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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2015-01-01, (목) 10:13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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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사유에서 깨달음의 문제
정평불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세미나 발제 1.
2016년 01월 21일 (목) 15:46:15 신승환(가톨릭대 교수)

1. 머리말

유럽 사유에서 “깨달음”의 문제가 어떻게 주제화되었는지 살펴보는 작업을 매우 어려울 뿐 아니라 사실 막연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 까닭은 무엇보다도 개념의 모호함과 방대함에 있다. 이러한 모호함은 먼저 지역과 연관된 명칭에서 비롯된다. 서양이란 말은 매우 모호한 개념이기에 우리의 주제를 위해 이 개념을 유럽적 사유로 제한하고자 한다. 이렇게 규정하는 순간 또 다시 주어지는 문제는 이렇게 제한한 유럽적 사유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설정해야하는가에 있다. “유럽적”이란 말 역시 기나긴 사유의 역사와 문화적 다양성을 포함한 용어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이란 주제에 집중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유럽적 사유의 범위를 그리스-로마적 기원을 두고 있으며 그리스도교(Christianity)적 유래와 결합되어 전승된 문화세계에 제한하고자 한다. 이 문제는 지금의 유럽이 그리스도교적 전통이나 신앙을 간직하고 있는지 여부와는 무관하다. 현재의 신앙과는 전혀 별개로 이렇게 규정한 유럽 문화가 그리스-로마적 체계와 철학, 문화적 기원과 함께 그리스도교적 신앙체계와 종교체계의 결합이란 기원과 유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럽적 사유라고 말할 때 우리는 불가피하게 이 두 기원과 그 사유의 축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으며, 이런 고려를 소홀히 할 때 유럽 문화에 대한 이해란 불가능할 것이다. 그와 함께 2,500년의 그리스 철학은 물론 이 철학과 길항하면서 이어져온 2,000년 이상의 유럽적 사유의 전통에 담긴 방대함이 이런 논의의 엄밀함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논의를 위한 앞선 작업으로 거론해야할 중요한 문제는 깨달음이란 말에 대한 개념사적 이해이다. 깨달음(覺)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 말인가. 깨달음의 주체는 누구인가. 이 문제는 결코 단순하지가 않다. 일반적으로는 깨달음을 요구하는 수행자일 것 같지만, 그리스도교적 전통 안에서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주체와는 별개로 깨달음의 대상이 깨달음에 개입할 여지가 있기에 깨달음의 주체 문제 역시 깨달음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려해야할 문제인 것이다. 그와 함께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며, 왜 깨달음을 말해야 하는 지에 대한 질문 역시 깨달음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물어야할 중요한 질문이다.
그리스-로마적 기원에서나 그리스도교적 전통에서는 깨달음이란 개념과 상응하는 말을 찾기가 쉽지 않다. 깨달음이란 말에 상응하는 개념을 설정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깨달음에 대한 앞 선 이해를 전제하기에 여기에는 해석학적 순환 구조에 대한 해명이 문제로 남는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 이와 가장 가까운 문화 철학적 용어를 찾으라면 진리 개념이란 맥락에서 진리를 이해하는 행위와 연결지어 논의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는 깨달음을 진리를 깨친다는 용어로 쓰이거나, 자신의 존재적 한계와 무지를 벗어나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진리 개념은 근대 철학 이후의 인식론적 진리가 아니라 깨달음이 지향하는 존재론적 진리, 내지는 유럽적 사유 전통을 관통하는 신적 지혜란 의미를 지향한다. 여기서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말은 로고스(logos) 개념이다. 이 글의 논의는 로고스 개념이 중요한 주제어로 다루어질 것이다. 동아시아적 사유 맥락의 깨달음에 상응하는 유럽철학적 개념으로 신비주의 전통과 진리 개념과 연결짓는 까닭은 신비주의 신학이 유럽전통에서 철학적 맥락과의 불가불리적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런 맥락에서는 신비주의 전통을 언급해야할 것이며, 그 전통 안에서 깨달음에 상응하는 개념을 논의해야만 한다. 불가피하게 이 짧은 논의에서는 유럽적 사유 전체를 거론할 수 없으며, 이런 맥락에서 의미를 지니는 신비주의 신학 전통에 입각한 제한된 관점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이런 앞 선 논의를 바탕으로 해서 이제 유럽 사유에서 불교적 깨달음에 상응하는 개념, 또는 유럽적 사유에서 논의할 수 있는 깨달음(enlightenment; Erleuchtung) 개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유럽 사유의 전통과 철학적 깨달음

1) 유럽 사유의 지평

앞에서 언급했듯이 유럽 문화의 특성이라면 그리스-로마 철학과 문화의 헬레니즘(hellenism)과 유대 그리스도교 전통으로 대변되는 헤브라이즘(hebraism)의 만남과 대결, 융합과 분리는 물론 그 두 사조의 동일성과 차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유럽 문화는 독특하게도 철학과 신학 전통,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지성적 작업과 신앙적 실천의 관계에서 형성되었다. 이 두 개의 축 가운데 어느 하나를 제외한 채 유럽 문화의 특성을 논의하는 일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설사 가능하다 하더라도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이런 성격은 초기 그리스도교가 형성되면서부터 있었던 전통이기에 이 둘의 동일성과 차이에서 이해할 때 그 본질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다. 원시 그리스도교를 접한 헬레니즘 문화권의 지식인들은 그들이 알고 있던 그리스 철학, 더 정확히는 플라톤(Platon) 철학의 맥락에서 이 신앙을 신학화하고 교리를 결정하면서 그리스도교를 형성해 갔다. 이렇게 복음화된 철학자들을 우리는 교부(敎父; Pater Ecclesiae)라고 부르며, 이들의 사유가 곧 그리스도교 신학의 핵심적 원리로 자리잡게 된다. 이들은 대부분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체계를 신앙적 깨달음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했다. 교리에 대한 이해는 신적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통한 존재적 변화와 함께 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위해 그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신비주의적 철학은 플라톤 철학을 열렬히 추종했던 플로티노스(Plotinos, 205-270)의 사유였다. 초기 교부들은 그의 신비주의적 철학에 근거하여 그들의 수행적 신학의 체계를 기초 지었다. 따라서 교부들은 그들 신앙의 원천인 그리스도교의 복음과 진리를 이해하고 깨닫기 위해 철학과 신비주의를 결합하고 이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지성적이며 신앙적 행위를 펼쳐갔단 것이다. 이런 전통이 신비주의 신학으로 이어지면서 유럽적 사유 전통에서 신적 진리를 이해하는 지성적 행위와 수행적 깨달음을 통합하는 사조를 대변하였다. 이들에게 지성과 신앙을 구분하는 일이란 거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유럽 전통에서 지성과 신앙, 철학과 신학을 엄격하게 구분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며, 적어도 16세기까지 이것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일은 거의 의미를 지니지 못했을 뿐 아니라, 주류적 관점을 대변하는 것도 아니었다.
유럽적 사유에서 깨달음 개념을 논증하는 작업은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도교 신학이란 두 흐름과 함께,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강조한 전통에 대한 이해를 떠나서는 불가능하다. 이런 까닭에 이 글의 논의를 이러한 전통과 흐름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신비주의 신학을 중심으로 펼쳐가려는 것이다.

2) 그리스 사유 전통에서의 깨달음

인간의 지성적 작업이 철학(philosophia)이란 이름으로 처음 성립된 곳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그리스 문화권이었다. 이들은 철학의 가장 중요한 질문인 존재자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규명하기 위한 작업을 전개하였으며 여기에 신비주의 신학의 결정적인 근거가 마련되었다. 이러한 지성적 작업으로서의 철학은 결코 근대에서 보듯이 사물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는 과정이 아니었다. 이미 플라톤이 철학을 “죽음에의 연습”이란 말로 규정했듯이 이들은 철학을 인간 존재의 전인적 완성으로 이해했다. 초기 그리스 철학은 존재하는 사물의 근거인 존재를 감추어진 데서 드러나는 것(aletheia)로 규정했으며, 이러한 진리를 “아는 과정”을 철학 본연의 과제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아는 것은 근대적 의미에서의 과학적 지식이 아니라 전 존재로 깨닫고 수용하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것을 “알다, 보았다”라는 말로 표현한다. 흔히 이론(theory)으로 알려진 단어(theoria: 觀照)의 원래 의미는 여기에 있다. 아는 것은 진리를 보는 것이며, 이를 자신의 존재로 받아들이거나 또는 그러한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래서 철학적 앎은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원천을, 이데아(Idea) 세계를, 본질적 영역을 직관하고 그 세계에 참여하는 과정이다. 이 세계는 로고스(logos)에 근거하여 이뤄진 세계이며 인간은 이 로고스를 나눠가지고(분여) 있기에 이 정신(지성, nous)으로 본질적 세계를 이해하고 바라보면서 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參與와 分與)
플라톤은 이런 열정을 가진 자를 철학자라 이름 했으며, 이런 행위를 철학으로 이해했다. 철학이란 말은 이렇게 의미 규정되었다. 로고스(logos) 개념을 처음으로 언급한 사람은 초기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keitos, 기원전 5세기)였다. 그는 자연 세계의 근거(arche)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하는 원리인 로고스이며, 인간 역시 여기에 따라 존재한다고 말한다. 인간 지성(nous)은 로고스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로고스 개념은 만물의 근거란 의미를 넘어 인간의 지성을 가리키기도 하며, 말을 의미하기도 한다. 유럽 철학의 역사는 이 로고스 개념을 정의(definition)하고 규명해 온 과정이며, 이에 대한 재해석의 결과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플라톤과 함께 유럽 철학의 두 원천 가운데 하나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종합하여 인간을 로고스를 지닌 동물(zoon logon exon)로 규정했다. 문제는 이 로고스 개념을 이성으로 해석한 데서 유럽철학의 본래적 성격이 형성되었다는 데 있다. 이러한 생각은 이후 현대까지 이르면서 유럽 철학의 유구한 전통이 되었다. 이제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이해하는 한 인간의 깨달음 역시 이성 범주와 어떻게든 연관될 수밖에 없게 된다.
예를 들어 현대 유럽 철학에서 깨달음에 상응하는 단어라면 칸트의 계몽 개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칸트(I. Kant)는 경험너머의 세계를 인지할 이성이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다는 독단에서 깨어나는 과정을 통해 이성의 한계와 작용에 대해 치밀하게 논증했다. 그는 순수이성(純粹理性 Vernunft)과 지성(知性; Verstand)에 대한 논증을 거쳐 이러한 지성을 자율적으로 사용할 능력을 갖춘 계몽(啓蒙 enlightenment; Aufklärung)의 철학을 전개했다. 유럽 근대 사회를 책임지는 계몽된 시민은 스스로에게 주어진 능력으로 지성을 사용하라는 준칙을 지켜가는 사람이다. 이러한 지성적 능력을 그 어떤 외부적 권위가 아니라 스스로 자율적(autonomy)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인 계몽 개념은 보편적으로 이해된 깨달음 개념에 가장 가까운 말일 것이다. 칸트 철학이 2,500년 유럽 철학의 종합이며 새로운 해명이라면 철학과 신학, 지식과 신앙이 벗어날 수 없는 두 축으로 이루어진 그들의 전통에서 이성적 인식을 체계화한 가장 중요하며 결정적인 사유임을 누가 부정할 것인가. 과연 이런 전통을 부정하고 어떤 비의(秘義)적이며 세상 사람들은 감히 근접할 수 없는 특별한 깨달음이 세상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것일까.
이처럼 유럽 철학의 첫 시작에서부터 이들은 인간 본연의 과제를 로고스에 대한 지성적 작업과 실천적 행위를 연결하여 존재자의 존재, 본질적 세계를 직관하고 이를 이해하며 바라보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계몽은 세속화된 깨달음의 개념이다. 그래서 고대 사상의 원천을 종교적 관점에서 논증하는 암스트롱 같은 사람은 그리스 철학이 인식론적 학문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수련하는 실천적 행위, “영적 수련”이라고 규정한다. 그 행위의 목적은 당연히 인간 존재의 성취와 완성에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에서 현세 세상은 선(善; agaton)의 이데아(idea)를 반영한 가상의 것(mimesis)이기에 인간은 자신의 지성(nous)과 영혼(psche)으로 이 본질적 세계로 향해 가야한다고 말한다. 이 본질적 세계에 이르는 것은 영혼이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며 여기에 영혼의 자유와 구원이 자리한다. 영혼은 육체의 사슬에 갇힌 죄수와 같다. 그 안에 갇힌 존재의 불꽃은 지성과 영혼으로 이 초월세계, 영원불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려한다. 철학은 이를 위한 영적인 작업이며, 이러한 깨달음을 지향하는 지성적 노력에 매진하는 사람이 철학자들이다.

3. 유럽 신비주의 전통과 깨달음

1) 신비주의 신학과 철학

그리스 철학의 이러한 전통은 그리스도교와 결합하면서 히브리적 사유 전통(hebraism)과 만나게 된다. 이들은 그리스도교에 의해 만나 갈등과 융합의 과정을 거치면서 현대 유럽 사유를 결정하는 두 요소로 작동한다. 이 두 사조는 많은 차이를 지님에도 그리스도교적 신비주의 신학 안에 초기 그리스 철학과는 다른 새로운 깨달음의 전통을 형성하게 된다.
유럽 사유에서 영적인 깨달음에 대한 이해는 흔히 영성(靈性 : spirituality)이란 말로 표현되었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신적 삶을 표현하거나 많은 경우 신비신학의 영역에서 사용되었으며, 때로는 수도생활과 그 정신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개념이기도 했다. 초기 그리스도교 이래로 이 말은 은수자나 수도자의 역사에서 신을 따르는 삶과 신적 체험을 위한 고행과 절제, 기도와 관상(contemplatio) 등 실천적 영역을 표현하는 용어였다. 나아가 영성이란 말은 그리스도교적 맥락에서는 객체적인 교회의 교리적 차원과는 구분되는 신비주의적이며 실천적 영역, 수도자들의 공동체적 신심이거나 그 원리를 가리키는 용어로 이어져 왔다. 그래서 이 개념은 신앙의 영적인 측면이나 신에 의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태도 등을 가리키는 용어로 확대되었다. 즉 영성 개념은 그리스도교적 정신이나 윤리 영역을 가리키거나 참된 진리를 향한 열정 등의 맥락에서 사용되었다. 또는 이와 별개로 사회적 맥락에서 영성 개념은 “영적인 삶(vita spiritualis)”과 “사회적 삶(vita socialis)”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 세속적 삶과 그를 떠난 신앙의 삶, 그 사이의 관계 설정에 따라 다양한 표현으로 나타났다. 그리스도교적 맥락에서는 신비주의 신학은 이러한 영성개념과 연결지어 인간의 영적인 깨달음과 신적 존재와의 일치에 관한 논의를 탐구하는 수행적 학문으로 자리 잡게 된다.
영성 개념과는 별개로 영적인 깨달음에 대한 이해는 무엇보다도 신비주의 신학 전통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신비주의는 궁극적으로 신(神)적 실재와의 일치, “신적 존재와 하나가 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신학사적 측면에서 서구 신비주의는 위디오니시우스(Pseudo Dionysius Areopagita)에서 시작되어 그리스 교부들의 오랜 전통과 함께 한다. 여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신플라톤 철학, 그 가운데에서도 플로티노스(Plotinos)의 철학이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체험을 신학적으로 확립한 초기 교부들은 그들의 신학 작업을 위해 플라톤 철학을 원용한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와 함께 그들의 영적인 깨달음에 대한 체험을 추론적 표현으로 진술하는 데 있어 특히 플로티노스의 철학에 힘입은 바 크다는 사실은 현대 유럽 사유에서 깨달음을 이해하는 데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크다 하겠다.
그럼에도 이러한 작업에 이들 교부들은 그리스도교적 신앙체험을 가장 중요한 원천으로 삼았다. 예를 들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Titus Flavius Clemens)는 그리스 철학에는 생소한 우주에 대한 “무(無)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사상을 그리스가 철학과는 구별되는 중요한 진리란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 히브리 성서가 아니라 70인역 그리스 성서(Septuaginta)에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이 사상은 창조 개념의 독특성과 함께 “무와 존재”에 대한 사유를 논의하기 시작한 그리스 철학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이는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유대 그리스도교의 철학적 응답 가운데 하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스철학을 수용했음에도 교부들은 그들 신앙 체험의 고유성을 잊지 않았다. 여기에 매우 중요한 매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로고스 신학이다. 그리스도교적 신비주의 전통에 따르면 영적인 깨달음은 근본적으로 신적 존재와의 관계에서 이해되기에 신적 존재와 본성에 대한 이해와 함께 인간의 영적 특성에 대한 이해가 핵심적 원리로 자리한다. 이 과정은 신적 본성을 향한 인간 영혼의 상승과 하강 도식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2) 영적 깨달음의 길

영적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인간은 정화(via purgativa)와 조명의 길(via illuminativa)을 거쳐 일치의 길(via unitiva)이란 세 가지 단계를 거치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마침내 신적 본성과 신비적 일치(unio mystica)를 이루는 데 신비신학의 목적이 있다. 그 과정은 한편으로 신적 본질이나 그 세계에 대한 것뿐 아니라, 그에 대한 체험과 초월적 영역에 대해 이해하거나 감지하는 문제로 나타난다. 영성이란 이런 마음상태를 표현하는 용어이다. 영적 깨달음이 영성과 관계되기에 신비신학은 여기서 나아가 영적 체험을 위한 실천적 과정을 중요하게 받아들인다. 이런 과정은 신적 합일을 위한 자기 비움(kenosis)을 이뤄가는 영적 수련의 단계이며 목표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영적인 깨달음에 도달하며, 또한 깨달음이 자기 비움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신비주의 신학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세 단계의 과정을 언더힐은 자연적인 세계와 본질적인 세계 및 초본질적인 세계에 대한 논의와 같다고 말한다. 초본질적 세계에 대한 인식이 위 디오니시우스에서 보듯이 관상에 의한 것이든, 또는 신적 조명에 따른 것이든 그것을 신비주의는 “이성을 넘어, 이성을 초월하여, 움직임이 없는 신성의 깊은 고요함 속으로 삼켜지는” 삶으로 규정한다. 그것을 언더힐은 신적인 로고스 그리스도의 영역이라고 말한다. 플로티노스에 따르면 최고의 존재자와의 신비한 일치는 일자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그 지식을 넘어서는 실제적인 현존에서 주어진다. 그러한 일치를 정신은 존재와 사유, 생명을 자신 안에 삼중적 통일성으로 체험하지만, 이 통일은 그와 함께 영혼이 이를 초월하는 가운데 가능하다.
전통적인 신비주의는 물론 현대의 영성 논의에서도 핵심이 되는 요소는 바로 여기에 있다. 신비주의의 본질은 이러한 초월적 의식과 신비적 일치에 대해 철학이 자신의 언어로 이를 표현하고 절대적인 것을 직관할 능력에 있다. 그래서 언더힐은 “가장 완전히 인간적인” 인간 안에는 이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인식하고 표현할 능력이 있으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철학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교 철학의 핵심은 이성을 초월하지만 이성에 모순되지 않는 이러한 초월적 지식에 이르는 특수한 길이 되어야 한다. 이런 이해를 언더힐은 “참된 영적 철학”이라 부른다. 인간이 자아를 다만 감성이나 정신의 작용에서만 파악하지 않고 그를 넘어서는 어떤 초월성에 대한 감수성으로 이해한다면 이러한 것의 본질적 특성에 대해 존재론적 해석학의 관점에서 논의할 여지는 충분하다 하겠다. 그 까닭은 하이데거의 말처럼 존재자의 존재는 단적인 초월이기 때문이다. 존재의미를 사유하는 철학은 결코 초월에 대한 성찰을 배제한 체 이루어지지 않으며 이를 위한 영적인 변화와 깨달음이란 맥락을 벗어나 자리하지도 않는다.

3) 깨달음 개념과 인간 본성

깨달음 개념을 논의하기 위해 인간 본성이 지향하는 바를 새롭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인간 본성은 현대 진화심리학에서 말하듯이 진화적 관점에서 생겨난 의식의 결과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내적 본성은 진화심리학자들의 주장처럼 “생존과 번식을 위해 역설계된 연산기관”을 넘어, 다른 생명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마음을 지니고 있으며, 심지어 타자를 위해 희생하기 까지 한다. 정신적 추론 행위는 말할 것도 없지만 인간의 마음은 과거를 해석하고 역사를 기억하며, 미래를 기획하고 결단하는 본성도 지니고 있다. 이런 경험적 사실에서 우리는 인간 본성을 초월성이란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종교학자 암스트롱에 의하면 초기의 그리스 철학은 본질적으로 근대 이후의 과학자와 같은 태도로 자연의 기원과 물질의 근원을 탐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에게 있어 철학은 훨씬 더 우주의 기원에 대한 탐구와 존재의 성취가 함께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있어 철학은 이성의 학문이 아니라 탐구자의 존재 경험과 함께 하는 수행의 학문이었다. 철학은 신의 현존과 근원적 진리를 논리적으로 탐구하는 이론(theory)체계가 아니라 그 현현을 직관하는 관상적 삶(theoria/bios theoretikos)이었다. 그를 통해 인간은 참된 행복(eudaimonia)을 얻게 된다. 철학의 행위는 참여자의 존재를 바꾸어 놓는 체험(metanoia)이며 영적인 황홀(extasis)를 맞보게 한다.
신비신학의 전통은 한결 같이 깨달음의 과정에 담긴 영혼의 상승과 하강에 대해 언급한다. 바이어발테스는 영적인 깨달음을 위한 이런 성격을 내재와 초월 사이에 있는 영혼의 상태란 말로 요약한다. 그 사유의 핵심은 비록 플로티노스의 철학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이런 사유는 영적 깨달음의 핵심을 이루는 요소이다. 영혼의 상승과 하강은 인간의 존재론적 본성이 내재하면서 초월하는 본성과 밀접히 연관된다. 그래서 바이어발테스는 영혼의 작용은 “항상 ‘안으로’와 ‘너머로’ 간의 변증적 관계를 통해 특징”지어지며, 이는 인간이 정신을 통해 사유하는 한, 그 정신은 ‘우리 것’이지만, 그 영적 작용으로서의 영혼은 “초월하고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근거”로서 경험된다고 말한다. 인간 영혼은 이같은 내재와 초월을 통해 존재와 사유, 생명의 통일성을 이루어간다. 영혼이 이러한 자각을 통해 참된 자아로 돌아서고, 근원을 의식할 때 영혼은 정신이 된다. 그럴 때 “영혼은 순수하게 정신적인 것 안에” 있으며, 영혼도 “정신이 존재하는 그대로 있”기에 영혼이 정신과 하나 됨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그는 정신과 영혼의 관계를 “초월적이며 동시에 내재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철학이 지성적 행위를 통해 인간의 존재론적 변화와 성숙을 지향한다면 이는 존재론적 맥락에서 이루어질 것이며, 그런 관점에서 영적인 깨달음에 대한 이해 역시 존재론적 맥락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깨달음을 논의하는 철학적 지평은 존재론적 맥락에서 규정되는 초월성(transcendence) 이해와 함께 할 수밖에 없다. 초월성이 인간의 인간다움을 완성하는 본성적 능력에 관계된다면, 그 개념은 영적 체험과 깨달음의 특성과 관련지어 해석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초월성이 단지 외부의 어떤 초월적 실재를 향한 것으로 보지 않을 때 우리는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영역에 내재하면서도 그 한계를 초월하는 내재적 초월성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슈나이더스는 영성을 먼저 한 사람의 정신생활에서 형성되어 인간 존재의 근본적 차원에 관계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영성은 그런 과정을 통한 궁극적인 어떠함과의 관계 맺음이며, 그 안에서 초월적 통합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 주체의 문제라고 이해한다. 이것은 결국 자기초월(self-transcendence)을 지향하는 인간의 존재론적 차원의 문제이며, 궁극적인 어떠함과의 관계를 현실화하는 삶과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4. 로고스 개념에 기반한 깨달음 개념

1) 깨달음 개념의 논의에 있어 고대 그리스 사유의 로고스(logos)론을 복음 사건과 연결지어 사유한 전통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원시 그리스도교가 예수의 복음을 교의화하는데 그리스 철학은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그리스 철학은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던 시대의 철학일 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정치한 이론과 사유는 그리스도교의 신학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이론체계였다. 이런 흐름은 이미 초기 그리스 교부에서 보듯이 서구 그리스도교의 오랜 전통이며 그 신학의 역사를 관통하는 경향이기도 하다. 잉에는 이러한 전통에 따라 틀 지워진 영성 이해를 로고스 그리스도론이란 이름으로 해명하려 한다. 그는 신약성서의 서간문에서 기원 100년 이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요한복음」보다 더 먼저 “logos” 개념을 그리스도와 연결하여 사용한 용례를 다수 제시한다. 이 사유는 바울로 서간 여러 곳에서 발견되며, 이런 사유를 최초로 제시한 사람이라면 단연 이 서간문을 작성한 바울로이다.
그럼에도 로고스 그리스도론 사유를 명쾌한 언어로 집약시켜 표현한 문헌이라면 서슴없이 「요한복음」의 서문을 꼽아야 할 것이다. 이 대목이야 말로 로고스 그리스도론에 입각한 영적 변화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전거가 된다. 「요한복음」 서문은 로고스(logos) 개념을 그들이 믿는 하느님의 아들과 연결시키고, 이 두 근원적 경험을 신학적이며 영성적 층위에서 상호작용하면서 그 원리를 매우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원리는 이후 교부들에 의해 계승되고 심화되면서 그리스도교 영성 이해는 물론, 신학적 교의를 결정하는 중요한 전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베어는 이런 전통이 신앙에서는 히브리적 근원을 간직하면서도 그 “언어와 형태의 힘”은 헬레니즘적이며 이런 전통이 신비주의의 언어를 관통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는 말씀을 통해 신앙의 신비를 재현하고 이를 현재화시켜갔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원리로 작용한 것은 당연히 신적인 성격으로 해석된 로고스이며, 그를 근거 짓는 원천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였음은 새삼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2)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에서 발견되는 로고스에 대한 언급은 변형된 형태로 「요한복음」 곳곳에서 수용된다. 헤라클레이토스 단편의 연대가 「요한복음」에 비해 적어도 500여년 앞서 쓰여진 사실을 고려한다면 그 영향사적 맥락을 충분히 추론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헤라클레이토스 단편에서 로고스에 대해 “이는 언제나 그러한 것으로 있지만 사람들은 듣기 전에도, 일단 듣고 나서도 언제나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이 로고스에 따라서 생기건만, 내가 각각의 것을 본성에 따라 구분”하기 때문이라는 말은 그대로 「요한복음」에(1장 9절) 반복된다. 또한 “로고스는 공통의 것”이거늘 “많은 사람들이 마치 자신만의 생각을 지니고 있는 듯이 살아”간다거나 “전체를 다스리는 로고스”, 또는 “어떤 말”로 이해하며 지성(nous)으로 언급한 대목은 물론 “신적인 로고스”에 대한 언급은 요한복음은 물론 그보다 먼저 쓰여진 바울로 서간에서 다수 발견된다. 이런 면에서 그리스의 로고스 개념은 이미 원시그리스도교에서 교의를 정식화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신성과 관련하여 인간 본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전거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헤라클레이토스에서 로고스 개념은 만물이 생성 소멸하는 원리이며, 사물의 본성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되었다. 이 로고스는 자신의 원리를 만물을 통해 드러내지만, 그럼에도 이 드러남을 결코 사람들이 자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그러한 명시적 형태는 아니다. 로고스는 일차적으로 말이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그 의미가 발전하면서 이성적 사고나 논리적 추론을 뜻하는 데로 확산된다. 그럼에도 그리스도교는 성서적 전통에 따라 로고스 개념을 하느님의 말씀과 연결지어 이해했다. 예를 들어 교부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155-230)는 로고스를 “verbum, sermo, ratio” 등으로 번역하다가 이 말을 일의적으로 개념화하기 위해 말씀(verbum)만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에 따라 로고스 의미의 다양함이 현저히 줄어든 측면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성서가 체험하는 하느님의 본성에 미루어 이 번역은 이후 일반적인 용례로 수용되기에 이른다. 로고스는 하나이며 동일한 영이지만, 그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여럿으로 나뉘어져 나타날 수 있다.
로고스를 내적인 영적 기능(endiathetos)이거나, 또는 말과 행위로 표현된 생각(prophorikos)으로 이해할 때 이는 신적 현현 및 재현과 연결된다. 로고스 그리스도론은 예수에게서 인성과 신성이 함께 작용한다는 사유를 통해 인간의 영적 본성에 대한 이해를 이끌어 내었던 것이다. 나아가 이 로고스론은 신적 지혜와 신적 진리를 상징하거나, 이에 대한 지성적 깨달음과 연결되어 해명되기도 한다. 잉에는 「요한복음」에 나타난 영에 대한 언급은 거의 모두 로고스 그리스도론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해는 이후 교부들의 신학에서는 일반적으로 발견된다.
유스티누스(Justinus 100-160년)를 비롯한 교부들은 물론, 특히 초기 그리스교 신학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년)에서 이런 사유는 핵심적 요소가 된다. 이런 논의는 신성의 로고스적 특성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러한 본성을 감지하는 인간의 지성적 특성을 해명할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 신비신학에서는 신성에 대해서는 결코 올바르게 알 수가 없으며 그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무지하다고 말한다. 신성에 대해서는 다만 알 수 없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신성에 대한 지식은 신성을 이해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그 이해는 한계를 지닌다는 이중성을 지닌다. 로고스 개념의 이중성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이러한 신비신학의 주장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가 있게 된다. 로고스 그리스도론에 따르면 그 신적 본성에 대한 이해는 알 수 없음을 아는 것이며, 그러한 알 수 없음을 통해 앎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음을 이야기 한다. 영적인 깨달음은 이러한 특성을 지닌다. 그 깨달음은 어쩌면 깨달아야할 목표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며, 이 없음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현재의 지평으로 되돌아오도록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신비신학의 중요한 형태인 부정신학(negativa theologia)적 방법은 이런 관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영혼의 특성은 사유와 추론적 특성을 지니는 정신과 구별되기에, 영성적 측면에서 초월성을 논의한다면 앎과 알 수 없음이란 이중성과 부정의 길을 통한 방법은 불가피한 선택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5. 맺음말

깨달음과 관련하여 유럽 사유와 동아시아적 사유에 담긴 결정적인 차이는 적어도 세 가지 관점에서 구분해 제시할 수 있다. 무엇보다 먼저 유럽 사유는 인격적 최고 존재자로 상정된 신에 대한 관계를 떠나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물 세계와 존재자에 대한 인식론적 지식을 넘어서는 형이상학을 규정하면서 이른 사고를 준비하였다. 그는 초월적 영역을 다루는 형이상학을 “자연적인 영역을 넘어서는 데 관계되는 학문”(meta physica)으로 정의하면서 이것은 궁극적으로는 모든 존재자의 존재자인 “테오스”(theos)에 관한 학문이라고 말한다. 이 “테오스”란 개념이 후대 그리스도교와 만나면서 그리스도교의 신과 결합하게 되는 것이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유럽 사유의 역사였다. 그럼에도 이 두 개념 사이에는 결정적으로 위격성(位格性; personality)이란 면에서 차이를 지닌다. 위격성 개념은 예수에 의해 선포된 그리스도교 신의 본질적 속성이다. 이 개념을 이후 교부들, 특히 보에티우스(Boetius)에 의해 위격성으로 해명되었으며, 인간과 신의 본성에 담긴 동일성이란 측면을 강조하면서 인격성으로 이해되었다. 신비주의 신학에서의 깨달음은 위격성을 지닌 최고의 존재자에 대한 참여와 일치에의 열망과 밀접히 연결된다. 깨달음의 주체는 수행자이지만, 그의 깨달음은 결코 그 자신의 수행에 의해 달성되는 결과가 아니다. 인격적 최고 존재자의 참여 없이는 깨달음이란 불가능하기에 이 전통 안에서 깨달음이란 수행자와 최고 존재자의 상호 관계를 떠나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은 동아시아적 사유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그 어떤 본질적 진리에 대한 깨침과는 구별되는 특성이다.
둘째 신비주의 신학은 그리스도교적 영성과 밀접히 연결된다. 영성(spirituality) 개념은 그리스도적 깨달음은 물론, 영혼의 내적 성장 내지 영성수련 논의의 근거가 되는 핵심적 개념이다. 유럽 사유에서 깨달음은 신비주의 신학적 수행과 영성수련이란 맥락을 떠나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이런 수행 과정에서 자기비움(kenosis) 등의 과정에 담긴 유사함은 어쩌면 인간이 지닌 보편성에 따른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리스교 신학에서는 이 자기비움을 신앙실천의 핵심적 교리로 제시한다. 영적 깨달음을 위한 길의 깊이에 신비가나 수도자의 차이를 있을지 모르지만, 영적 깨달음이란 보편적 명제에 있어서 세상의 사람과 수도자는 동일한 결단을 요구받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거쳐야할 보편적인 가르침이다. 다만 수도자와 세상 사람들이 수행하는 과정을 결정하는 근거와 지향점에서 동아시아적 사유와 그리스도교 영성이 차이를 지닐 것이다.
셋째 신비주의 신학은 유럽 철학과의 밀접한 상호관련 안에서 이해된다. 이 점은 동아시아 사유에서 유가와 불가, 또는 노장 사상이 지니는 상호관련성과 연결지어 이해할 때 해석학적 맥락에서는 동일할지 모르지만 구체적으로 현재화된 측면에서는 명확히 차이를 지닌다. 유럽적 사유에서 탄생한 신비주의 신학 전통과 그에 따른 깨달음 전통에는 그리스 철학에 의해 동기 지워졌으며, 학문적으로 상호작용한 관련성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와 함께 유럽 사유에서의 깨달음 개념이 철학 본연의 특성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에 철학의 본성에 미루어 이 개념을 현재란 지평에서 새롭게 정초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철학은 그 시작에서부터 인간의 전 존재론적 변화와 존재 성취에 관계되며, 이를 위한 존재론적 이해와 해석 작업을 수행하는 인간 지성의 노력이다. 이후 근대에 이르러 인식론적 철학의 발전과 함께 자연과학적 지식 체계가 정초되었으며, 이에 따라 새로운 학문체계가 형성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자연 사물과 인간의 외적 관계론에 따른 과학적 학문을 넘어 존재론적 이해의 학문을 통한 깨달음 개념을 새롭게 정초해야할 필요가 절실하다. 철학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존재론적 이해의 학문이다. 그러기에 깨달음 개념을 해명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해석학적 순환 구조에 따라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는 존재론적 변화, 신비주의적 전통에 따라 표현한다면 영적인 변화의 지성적 작업으로 이어져야할 것이다. 현재적 변화와 존재론적 이해의 맥락을 벗어나는 깨달음 이해는 다만 근대적 의미의 과학적 지식에 그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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