지 우주로부터 의식이 탄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버클리의 유심주의(唯心主義)와 일치하는 사상이다.

한국불교가 힌두교적 유아론(有我論)이라는 것은 학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불교가 오래전에 발생지인 인도에서는 사라졌지만 ‘다행히 그 진수가 동북아시아에 특히 한국에 살아남아 있다’는 건, 전혀 사실이 아니다. 문화로서의 불교는 살아남았지만 사상으로서의 불교는 사라졌다: 최소한, 전문 수행집단인 출가승단은 사실상 힌두교화 되었다. 오히려 소수의 재가신도들이 불교의 핵심사상인 무아사상(無我思想)을 유지하고 있다. 범아일여적(梵我一如的) 참나론이 한국불교를 휩쓸고 있으며 무아론은 사실상 (승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서양 사상가이자 명상가인 켄 윌버(Ken Wilber 1949~)의 강연이 한국불교 특히 선불교의 입장을, 더할나위없이 웅변적으로, 대변하고 있기에 여기 소개한다. (YouTube에서 ‘켄 윌버 참나의 각성’으로 검색. 켄 윌버는 이 강연에서 참나를 가리키는 말로 "'I am'ness"라는 괴이한 용어를 만들어 사용하는데, 이 용어는 힌두교에서 우주아 범(梵 브라흐마 Brahma)을 묘사하는 "I am that I am(나는 나인 자이다)"에 기원을 둔 말이다.) 또, 순수한 자기(pure self) 역시 참나의 이명(異名)이다.

켄 윌버는 ‘나라는 느낌(’I am‘ ness라는 느낌, 참나를 느낌)’을 강조한다. 하지만, 명상 중에 나라는 느낌만 남고 대상이 사라지는 현상은, ‘생명체가 (가장 기본적인 의식을 제외한 나머지 의식의) 대상이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 근거와 증거가 되는 것이지, ‘영원불멸의 아(atman)'를 증명하는 게 아니다. 아메바와 지렁이는 아감(我感 나라는 느낌·생각·개념)이 없이도 아무 문제없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켄 윌버가 말했듯이, 가장 높은 의식을 지닌 인간조차도 수년간 어렵게 명상을 해야 일체 대상을 떠난 아감(我感)을 느낄 수 있다면, 가장 낮은 의식을 지닌 아메바와 지렁이와 붕어와 개구리가 그런 아감(我感)을 지녔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지금의 아메바나 지렁이가 그렇듯이, 단세포 시절에 어류 시절에 파충류 시절에 아감(我感)을 가졌을 리 없으므로, 아감(我感)이란 영원한 게 아니다.
그러므로 아감(我感)이나 나란 윌버의 주장처럼 빅뱅 이전부터 있는 게 아니다. 지구상에는 지난 35억년 동안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아감(我感)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처럼 아감(我感)은, 인간의 등장과 더불어 나타난, 아주 최근의 현상이다.
진화의 과정에서 고등의식의 출현과 함께 나타난 아감(我感)을, 인간이 나타나기 전부터 심지어 행성과 생명체가 나타나기 전부터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과가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전도몽상'의 전형적인 예이다.

켄 윌버의 강연을 따라가 보자.

<우리는 큰마음이 순수한 나에게 닻을 내리게 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각자 내가 여기 있다. 이것이 나라는 느낌이 있습니다. 나를 알아차리는 것은 ‘늘 존재하는 인식’ ‘항상 현존하는 큰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이 나를 인식하는 것이 바로 큰마음으로의 확실한 안내가 됩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 중 하나는 이렇게 큰마음이... 오늘은 개요를 얘기하고 실제연습은 목요일에 할 것입니다.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바로 이 근원적이고 초월적인 진아(pure self 眞我)가 대상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이 보는 모든 것들은 대상이지 주체가 아닙니다. 순수한 자기(pure self 眞我 참나))가 아닙니다. 이 순수한 나를 느끼고 싶다면 모든 대상물을 걷어내 보세요. 모든 대상물이 사라진 뒤에도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자각해 보세요. 이런 경험은 보통 2~3년 정도의 어려운 수행 뒤에 일어납니다. 이것은 모든 대상을 걷어낸 명상상태로서 ‘집중의 상태’ 또는 ‘나타나지 않음에 대한 내면의 각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떤 대상물도 존재하지 않는 광활한 의식’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 있게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 나는, 빛나고 열려있는 텅 빈 나는 존재합니다.>

평: 표현이 지극히 아름답다. 그래서 면밀히 살펴보지 않으면 그냥 이런 말에 넘어가 유아론자가 되어 불교를 왜곡하게 된다. 이런 아름다운 사이렌 같은 유아론 철학을 만나면, 거기 매혹되어 흥분한 감성을 차가운 반야지혜로 비추어 망상을 제거해야 한다.
선정 중에 마음이 무한히 광활해지는 것은 단지 느낌일 뿐이다. 장판교의 장비처럼 백만대군을 창 하나로 무찌를 수 있다는 마음이 들지라도, 겨우 몇 명 해치운 끝에 결국 살해당한다면 그 마음은 허황된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수십 년간 힘겹게 선정을 닦은 끝에 나타나는 그 무한히 광활한 마음으로 뭘 할 수 있는가? 당신이 전문수행자라면, 그 무한히 광활한 마음의 힘으로, 사람들로부터 공양을 받지 않고도 살 수 있는가? 음식을 먹지도 않고 똥오줌을 싸지도 않고 살 수 있는가? 사람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아지게 할 수 있는가? 3미터 높이뛰기에 성공하면 지극히 행복해진다고 수업료를 받아가며 사람들에게 높이뛰기를 연습시키는 것과 뭐가 어떻게 다른가? 숨을 1분으로 늘리면 지극히 행복해진다고 수업료를 받아가며 사람들에게 숨쉬기 연습을 시키는 것과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보여줄 게 있는가? 동전 한 잎이면 배를 타고 건너갈 수 있는 강을 건너가려고, 30년 수행 끝에 물 위를 걷는 능력을 획득한 사람과 무엇이 다른가? 부처님이 5년 걸려 공무변처·식무변처를 완성했지만 결국 이 두 경지를 버린 것에서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선정 중에 나타나는 ‘공간이 무한하고’ ‘의식이 무한하다’는 느낌은, 시간감각과 공간감각을 담당하는 뇌 부위에 가해진 압력으로 일어나는, 왜곡된 현상일 뿐이다.

<목요일에 실습을 조금 할 예정이고 지금은 그 원리만 잠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은 바로 지금 그 나에 대한 느낌이 있습니다. 5분 전을 생각해 보기기 바랍니다. 5분 전 당신의 경험 속에 있었던 것은 무었입니까? 나입니다. 5시간 전에는 어떨까요. 나입니다. 그렇다면 5시간 전 대상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지금 여기에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5년 전에 존재하고 있던 것은 무엇일까요? 나입니다. 그것은 항상 존재하고 있습니다. 대상이 전혀 없는 그 나를 느껴보세요. 그 나는 지금도 존재하고, 1분 전에도 5분 전에도 존재했습니다. 대상은 모두 변합니다. 매우 중요한 게 그겁니다. 대상이 아니라면 당신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생각이 아닙니다.>

평: 나라는 느낌도 생각이다. 나는 개념이다. 고등생물이 아니라면 나·대상·주체·분·년·시간·공간이란 개념이 없으므로, 이 강연에서의 켄 윌버처럼 생각을 하는 게 불가능하다. 이런 개념에 기초한 ‘나’ 역시, 참나건 가아건, 모두 생각이다.
참고로, 뒤에 인용하겠지만, 청담에 의하면 ‘생각을 하는 것은 진아(眞我 참나)’이고 ‘생각은 가아(假我 가짜 나)’이다. 이 말은 켄 윌버의 ‘당신은 생각이 아닙니다’라는 말과 일치한다.

<생각은 대상이고 변화합니다. 5분 전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나요. 아닙니다. 하지만 나는 있나요? 그렇습니다. 몸 느낌 생각은 모두 대상입니다. 어떤 자아를 느낄 수 있지만 그것 역시 대상입니다. 그것을 인식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순수자아(참나 pure self)인 나입니다.>

평: 왜 아메바와 지렁이의 순수자아는 그걸 인식하지 못할까? 켄 윌버를 비롯한 참나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순수자아(참나)는 생물이 출현하기 전인 빅뱅 이전부터 있었다고 하므로 게다가 아메바 지렁이의 참나는 인간의 참나와 (최소한 그 능력에 있어서) 동일할 것이므로, 아메바 지렁이의 참나가 인간이 인식하는 걸 인식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인식작용을 하는 게 참나이지 두뇌가 아니라면, 또 두뇌가 참나를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된다면, 두뇌가 없거나 발달하지 않은 생물일수록 즉 에이즈균 아메바 지렁이 등 하등생물들일수록 참나를 더 잘 인식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당신의 생각은 어떠하신가? 순수한 나, 즉 참나란 발달한 두뇌가 만들어낸 개념일 뿐이다.

<5년 전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나입니다. 50년 전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나입니다. 500년 전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을 보여주세요. 나입니다. 대상이 전혀 없을지라도 이 근원적인 나는 계속 존재합니다. 5,000년 전에 무엇이 있었을까요? 아브라함 이전에도 나는 존재합니다. (주: 신약에서 예수가 한 말이다.) 이 나는 존재하는 유일한 것입니다.>

평: 이건 힌두교 범아일여 사상이고 베단타 불이일원론(不異一元論) 사상이다. 이 사상에 의하면 개체의식인 아트만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전체의식인 브라만만 존재한다. 이 켄 윌버의 사상이 정확히 현대 한국선불교의 입장이다. 존재하는 것은 참나뿐이며 이 참나에서 생명체와 허공과 우주 삼라만상이 나온다.
참나가 참나를 인식한다면 왜 35억년 전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 참나에게는 기억능력이 없는 것일까? 짧은 단기 기억만 있는 걸까? 아예 기억이 없다면 어떻게 인식이 가능한가? 문자 그대로 기억이 전혀 없다면 무생물이 아닌가? 기억이 전혀 없는 걸 무생물이라 하고, 기억이 있는 걸 생물이라 한다.

<다른 모든 것들은 변화이고 잔물결이고 일어남입니다. 고통과 구속은 이 나를 어떤 대상으로 잘못 규정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자기(역주: 참나가 아닌 가짜 나)·에고·대상·육체와 동일시합니다.>

평: 개별아를 포함한 삼라만상이 모두 우주아인 범(梵)의 잔물결이라는 말이다. 자신을 에고와 대상과 동일시하는, 이런 오해의 주체는 누구인가? 가아(假我)인가? 참나인가? 가아(假我 가짜 나)가 오해의 주체라면, 가아(假我)가 분탕질을 치는 동안, 참나는 뭘 하고 있다는 말인가? 참나는 무능력자이고 무기력자인가?

<그 대상의 세계가 다가와 잠시 머물며 여러분을 고문하다 떠나갑니다. 나는 계속 진행 중이고 변하지 않으며 항상 존재합니다.>

평: 참나는 상주불변이라는 소리다. 진제·서암·청담·혜국·혜민의 사상과 일치한다. 우리가 참나라면 어떻게 고문을 당할 수 있는가? 참나가 어떻게 고문을 당할 수 있는가? 비슷한 예를 들자면, 기독교 하나님이 고문을 당할 수 있는가?

진제·서암·청담·혜국·혜민의 참나와 켄 윌버의 참나

아래 소개하는 진제·서암·청담·혜국·혜민의 참나에 대한 발언들을 켄 윌버의 참나에 대한 발언과 비교해 보라. 이들의 참나는 순진한 불교신도들이 생각하듯이 ‘부처가 될 능력’인 불성(佛性)이 아니다: ‘미약한 시작을 창대한 끝으로 만드는 가능태(可能態)’로서의 부처가 아니다. 보고 듣고 생각하고 슬퍼하고 분노하는, 감각작용·사고작용·감정의 주체인, 구체적인 존재이다. 현대의 깨인 기독교인들은 구약에 쓰여 있는 ‘분노와 시기와 질투의 하나님’을 즉 ‘감정을 가진 인격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비인격적인 이신(理神)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무신론과 무아론을 가르친 부처님의 제자인 한국선사들이, ‘보고 듣고 슬퍼하고 분노하는 인격적인 존재인 참나’를 가르치는 것은 가히 충격 그자체이다. 기독교가 인격신에서 비인격신으로 진화를 하고 있는데, 불교는 거꾸로 무신론에서 (사실상의) 유신론으로 그것도 인격신론으로 후진하고 있다! (누가 6신통을 가지고 하늘을 날아다니며 영원히 산다면 그리스 신화의 신들과 뭐가 다른가. ‘맨몸으로‘ 하늘을 날다니, ‘마차를 타고’ 하늘을 질주하는 포세이돈보다 더 신답지 않은가? 참나론자들은 참나에게 이런 능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참나는 신이다. 그런데 조계종 전(前)종정 서암에 의하면 주인공 참나는 슬퍼하고 분노하므로 인격신이다.) 그것도 사실은 자기들이 우주의 창조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래 인용한 청담 스님의 주장에 의하면 태양 등 우주만물은 진아 즉 참나에서 나온다. 그의 불교사상은 힌두교적 유아론의 극치이다. 청담은, 근대한국불교정화운동의 주역으로서, 한국불교에서 대처승들을 몰아냈지만 동시에 무아론을 몰아내고 대신 인격신과 창조신을 불러들였다. 불교를 외적으로는 정화를 했지만 내적으로는 오염시켰다. 현재한국불교는 유아론이자 유신론이다. 게다가 청담이 몰아낸 대처승들이 슬금슬금 돌아와 지금은 은처종이 되었다: 결혼신고를 한 승려가 버젓이 승단의 일원으로 남아있다. 은처승을 멸빈하지 않고 오히려 중용하는 것을 보면 은처종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청담의 공(功)은 훼손되고 과(過)는 선양(煽揚)되고 있다.)

진제: 몸뚱이가 아니라 참나가 보고 듣는다.
헌 몸뚱이를 버리고 새 몸뚱이로 들어가는 것은 주인공인 참나이다.
주인공인 참나가 몸뚱이를 떠나면 사흘 안에 몸뚱이가 썩기 시작한다.
주인공인 참나는 우주가 생기기 전에도 있었고, 우주가 멸한 후에도 여여하게 있다.
서암: 슬퍼하고 분노할 줄 아는 이 주인공이 소멸하는 법이 있겠습니까?
청담: 진아(眞我 참나)가 생각을 한다.
진아는 모든 것을 다 기억한다.
진아에서 태양 등 우주만물이 나온다.
진아는 불생불멸이다. 우주가 생기기 전에도 있었고 우주가 사라진 뒤에도 있다.
혜국: 몸뚱이(몸)는 듣는 주인공이 아니다.
우리 몸 안에 들을 줄 아는 놈이 있다. 안에서 귀를 통해서 듣는 놈이 있다.
혜민: 지켜보는 놈은 사라지지 않는다.

(독자여러분은, 한자리에 모아놓은 여러 고명한 스님들의 발언을 통해서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현대한국선불교를 관통하는 핵심사상인 유아론적 참나사상의 진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무를 모아놓으면 비로소 숲이 보인다.
진제 스님의 발언은 대한불교조계종 공식 사이트에서, 서암 스님의 발언은 이청이 쓴 스님의 평전 ‘태어나기 전의 너는 무엇이었나’에서, 청담 스님의 발언은 스님의 저서 ‘산사에 심은 뜻은’에서 인용했다.)

이들 주장에 의하면,
참나는 생각·기억(저장)·감각·감정 등의 작용을 다 한다. 평소에 우리가 하는 이런 정신작용들은 다, 몸뚱이의 일부분인 뇌가 하는 게 아니라, 참나가 한다.
참나가 할 수 없는 유일한 능력은 기억을 불러오는 능력이다: 참나는 모든 걸 다 기억하지만 모든 기억을 다 불러오지는 못한다. 전생은 고사하고 어제 일도 가물가물하다. 이상하지 않은가? 다른 건 다 한다면서도 기억을 불러오는 것만 못한다니,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하하하. 그런데 더욱 이상한 일은 똑똑한 사람들도 이런 엉터리 논리에 넘어간다는 점이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이들의 논리는, 거짓말을 할 리 없는 인격자인 큰스님들이 참나를 봤다는데 안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라면 인격자 물라·랍비·신부·수녀·목사들이 자기들이 사적으로 대화를 했다고 증거하는 하나님도 믿어야 하다. 실상은 이렇다. 수행자들이 무언가 경험한 것은 맞으나 이들이 지혜가 부족하여 자기들이 본 것을 잘못 해석하기 때문에 참나·하나님 등의 발언이 등장하는 것이다. 심신(心身)을 포함한 모든 것은 연기(緣起)이므로, 연기를 초월한, 이런 참나·하나님이 없다는 것이 반야지혜의 화신인 부처님의 통찰이다. (이는 현대 물리학·천문학·뇌과학·진화생물학과 일치한다.) 그래서 불교에 무아열반(無我涅槃)이 존재하며, 이로 인하여 불교가 외도들로부터 단멸론(斷滅論)이라고 비난을 받았다.

‘지켜보는 놈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혜민의 주장 역시 문제가 심각하다. 도망가던 꿩이나 타조가 흙과 모래에 자기 머리를 파묻는다고 해서, 좇아오는 포식자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눈이라는 자기 감각기관에서 사라진 것뿐이다. 마찬가지로, 명상 중에 일체 대상이 사라졌다고 해서, 즉 자기 감각기관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즉 자기가 느낄 수 없다고 해서, 진짜로 우주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이걸 이유로 ‘우주는 우리마음이 만들었다’고 주장하거나 ‘우주가 사라져도 지켜보는 참나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기 눈을 가리면 세상이 사라진다’는 꿩·타조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자기의식에서만 사라진 것이다. 자기 몸과 뇌는 여전히 존재한다. 명상 중인 사람을 마취제로 마취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코마에 빠진 사람의 참나는, 코마 중에, 뭘 하고 있을까? 열심히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자기가 생각이 없는 걸, 의식이 없는 걸, 그리고 마취당한 걸 무심히 지켜보고 있을까? 혜민은 ‘의식도 일종의 감각기능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으며 ‘의식에 일어나는 현상을 옳게 해석하는 것이 지혜의 기능’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불교가 왜 지혜의 종교라고 불리는지를 망각하고 있다.

다시 켄 윌버의 강연으로 돌아가 보자. 윌버는 ‘참나 신학(眞我神學)’을 계속해서 전개한다.

<5,000년 전에 오직 나만이 존재했읍니다.>

평: 그럼 지금도 오직 나만이 존재하는가? 다른 사람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가? 켄 윌버는 ‘우주아(宇宙我)만 존재하고 개별아(個別我)는 우주아라는 대양에 이는 물결이므로 오직 우주아로서의 나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힌두교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인데, 한국 선불교 선사들의 견해이기도 하다.

<빅뱅 이전에도 오직 이 나만이 존재했습니다. 이것은 태어나지 않은 위대한 보물입니다. (주: 참나는 불생불멸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은 근원적인 자아의 상태입니다. (평: 컴퓨터의 기본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는다.) 계속 존재하는 나를 느끼면 대상은 사라집니다.>

평: 의식은 한 순간에 두 가지를 의식하지 못한다. ‘나’에 의식을 전적으로 집중하면, ‘나’만 남고 다른 대상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만약 '똥'에 의식을 전적으로 집중하면, 나를 포함한 모든 게 사라지고 ‘똥’만 남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똥’이 가장 근원적인 것은 아니다.

<완벽한 수행, 근본적인 수행은 이 근본적인 나를 느끼는 것입니다. 이 나를 신(神 창조주 God)이라고도 부르며 지금 여기서 알아챌 수 있는 무엇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이 나를 인식하고 있으며 그것은 분명합니다. 수행은 그 큰마음에서 쉬는 것이고 나 안에서 쉬는 것입니다. 계속 그렇게 하면서 이런저런 일을 할 수도 있고, 또 어느 순간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 나를 잊고 큰마음을 잊어버리는 것이죠. 그렇게 벗어났다고 인식하는 바로 그 순간 누가 벗어났는지를 인식합니다. 내가 벗어났다고 인식하는 그 순간, 여러분은 바로 자동적으로 그 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하고 그처럼 간단합니다. 매순간 할 일은, 그것이 나라고 하는 ‘항상 존재하는 앎임을’ 재인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도 존재하며, 5분 전, 5년 전, 50년 전, 500년 전, 5,000년 전, 그리고 빅뱅 이전에도 존재합니다. 근본적으로 이 나는 시간과 대상의 흐름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는 태어나지 않고 그래서 죽지도 않습니다.>

평: 참나는 불생불멸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은 '제법이 무아이므로 불생불멸이다'라는 반야심경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사상이다. 참나를 인식의 주체인 실체로 간주하는 사상이다. 유아론의 정수이며, 한국선불교 선사들의 주장과 정확히 일치하는 사상이다. 미미하나마 남아있는 불교무아론의 영향으로 인하여 한국선사들이 켄 윌버처럼 노골적으로 유아론을 주장하지는 못하지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선사들의 주장을 모아 조립하면 정확히 켄 윌버의 사상이 된다(앞에 인용한 진제·서암·청담·혜국·혜민 스님의 발언들을 보라). 한국 불교도들은 한국선사들의 사상이 실체론적 참나 유아론이라는 것을 대부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기복불교의 영향이기도 하고 (그래서 불교 근본철학에 무지하다) 교묘히 불교탈을 쓴 위장술의 힘이기도 하다.

<이것이 영원하다는 뜻이 아니라 이 ‘나’가 시간의 흐름을 벗어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늘 존재하는 순수한 나일 뿐입니다. 우리는 여기로 돌아가 닻을 내릴 수 있읍니다. 그것도 아주 간단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걱정이 무엇이든, 예를 들어 이 연습이 어렵거나 이해가 안 간다면, 단순히, "누가 안 된다고 하는지" 알아채 보세요. 그것이 바로 나입니다. 아주 분명한 것이지요. 만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냥, 누가 이해하지 못함을 아는지 알아채 보세요. 이해하지 못함을 아는 내가 있읍니다. 이 마음이 할 수 있는 것과 더불어 큰마음에 닻을 내릴 수 있는 지표가 됩니다.>

평: ‘알아채는 놈이 나(참나)’라는 주장은 ‘지켜보는 놈이 참나’라는 혜민의 주장과 같은 주장이다. 아무리 지켜보는 능력이 뛰어나도 지혜가 없으면 말짱 도루목이다. 먹이를 노리는 매를 보라. 얼마나 지켜보는 능력이 뛰어난가? 매의 지켜보는 행위의 주체는 참나인가? 그렇다면 참나가 다른 생명체를 잡아먹으려고 노리고 있는가? 아니면, 매의 가아가 먹이를 노리고 그 상황을 지켜보는 것은 매의 참나인가? 불교가 지혜의 종교임을 망각하고 ‘우주의 질료로서의 참나’를 논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그런데 빅뱅 이전에도 참나(眞我)가 있다면, 그때 가아(假我)는 없었다는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번뇌의 주역이고 고통의 주체인' 가아는 언제 홀연히 생겨났는가? 이는 인과론(因果論)에 위배되는 것 아닌가? 이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참나)이 자기가 창조할 아담과 이브(가아)가 결국 잘못된 길을 갈 것을 미리 알면서도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는 것을 포기하지 못했다’는 궤변과 무엇이 다른가?
진제 스님에 의하면 윤회를 하는 것은, 즉 헌 몸뚱이를 벗고 새 몸뚱이로 들어가는 것은, 참나인데(앞의 인용문을 보라), 참나가 고통의 윤회계로 추락하게 된 것은 참나가 어떤 업을 지었기 때문인가? 탐진치 삼독심(三毒心) 한 점 없이 완벽하게 청정무구한, 참나가 어떻게 인과의 세계인 윤회계로 추락할 수 있는가?

<이해하지 못함을 아는 내가 있습니다.>

평: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가아이고 이해하지 못함을 아는 것은 참나인가? 참나는 왜 처음부터 개입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만사를 명쾌하게 이해하게 하지 못하고, 꼭 방관자처럼 어리석은 사건이 일어나는 걸 멀뚱히 보고만 있는가? 전지전능하지만 인간사에 일일이 개입을 하지 않는 하나님 같은 존재인가? 인간이 세계대전을 일으켜 서로 죽이건 말건, 노모를 봉양하며 열심히 사는 처자를 악한이 강간살해하건 말건 개입을 안 하는 하나님 같은 존재인가?

<그래서 어느 날 여러분들은 그 근원적으로 항상 그 나를 확실히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틀림없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주가 생겨나기 전에도 나는 있습니다.>

평: 위음왕불 이전에도 ‘내’가 있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나’는 참나를 말한다. 이 말은 ‘위음왕불 이전에 하나님이 있었다’는 말과 뭐가 다를까? 백년을 살기 힘든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길이의 과거사를 안다’고 주장하는 것은 대체 무슨 만용일까?

<이것이 위대한 전통의 절대적이고 근원적인 비밀이며, 이것이 모든 깨어남과 나타남과 사라짐의 비밀이기도 합니다.>

평: 비밀이 아니라 망상일 뿐이다. 어리석은 힌두교 전통의 ‘절대적이고 근원적인’ 망상일 뿐이다. (힌두교의 망상을 실감나게 즐기시려면 rationalistinternational.net를 찾아가 보시기 바란다. 3.3억 명의 신들과 가지가지 초능력을 믿는 전근대적인 미신으로 점철된, 현재 진행형인, 힌두교의 망상과 범죄를 목격할 수 있다. 이들에 비하면 ‘큰 나무나 큰 돌을 베거나 부수면 이들이 피를 흘리며 복수를 한다’는 국산 망상은 별게 아니다.)

독자 여러분들은 필자가 아래에 위 켄 윌버의 강연을, 평을 달지 않고, 그대로 올려놓을 터이니 한번 읽어보시기 바란다. 아마 대한민국 어느 고승의 강연을 듣는 듯할 것이다.

참나는 빅뱅 이전에도 우주가 생겨나기 이전에도 있었다

우리는 큰마음이 순수한 나에게 닻을 내리게 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각자 내가 여기 있다. 이것이 나라는 느낌이 있읍니다. 나를 알아차리는 것은 ‘늘 존재하는 인식’ ‘항상 현존하는 큰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이 나를 인식하는 것이 바로 큰마음으로의 확실한 안내가 됩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 중 하나는 이렇게 큰마음이... 오늘은 개요를 얘기하고 실제연습은 목요일에 할 것입니다.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바로 이 근원적이고 초월적인 진아(pure self 眞我)가 대상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이 보는 모든 것들은 대상이지 주체가 아닙니다. 순수한 자기가 아닙니다. 이 순수한 나를 느끼고 싶다면 모든 대상물을 걷어내 보세요. 모든 대상물이 사라진 뒤에도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자각해 보세요. 이런 경험은 보통 2~3년 정도의 어려운 수행 뒤에 일어납니다. 이것은 모든 대상을 걷어낸 명상상태로서 집중의 상태 또는 나타나지 않음에 대한 내면의 각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떤 대상물도 존재하지 않는 광활한 의식’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 있게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 나는, 빛나고 열려있는 텅 빈 나는 존재합니다.

목요일에 실습을 조금 할 예정이고 지금은 그 원리만 잠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은 바로 지금 그 나에 대한 느낌이 있읍니다. 5분 전을 생각해 보기기 바랍니다. 5분 전 당신의 경험 속에 있었던 것은 무었입니까? 나입니다. 5시간 전에는 어떨까요. 나입니다. 그렇다면 5시간 전 대상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지금 여기에 하나도 없읍니다. 하지만 나는 존재하고 있읍니다. 그렇다면 5년 전에 존재하고 있던 것은 무엇일까요? 나입니다. 그것은 항상 존재하고 있읍니다. 대상이 전혀 없는 그 나를 느껴보세요. 그 나는 지금도 존재하고, 1분 전에도 5분 전에도 존재했읍니다. 대상은 모두 변합니다. 매우 중요한 게 그겁니다. 대상이 아니라면 당신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생각이 아닙니다.
생각은 대상이고 변화합니다. 5분 전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나요. 아닙니다. 하지만 나는 있나요? 그렇읍니다. 몸 느낌 생각은 모두 대상입니다. 어떤 자아를 느낄 수 있지만 그것 역시 대상입니다. 그것을 인식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순수자아(참나 pure self)인 나입니다.

5년 전에는 무엇이 있었읍니까? 나입니다. 50년 전에는 무엇이 있었읍니까? 나입니다. 500년 전에는 무엇이 있었읍니까?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을 보여주세요. 나입니다. 대상이 전혀 없을지라도 이 근원적인 나는 계속 존재합니다. 5,000년 전에 무엇이 있었을까요? 아브라함 이전에도 나는 존재합니다. 이 나는 존재하는 유일한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변화이고 잔물결이고 일어남입니다. 고통과 구속은 이 나를 어떤 대상으로 잘못 규정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자기(역주: 참나가 아닌 가짜 나)·에고·대상·육체와 동일시합니다. 그 대상의 세계가 다가와 잠시 머물며 여러분을 고문하다 떠나갑니다. 나는 계속 진행 중이고 변하지 않으며 항상 존재합니다.

5,000년 전에 오직 나만이 존재했습니다. 빅뱅 이전에도 오직 이 나만이 존재했읍니다. 이것은 태어나지 않은 위대한 보물입니다. 이것은 근원적인 자아의 상태입니다. 계속 존재하는 나를 느끼면 대상은 사라집니다.

완벽한 수행, 근본적인 수행은 이 근본적인 나를 느끼는 것입니다. 이 나를 신(神 창조주 God)이라고도 부르며 지금 여기서 알아챌 수 있는 무엇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이 나를 인식하고 있으며 그것은 분명합니다. 수행은 그 큰마음에서 쉬는 것이고 나 안에서 쉬는 것입니다. 계속 그렇게 하면서 이런저런 일을 할 수도 있고, 또 어느 순간 벗어날 수도 있읍니다. 그 나를 잊고 큰마음을 잊어버리는 것이죠. 그렇게 벗어났다고 인식하는 바로 그 순간 누가 벗어났는지를 인식합니다. 내가 벗어났다고 인식하는 그 순간, 여러분은 바로 자동적으로 그 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하고 그처럼 간단합니다. 매순간 할 일은 그것이 나라고 하는 항상 존재하는 앎임을 재인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도 존재하며, 5분 전, 5년 전, 50년 전, 500년 전, 5,000년 전, 그리고 빅뱅 이전에도 존재합니다. 근본적으로 이 나는 시간과 대상의 흐름에 들어오지 않읍니다. 따라서 나는 태어나지 않고 그래서 죽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영원하다는 뜻이 아니라 이 나가 시간의 흐름을 벗어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늘 존재하는 순수한 나일 뿐입니다. 우리는 여기로 돌아가 닻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간단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걱정이 무엇이든, 예를 들어 이 연습이 어렵거나 이해가 안 간다면, 단순히, "누가 안 된다고 하는지" 알아채 보세요. 그것이 바로 나입니다. 아주 분명한 것이지요. 만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냥, 누가. 이해하지 못함을 아는지 알아채 보세요. 이해하지 못함을 아는 내가 있습니다. 이 마음이 할 수 있는 것과 더불어 큰마음에 닻을 내릴 수 있는 지표가 됩니다.

이해하지 못함을 아는 내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여러분들은 그 근원적으로 항상 그 나를 확실히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틀림없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주가 생겨나기 전에도 나는 있습니다.
이것이 위대한 전통의 절대적이고 근원적인 비밀이며, 이것이 모든 깨어남과 나타남과 사라짐의 비밀이기도 합니다.

2016년 02월 29일 강병균 교수(포항공대) cetan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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