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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2015-01-01, (목) 10:13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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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에 대한 쟁점 및 맥락적 지향성
정평불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세미나 발제 2.
2016년 01월 21일 (목) 16:03:53 이도흠(한양대 교수)

1. 머리말

근자에 현응스님이 깨달음을 “연기성과 공성에 대해 잘 이해하는 것”이라고 언급한 이래 이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주지하듯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다. 깨달아서 부처가 되는 것이 불교적 인간관의 목표이기도 하다. 붓다를 따르는 이로서 이보다 더 중요한 담론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 자신의 교리 입장에서 타인의 교리를 비판하며 팽행선을 달리는 소모적 논쟁을 되풀이하고 있거나 개념 정의에 치우쳐 생산적인 논쟁으로 승화되지 못하거나 핵심은 비켜간 채 지엽의 오류를 들어 전체를 부정하는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듯하다. 이에 기존의 틀과는 ‘다른 차원에서’ 쟁점을 구성하고 쟁점별로 비교, 판석하여 지금 여기, 21세기 한국사회에서 진정한 깨달음과 그 길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최초의 깨달음과 그 이후 대승과 선에서 깨달음’, ‘언어의 공성(空性)과 인언견언(因言遣言)의 문제’, ‘돈오(頓悟)와 해오(解悟) 사이의 대립과 회통(會通)’, ‘깨달음과 마음/몸의 관계’, ‘깨달음과 열반의 관계’, ‘깨달음과 苦의 관계’, ‘깨달음의 진화와 맥락적 지향성’ 등 일곱 쟁점으로 나누어 분석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 가운데 ‘깨달음과 열반의 관계’ 및 ‘깨달음과 고(苦)의 관계’는 지면관계상 생략하고 다른 지면에서 논하고자 한다.
이 작업을 할 때, 기존의 돈점논쟁에서 빚어진 문제를 답습하지 않으려면, 우물 안 개구리나 서로 동일성을 강화하는 권력적 행사에서 벗어나려면, 불교의 교리에 충실하되 불교의 틀을 벗어나 기호학, 인지과학, 인류학 등 과학의 반열에 오른 인접학문을 과감하게 수용하여 따져보아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달라이 라마는 과학과 불교가 마주칠 때 과학을 지지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것이 우물안 개구리나 평행선의 논쟁을 벗어나는 길이리라.

2. 최초의 깨달음과 그 이후의 깨달음

현응 스님은 초전법륜이 설해지고 있는 『마하박가』를 바탕으로 깨달음을 이해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선을 따르는 이들은 이를 거세게 비판하며 돈오나 구경각(究竟覺)만이 깨달음이라 주장한다. 그럼, 먼저 최초의 가르침과 깨달음이 담긴 『마하박가』 제 1장 ‘깨달음’에서 초전법륜이 행해지던 장면을 보자.

석존께서는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두 가지 극단이 있으니 출가자들은 결코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하나는 여러 가지 애욕에 빠져 그것을 즐기는 것이니, 그것은 열등하고 세속적이고 범부의 짓이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 되는 바가 없다. 다른 하나는 스스로를 괴롭히는 짓에 빠져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니, 그것도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 되는 바가 없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원만히 잘 깨달았다. 중도는 눈을 뜨게 하고 앎을 일으킨다. 그리고 고요함과 수승(殊勝)한 앎과 바른 깨달음과 열반에 도움이 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여래가 원만히 잘 깨달았고, 눈을 뜨게 하고 앎을 일으키고, 고요함과 수승한 앎과 바른 깨달음과 열반에 도움이 되는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八正道]를 말하는 것이니,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래가 원만히 잘 깨달았고 열반에 도움이 되는 중도이다. 그리고 비구들이여, 여기에 성스러운 고제(苦諦)가 있다. 곧 태어남도 괴로움, 늙음도 괴로움, 병듦도 괴로움, 죽음도 괴로움이다. 좋아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 사랑하는 것과 헤어짐도 괴로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간단히 말하면 오취온(五取蘊)은 괴로움이다.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에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집제(集諦)가 있다. 곧 재생(再生)을 유도하고 희열과 탐욕을 동반하여 이곳 저곳에 집착하는 갈애이다. 다시 말하면 애욕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가 그것이다. 비구들이여, 여기에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멸제(滅諦)가 있다. 곧 갈애를 남김없이 소멸하고 포기하고 버리고 벗어나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여기에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성스러운 도제(道諦)가 있다. 곧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을 말하는 것이니,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것이 성스러운 고제이다’라는 예전에 결코 들어보지 못한 법에 눈을 떴고 지혜가 일어났고 앎이 일어났고 광명이 일어났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 성스러운 고제를 두루 알아야 한다’라는 예전에 결코 들어보지 못한 법에 눈을 떴고 지혜가 일어났고 앎이 일어났고 광명이 일어났다.
(…중략…)
비구들이여, 나는 사성제를 이와 같이 세 번씩 열두 단계로 관찰하여, 있는 그대로 깨끗하게 알았기 때문에, 나는 천신, 악마, 범천의 세계와 사문, 바라문, 인간의 세계에서 가장 높고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훌륭히 성취하였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또한 나는 알고 보게 되었다. 나의 해탈은 흔들림이 없다. 이것이 최후의 생존이니, 이제 다시 괴로운 존재를 받지 않는다.”

석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다섯 비구는 매우 기뻐하였다. 그리고 석존께서 이 가르침을 설하시자, 꼰단냐는 먼지와 때를 멀리 여윈 법안(法眼)을 얻었다. 곧 ‘모여서 이루어진 것은 모두 소멸한다’고 깨달았던 것이다.
석존께서 법륜을 굴렸을 때, 땅의 신들이 소리쳤다.
(…중략…)
이리하여 꼰단냐 장로는 그때부터 안냐 꼰단냐(Añña Kondañña)로 불리게 되었다. 진실로 안냐 꼰단냐는 법을 보았고, 법을 얻었고, 법을 알았고, 법을 꿰뚫었다. 의심에서 벗어났고, 망설임을 제거했고, 두려움이 없었고, 스승의 가르침 외에 다른 것은 필요없게 되었다. 그가 석존께 청했다.
“석존이시여, 저는 석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고자 합니다.”
석존께서 말씀하셨다.
“오너라, 비구여. 내 이미 교법을 잘 설해 놓았다. 바르게 괴로움을 소멸시키고자 한다면 청정한 수행을 하라.”
안냐 꼰단냐는 이렇게 구족계를 받았다. 석존께서는 나머지 비구들에게도 교법을 설하셨다. 그때 밥빠(Vappa) 장로와 밧디야(Bhaddiya) 장로가 먼지와 때를 멀리 여읜 법안을 얻었다. 곧 ‘모여서 이루어진 것은 모두 소멸한다’고 깨달은 것이다.”

위의 인용문만 보더라도 석존은 중도, 사성제, 팔정도, 무아설 등의 불교 교리를 말씀하시고 꼰단냐, 밥빠, 밧디야 등이 이를 듣고 무명에서 벗어나 법안을 얻고 깨달음에 이른다. 지면관계상 생략하였지만, 마하나마(Mahānāma) 장로와 앗사지(Assaji) 장로도 이들과 똑같이 깨달음에 이르고 구족계를 받는다. 다른 경전을 보면 십이인연도 초전법륜에서 행해졌다. 여기서 발신자는 석존이고 수신자는 꼰단냐 등 비구이고, 통로는 설법이고, 이들이 발화하고 수신하는 맥락은 석존이 비구들을 깨달음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설법을 하는 자리다. 『마하박가』에 따르면, 석존은 원래 ‘어둠의 뿌리로 뒤덮인 자’들에게 법을 설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지만, 범천 사함파티가 여러 차례 간청하자, “귀 있는 자들에게 불사의 문을 열겠으니”라며 법문하기로 결정하고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알라라 칼라마와 웃타카 라마풋타 대신 네란자나 강변에서 함께 고행했던 다섯 비구에게 먼저 설법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이 바로 당시 바라나시 근교의 이시파타나의 녹야원에 있었던 다섯 비구인 콘단냐, 밥빠, 밧디야, 마하나마, 앗사지다. 석존은 무명에 사로잡힌 다섯 비구들에게 중도와 사성제, 팔정도와 무아설의 가르침을 전하며 이 설법을 통하여 다섯 비구들은 무명에 벗어나 법안(法眼)을 얻고 깨달음에 이른다.
이를 근거로 현응스님은 “한마디로 부처님이 각자(覺者)라 할 때 그 깨달음은 ‘연기관(緣起觀)의 이해를 확립함이며, 삶의 괴로움의 문제를 이러한 통찰과 이해로서 해결하는 것’이라 하겠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고도로 수련된 높은 정신세계를 이루는 것이라 하지 않았다. 깨달음은 ‘잘 이해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부처님 자신도 고행을 통해서도 아니요 선정을 통해서도 아닌, 논리적인 사유와 성찰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다. 부처님이 녹야원의 첫 설법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당신의 깨달음의 세계를 설명하고 납득시키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며칠이 걸렸을 뿐이다. 그리고 ‘납득시킨다’는 말을 썼듯이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이라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어서 “『마하박가』에 나타난 교화과정에서 부처님은 선정에 대해 강조하거나 선정수행을 하도록 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어쩌면 가장 현대적인 방법으로 가르쳤다. 설법, 질의응답, 토론으로 지도하고 가르쳤다.”라고 추가하였다.
이에 대해 수불스님은 “정작 『마하박가』에는 부처님께서 깨달음은 잘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대목을 찾기 어렵다. 오히려 깨달음은 사유의 영역을 초월한다고 하셨다. 부처님 말씀대로 깨달음이란 곧 ‘불사(不死)를 성취하는 것’인데, ‘잘 이해하는 것’으로 어떻게 불사를 성취할 수 있겠나.”라고 전면적으로 비판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깨달음이 잘 이해하는 것이냐, 아니면 사유의 영역을 초월하는 것이냐’의 여부가 아니다.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가르침을 전하고 다섯 비구가 깨달음에 이른 원형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 ① 아난의 기억 → 경전 → Sati, 念(小/大乘)
* 佛法 → ② 달마의 혁명 → 公案 → 禪定(頓悟/漸修)
↘ ③ ? → ? → ?

현실과 이를 재현한 소설의 차이처럼, 원본과 재현 사이에는 늘 괴리가 크다. “현실은 기호, 세계관, 권력 및 이데올로기, 형식과 구조, 시간의 개입 내지 매개 때문에 그대로 재현되지 않는다. 해석의 과정에서도 세계관, 역사관, 권력 및 이데올로기, 형식과 구조, (미래의) 지향성이 개입하거나 매개하여 다양한 해석의 파노라마를 빚어내고 의미를 무한히 미끄러지게 한다.” 부처님의 몸짓과 말씀, 화두 또한 불법의 재현일 뿐이다. ①은 석존의 말씀을 아난의 기억, 성중의 기억, 팔리어대장경, 범어대장경, 한역대장경, 티벳대장경, 고려대장경으로 이어진 길이다. 이는 초기 불전에 대승적 추론과 상상력이 보태지면서 소승과 대승으로 나누어진다. 우선 언어로 재현되면서 언어의 한계로 인하여 왜곡이 생겼고 기억은 늘 왜곡되고 파편으로 남기에 이동하는 사이에 점점 시간의 거리만큼이나 말씀의 거리도 상존한다. 경전끼리 서로 맞서는 부분이 나타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②는 부처님의 마음을 지금 여기에서 현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언어의 한계를 갈파하고 부처님의 말씀이든 그 말씀을 언어로 재현한 경전이든 불법과 거리가 있다고 보고 시공간의 거리를 뛰어넘어 선정을 통하여 부처님의 마음, 본래 면목에 다다르고자 하는 길이다. 이 길은 돈오와 점수로 다시 나누어진다. 언어의 한계를 돌파하여 불법에 이르는 길이지만, 도달하기도 증명하기도 어렵다. 이는 조사의 말과 몸짓과 의하여 현전하므로 재현의 왜곡과 괴리를 넘어선다. 하지만, 공안을 매개로 할 경우 현전은 재현으로 전환한다. 선을 옹호하는 이들은, 차이는 아주 크지만, 이 또한 재현의 왜곡을 겪게 됨을 직시해야 한다.
현응스님이 오해할 기술을 하고 용어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두 글을 『깨달음과 역사』와 함께 깊이 읽으면, ②의 길을 부정하고 ①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①과 ②의 길을 다같이 인정하되, ②의 길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천여 년 전에 중국에서 멈춘 그 자리에 ③의 길을 새롭게 모색하자는 것이다. ③의 길도 재현인 것은 분명하다. 여기서 ③의 길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①의 ②길과 차이를 형성하면서도 ①이나 ②보다 원본인 불법에 더 가깝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이럴 때 원본인 불법을 알 수 없으므로 그것이 처음 재현되는 상황을 묘사한 『마하박가』를 인용하며 원본인 불법을 유추하려 한 것이다. 수불 스님이나 수좌회, 서재영 박사는 이런 핵심을 무시하고 현응스님이 선을 무시하거나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고 신랄한 비판을 쏟아내거나 조사들의 어록을 인용하며 깨달음이 구경각임을 입증하려 하였다. 이는 서로 평행선을 달리는 논증과 비판이기에 소모적이며, (조사들의)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현응스님도 ①과 ②와 ③의 길에 대해 좀더 명료하고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원본인 불법을 좀더 구체적으로 재구한 다음에 ①의 입장이 아니라 ③의 입장에서 ②의 한계를 지적했어야 했다. 더구나, “물론 5부 니까야에는 『삼매경』, 『사념처경』과 같이 선정을 강조하거나, 삼매를 통한 깨달음을 말하는 경도 많이 있다. (…) 그밖에 니까야의 여러 경에서 사선팔정, 구차제정을 단계를 통해 사쌍팔배의 수행경지에 대해 말하며, 사마타, 위빠사나 수행을 세밀하게 설명하는 경도 있다. 나는 이러한 경들은 부파불교의 윤색이라고 하는 학설을 따른다.”(「현응2」)라며 굳이 한 학설을 따라 초기불교에서 선정이 없었다고 주장하며 수좌회의 비판을 반박할 필요는 더 더욱 없었다.
석존께서 최초로 깨닫고 가르쳐 비구들을 깨닫게 하는 상황을 보면, 이해의 방식이 주로 활용되었지만, 선정의 방식도 있었다. 조계종의 종지인 간화선을 사수하려는 이든, 초기불교에 매료된 이든, 평행선을 달리는 논쟁은 그만 하고, 21세기 오늘의 상황에서 ③의 길, 곧 이해와 선정을 뛰어넘어 불법의 진여 실제에 다다르는 길이 무엇일까 함께 모색하는 것이 한국 불교를 혁신하는 것이자 원본인 불법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다.

3. 언어의 空性과 因言遣言의 문제

“궁극적인 진리는 인간의 의식과 언어를 넘어선다. 언어로는 진여 실제에 이를 수 없거니와 현실과 사물에 대해서 그 실상대로 말할 수도 없다. 이 이유는 크게 다섯 가지다. 도(道)와 일심이란 언어기호나 인간의 생각 저 너머에 있어 언어기호로는 이를 표현할 수 없다. … 언어는 자성이 없이 가명이기 때문에 진여 실제를 드러낼 수 없다.…언어와 세계가 일치하지 않으며 언어는 단지 세계의 실상이 아니라 차이 자체를 재현하기 때문이다. … 이름과 뜻, 능전의(能詮義)와 소전의(所詮義), 경전과 해석, 기표와 기의, 발신자와 수신자가 서로 연기적 관계에 따라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 이 세계 자체가 연기에 따른 것이고 무상하기에 자성이 없이 공하기 때문이다. 다른 것과 서로 조건을 형성하고 상호작용하며 끊임없이 변하는 세계를 동일성이나 실체라는 틀로 가두어 무엇이라 명명할 수 없다. 무자성이고 공인 세계를 언어로 명명할 수 없으며, 언어 또한 자성이 없이 차이에 따라 연기되므로 더 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세계의 궁극적 실제는 불가언설(不可言說)이고 이언절려(離言絶慮)이며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
“하지만, 자성과 연기 사이의 모순, 언어의 공성을 이해하면서도 언어를 통하여 의미와 진리를 전달하여야 하는 딜레마를 해결하는 것은 언어를 방편으로 삼은 뒤에 말을 버리고 실제에 이르는 것, 곧 인언견언(因言遣言)이다. 『금강경(金剛經)』「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을 보면 ‘이런 뜻인 까닭으로 여래는 ‘너희 비구들아 나의 설법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아는 자들은 법조차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어찌 하물며 법이 아닌 것조차 버리지 못하는가?’라고 늘 말씀하셨다.’ 장자(莊子)도 『장자(莊子)』 「외물(外物)」 편에서 ‘물고기를 잡은 뒤에는 통발을 버려야 한다. 우리 인간의 말이라는 것은 뜻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그 뜻을 잡으면 말은 버려야 한다’라고 하였다. 비트겐슈타인도 “지붕(세계의 실체)으로 올라간 뒤에는 사다리(언어)를 던져 버려야 한다.”라 했다. 여러 성인들이 궁극적 진리가 언어 저 너머(지붕, 언덕 저 편, 물고기)에 있으면서도 인간이 이를 전달하는 것은 언어(사다리, 뗏목, 통발)밖에 없음을, 대신 언어로 궁극적 진리를 지시한 다음에는 언어를 버리고 세계의 실체를 대할 것을 천명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정리할 때, 언어와 의식에 기초한 이해의 방식으로는 진여 실제에 이를 수 없다. 언어도단(言語道斷)을 선언하고 선정을 통해서 부처님의 마음, 진여 실제에 다가갈 수 있다. 하지만, 언어와 의식을 전적으로 부정할 것이 아니다. 언어가 세계를 결정한다는 사피어와 워프의 가설(Sapir–Whorf Hypothesis)이나 언어 없이 사고 없다고 본 비트겐슈타인이나 퍼스의 견해는 일부 수정되어야 하지만, 언어가 몸과 삶을 바탕으로 사고를 구성하고 촉진하는 것은 일정 정도 사실이다. “그리 글자를 쓰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역시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인데, 이 말이야말로 곧 문자의 모습이다. 또 불립문자(不立文字)를 말하는데 ‘不立’ 양 글자 역시 문자이다.”라고 지적한 사람은『단경(壇經)』을 지은 혜능(慧能)이다.
현응 스님은 전자를 수용해서 언어와 의식을 벗어나지 못한 이해로는 궁극적 진리에 이를 수 없음을 인정하고 ‘이해’라는 낱말을 변경하거나 언어와 의식을 초월한 이해로 의미부여를 해야 한다. 수불스님을 비롯하여 간화선을 옹호하는 이들은 후자를 수용하여 언어와 의식을 사다리로 삼아 궁극적 진리에 이르는 방편을 깨달음의 또 다른 방식으로 용인해야 한다.

4. 頓悟와 解悟 사이의 대립과 會通

현응 스님은 “경전은 부처님을 포함하여 ‘이해로서의 깨달음’을 얻은 다섯 수행자를 모두 아라한이라고 호칭했으며,”(「현응1」)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설법, 토론, 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현응1」)이라며, “깨달음이 모든 존재들의 연기성(緣起性)과 공성(空性)을 잘 이해하는 것”(「현응1」)으로 결론을 내린다.
이에 대해 수좌회는 “만약 철저히 공함을 체득하지 못한 이해(알음알이)를 깨달음으로 삼게 되면 알음알이를 지혜로 여기게 되는 것이니 마치 도둑으로 자식을 삼는 것과 같게 된다. 그래서 생각(이해)을 따라가면 중생이요, 생각을 돌이켜 반조하면(回光返照) 수행자요, 생각을 생각 아닌 생각으로 돌이켜 쓰면 부처라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비판한다. 수불스님은 “진리란 그저 ‘잘 이해하는’ 대상이 아니라, ‘보고 얻고 알고 깨우쳐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의심을 뛰어넘고, 의혹을 제거하고, 두려움 없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의심을 뛰어넘을 수 없고, 의혹을 제거할 수 없으며, 두려움을 없앨 수도 없다는 사실은 수행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너무나 잘 알 것이다.”(「수불」)라 하고, 서재영 박사는 “구경각만이 진정한 깨달음”이라며 “‘이해’는 제6식의 범주에 해당하는 것이며, 표피적 인식작용에 불과하다.”(「서재영」)라고 규정한다.
선의 입장에서 보면, 현응 스님의 이해 방식은 오히려 깨달음의 장애다. 반면에, 현응 스님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는 깨달음에 이르는 사다리다. 어느 것이 과연 타당한가. 깨달음에는 크게 세 가지 길이 있다.

① 현응: 말씀, 토론 → 이해 → 깨달음 ↘
② 신수/지눌: 경전 공부 → 漸修 → 解悟 → 진여 실제
③ 혜능/성철: 수행 → 공안 → 頓悟 ↗

③의 입장에서 보면, ①과 ②가 모두 깨달음의 장애 내지 근본 해악이다. ①의 입장에서 에서 보면, ②와 ③은 석존과 다섯 비구가 처음에 깨달은 쉬운 깨달음의 길을 무시하고 어려운 길을 고집하는 것이자 오매불망 공안을 참구하여 설혹 삼관(三關)을 돌파(突破)하며 일상일여(日常一如), 몽각일여(夢覺一如), 오매일여(寤寐一如)하더라도 깨달음에 이르렀는지를 검증할 수 없는 모호한 길이다. 현응 스님과 수불 등 선을 옹호하는 세력, 초기불교와 대승, 돈오와 점수의 논쟁에는 순순하게 불교적 맥락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동일성의 사유가 지배하고 타자와 사이에 권력이 작동하고 있다. 대승의 입장에서는 초기불교의 이해가 자신의 인식적 각성에만 머무는 표피적이고 개인적이고 소극적인 깨달음의 방식이라고 비판한다. 남종선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혜능만이 적통이고『단경』만이 정전이며 나머지는 모두 이단이다. 하지만, 『단경』이 “처음 ‘혜능 구법 이야기’로 만들어져…당대 선종의 사람(선승)들은 『단경』을 단순히 ‘혜능 구법 이야기’라는 통속적인 문학작품(變文)으로 읽었을 뿐이지, 남종의 조사 육조혜능이 설한 남종 돈교의 종지라고 간주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돈오만으로 구경각에 이르려고 한 남종선은 허구의 문학작품을 모든 사유와 행위를 규정하는 전범으로 삼은 것이 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허구를 진리로 삼아 다른 사유와 행위를 이단으로 간주한 것이 된다.
동일성은 타자를 상정하고 이를 배제하고 폭력을 행함으로써 동일성을 강화하는 속성을 갖는다. 이성과 교양이 증대된 20세기에 집단학살이 끊이지 않은 것은, 한나 아렌트가 지적하는 ‘순전한 생각없음’이나 스탠리 밀그램 등이 제시하는 ‘권위에 대한 복종’보다도 ‘유태인, 유색인, 이교도, 빨갱이’로 특정집단을 타자화하여 배제하였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열정, 확철대오(廓撤大悟)의 (유사)체험에서 비롯된 선수행에 대한 확신, 조계종의 종지에 대한 신념, 선수행의 아비투스와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간화선 및 이를 수행하는 집단의 동일성을 강화하고 반면에 다른 세력을 주변화하려는 권력적 의도가 깔려 있다.
이제 양자는 화쟁의 자세로 서로를 수용할 필요가 있다. 대개 궁극적 진리는 언어와 의식을 벗어나 돈오를 통할 때 도달한다. “알음알이는 깨달음을 이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깨달음을 막는 장애물이다.”라는 성철 스님의 비판은 ‘이 경우에’ 타당하다. 하지만, 양의 변화가 일정 단계에서 질의 변화로 전환한다. 인지공학적으로 보더라도 “뇌는 세계를 행동과 상호작용이 모여 있는 집합체로 그려놓는다.” “1000억 개의 신경세포와 각 신경세포당 5,000개의 시냅스, 총 500조 개의 시냅스”는 사고와 행위, 학습을 할수록 서로 연결망을 확장하다가 임계점을 넘는 순간에 물리적 구조만이 아니라 기능적 조직까지 변화시키면서 재조직된다. 이를 두뇌의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이라 한다. 개인 차원에서는 의식의 전환을, 집단 차원에서는 문명의 전환을 이루는 것이 신경가소성이다. 다음 장에서 상세히 기술하겠지만, 중도와 공, 연기에 대한 석존의 깨달음도 석존이 몰록 깨달았다 하더라도 대부분은 길게는 인류의 역사 600만 년, 짧게는 인지혁명 1만 년 이후의 사유가 축적해서 얻어진 결과물을 바탕으로 하여 새롭게, 다른 차원에서 재조직하거나 체계화한 것이다. 이는 해오(解悟)나 지해(知解)가 깨달음에 장애가 아니라 사다리일 수 있음을 뜻한다.
하지만, 현응 스님 또한 ‘이해’란 낱말의 사용에 주의하여야 한다. 물론, “현응스님이 “이해”라는 말을 썼다고 해서 그것이 분별지만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파악함은 현응스님의 손가락만 쳐다보지 그것이 가리키는 달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는 문제가 있다. …현응스님의 ‘이해하는 깨달음’은 일단 연기와 공에 대한 개념적 이해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혁명적으로 바꾸고 이에 더 나아가 모든 개념적 이해를 초월하는 불이법의 차원까지 보라고 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더 나아가 깨달음을 소수자가 독점하는 데서 대중들도 누릴 수 있는 것으로 끌어내리고 자비심과 결합하여 사회화하려는 아름다운 결정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프랑크푸르트 학파 철학자들이 칼 포퍼 등 신실증주의자들과 논쟁하면서 ‘이해(understanding)’를 선입견에 뿌리를 두고 있고 과거에 얽매여 기존의 의식과 체제를 벗어나지 못하는 개념체계라며 비판하면서 이의 대안으로 ‘(변증법적) 이성(reason)’을 확립하라고 주장한 까닭을 잘 가늠하기 바란다.

5. 깨달음과 마음/몸의 관계

현응스님은 “마음을 깨닫는다는 말은 부정확하다. 마음을 깨닫는다 할 때의 그 마음이 무엇인지 명확히 밝히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이 무엇인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는 그 마음을 깨닫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뜻인가?”(「현응1」)라며 간화선을 비판한다. 이에 대해 수불스님은 “이 말은 현응스님 스스로가 마음이 무엇인지 확실히 모른다는 고백과 같다. …마음이란 직접 깨닫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모르니까 깨달으려고 하는 것이다. 현응스님 본인이 마음을 깨닫지 못했으니까, 깨달음의 내용이 추상적이며 구체적이지 않게 보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그런 깨달음이란 없다.”라고 반박한다.(「수불」)

5.1. 인지과학과 인류학에서 본 깨달음과 몸/마음의 관계

그럼, 마음이란 무엇인가. 자비심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마음이란 두뇌 속의 500조 개 신경세포가 다발이 서로 연기 관계 속에서 화학물질을 주고받는 생성과정에 몸이 작용하는 것이다. 2013년에 페라리 등은 타자와 소통 및 공감을 담당하는 “거울신경체제가 타인에게 자신의 표현을 더 쉽고 안정적으로 전달하려는 것을 선호하는 데서 기인한 자연선택의 결과라고 밝혔다.”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생존기계인 인간이 사회를 형성하면서 이타적 협력을 한 결과 만들어진 진화적 생성물이 거울신경체제다. 자비심은 내 몸이 약자의 고통에 접하였을 때 두뇌 속에서 공감을 담당하는 거울신경체제(mirror neuron system)가 타자와 나를 연기관계로 인지하여 그의 고통을 내 것처럼 아파할 때 발생하는 마음작용이다.
우리는 왜 ‘듣다[聞]’와 ‘깨달음[覺]’을 동일한 의미로 보는가. 우리는 마음과 육체를 분리하여 바라보지만, 몸 없이는 의미나 깨달음은 없다. 육체와 정신은 이분법적이 아니다. 몸의 기억이 마음에 저장되고, 마음이 몸을 움직인다. 몸으로 감각하고 운동을 하는 것이 뇌의 감각신경세포와 운동신경세포를 활성화하고 이것이 뇌의 신경세포와 시냅스의 연결망을 변환시키고, 이 연결망이 상황에 따라 결합하며 마음을 구성한다. 몸이 마음을 담는 그릇이자 마음이 몸의 기억을 담는 그릇이다. 운동신경세포가 인지에 관여하며, 타자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공감하는 거울신경체제 또한 근본적으로 운동신경세포에 속한다. “육체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는지(육체문화), 그리고 어떤 것을 가지고 행동하는지(물질문화)에 관한 메타포적 관계의 원천이다.” 인류는 자신의 몸과 자연, 온갖 사물이 깊은 연관 관계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인류는 몸에 있는 감각을 통해 자연을 인지하고 몸을 이용하여 걷고 달리고 팔을 뻗어 열매를 따고 사냥을 한다. 팔과 다리를 확장하여 도구를 만들고, 몸통과 유사한 용기와 집을 만든다.
인류는 즉자적인 몸을 비유적 의미로 전환했다. 인간이 고도의 정신적 문명을 형성한 것은 1만여 년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6백만 년 동안 몸을 움직여 수렵을 하고 채취를 하며 생존해왔다. 몸의 기억 없이 사고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몸을 통해서만 개념을 형성할 수 있다. 따라서 세계, 우리 자신, 타인들에 대한 우리의 모든 이해는 우리의 몸에 의해 형성된 개념들의 관점에서만 틀을 지을 수 있다.” 인간은 한 종류의 사물을 다른 사물이나 몸을 통해 이해하고 경험하며 사고를 형성했다. 인류는 그가 서 있는 몸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인식하고, 유사성의 유추인 메타포(metaphor)를 통해 몸을 바탕으로 신체를 확장하여 자기 앞의 세계를 인지했다.
사냥이나 채취의 대상을 인간의 시각을 통해 보기에, 원시시대에서 21세기에 이르기까지 본다는 것은 알거나 이해하는 것이다. 남의 말을 청각을 통해 듣고 받아들이기에, 듣는 것은 복종이나 깨달음을 뜻한다. 인간의 말이라면 복종이고, 신의 말씀이라면 깨달음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듣다’라는 뜻이 ‘깨달음’을 의미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사냥감이나 그 자취를 후각을 통해 맡기에, 맡는 것은 추적하거나 조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한 것인지 아닌지 미각을 통해 맛보기에 맛보는 것은 시험하는 것이다. 입을 통해 말하기에 말한다는 것은 주장하는 것이다. 피부와 접촉을 통해 느낌을 갖기에 느끼는 것은 감동하는 것이다. 사냥감과 천적을 잘 볼 수 있고 이 때문에 무리에게 이를 알릴 수 있었기에, 높은 것은 기분이 좋은 것이고 낮은 것은 기분이 그 반대인 것이며, 높은 데 자리한 사람은 능력이나 힘이 있는 자이며, 낮은 데 있는 사람은 그 반대다. 앞서면 사냥감과 과실을 먼저 획득할 확률이 높았기에, 앞서서 가는 것은 발전이며 뒤처지는 것은 퇴보다. 무리생활을 하였기에, 가까운 것은 친한 것이고 먼 것은 낯선 것이다. 더 확장하면, 저 높은 하늘 위는 신이 계신 곳이고 그곳에서 내려오는 새는 신이 보낸 사자다. 그러기에 “말(언어)이란, 세상을 그저 거울처럼 비추어준다기보다 인공물(유물)과도 같이 몸이 세상 속으로 확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 인지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어떤 것을 그 어떤 것‘으로’ 보는 과정이며, 이것이 바로 메타포적인 이해의 핵심이다.”
인간의 몸이 자연과 상호작용하면서 몸을 통해 활동을 하고 이 신체적 경험을 반복하면서 영상도식을 만들고 이 영상도식을 메타포의 매개를 통해 구상적인 것이나 추상적인 것에 투사하여 추상적인 것을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이를 더욱 체계화하여 매우 심오한 사고를 형성한다. 예를 들어, 인류는 나무에서 생활하면서 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팔과 다리를 움직여 신체의 균형을 유지하는 행동을 한다. 이런 신체적 경험을 반복하면서 신체의 균형이라는 영상도식을 형성한다. 이를 추상적으로 유사한 무엇에 투사하면, ‘균형 잡힌 삶’, ‘균형 있는 생활’ 등의 개념적 은유가 만들어진다.
이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유인원 시대: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 → 신체의 균형
→ (전기 구석기시대: 추상적 은유화) → 균형 잡힌 삶
→ (중기 구석기시대: 구상적 은유화) → 예술작품의 균형
→ (후기구석기시대∼메소포타미아 시대: 인지적 유동성) → 살림이나 재정의 균형
→ (기축시대: 인지적 유동성+고도의 추상적 은유화) → 중도, 중용

인지적 유동성이 인류의 사고에 혁신을 불러왔다. “문화적 대폭발을 위한 기폭제는 불투과적이던 인지적 모듈들 사이의 벽을 허물고, ‘인지적 유동성’이라는 과정에서 개별적인 인지적 모듈들 사이에서 정보를 소통시킨 것이다.” 예를 들어, 인류는 인생이란 추상적 개념을 여행이라는 신체적 경험으로 은유화하여 이해한다. “목적은 목적지이다.”라는 1차적 은유와 “행동은 자체 추진식 이동이다.”라는 1차적 은유가 횡단하여 “목적이 있는 인생은 여행이다.”라는 혼성의 은유를 생성한다. 이러면 사람들은 “물리적 여행처럼 인생도 목적지에 도달하려면 일정한 계획을 세워야 하며, 도중에 어려움에 직면하고, 곁길로 빠지고 막다른 길에 이르는 것을 피해야 한다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가정하게 된다.” 여기서 근본 은유는 “여행=인생”이며, 이는 “(내 인생이) 험로를 걷고 있다,” “탄탄대로를 가고 있다”, “교차로에 놓였다”, “인생은 나그네길”, “인생의 동반자” 등등의 파생은유를 형성한다.
앞에서 예를 든 ‘신체의 균형’의 은유를 예로 인류가 은유를 통해 사고한 것을 레이코프와 슬링거랜드의 이론에 필자의 화쟁기호학을 결합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해본다.
신체의 은유는 문명의 발전에 따라 다른 영역으로 횡단하며 유사성의 유추를 심화했다. 인간이 유인원이던 시대에는 숲에서 열매를 따고 새끼를 양육하면서 신체의 균형을 잡으려고 했다. 도구를 사용하는 전기 구석기시대에는 사바나에서 생활하면서 신체의 균형을 확대하여 너무 많은 사냥감과 채취물을 가져오면 썩어버리는 것을 경험하고 이런 행위도 나무에서 몸의 균형을 잡듯 해야 함을 깨닫고 삶의 균형으로 의미를 확대했다. 후기구석기시대와 신석기혁명 이후 농경을 하고 부를 축적하면서 사치와 검소, 이로 인한 흥망을 경험하면서 신체 활동의 영역을 재정의 영역을 횡단하여 신체의 균형을 재정의 균형으로 전환했다. 인류는 농경을 하고 정착생활을 하면서 살림에 대해 인식했고, 신석기혁명 이후 잉여생산물을 교환하면서 부를 축적하고 이를 관리하기 위하여 최소한 메소포타미아 시대에는 회계장부와 부기를 창안하면서 재정의 개념을 형성했을 것이다. ‘신체 활동의 영역’과 ‘재정의 영역’을 횡단하면 양자의 혼성공간이 만들어진다. 이 혼성공간에서는 ‘살림의 균형, 재정의 균형’이란 은유를 형성한다. 이것이 붓다와 공자가 활동한 기축시대 이후 불교의 형이상의 영역과 추상적 은유화를 계속 추구하면 중도(中道)가 되고, 유교의 영역과 혼성되면 중용(中庸)으로 더욱 체계화한다. 신체 균형의 은유는 개인의 해탈을 추구하는 불교의 수행 영역과 결합하여 쾌락과 고행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라는 중도로 발전했다. 중도는 다시 공(空) 사상의 영역과 결합하여 양 극단을 초월하여 일심(一心)에 이르는 중도실상(中道實相)으로 심화했다. 마찬가지로 신체의 균형의 은유는 심성의 도야와 도덕적 실천을 추구하는 유교의 실천 영역과 결합하여 사람 사이에서 균형 있게 처신하라는 중용으로 발전했다. 중용은 다시 도(道) 사상의 영역과 결합하여 천리(天理)와 개인의 심성을 분리시키지 않고 하나로 합일(合一)을 이루는 것으로 발전했다.
물론, 그 반대의 은유 또한 이루어졌다. 구체적인 신체의 경험을 통해 추상적인 것을 유추하는 것과 반대로, 사물이나 자연의 구체적인 모습이나 작용, 본질에서 유추하여 추상화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을 달의 본성으로 파악한 사람들은 이에서 인생이나 사회가 영고성쇠함을 유추한다. 달이 사라졌는데 다시 나타는 것을 보고, ‘부활, 순환, 재생, 영원성’ 등의 의미를 떠올리고 이에 대한 사유를 발전시키고, 이를 인간의 재생과 부활을 서술한 서사로 창조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재생과 부활을 기원하는 집단의례로 만들기도 한다.
한 마디로 말하여, 구체적 대상의 작용이나 본질을 보고 그를 일반화하여 (추상적) 사유를 형성하거나, 그 반대로 몸을 대상으로 확장하여 유사성의 유추를 하거나 인접성의 유추를 하면서 사고를 만든다. 화엄을 비롯하여 불교의 교리도 대부분 이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5.2. 유식학과 인지과학에서 본 깨달음과 몸/마음의 관계

서재영 박사는 “‘물리쳐야하는 마음(心)’은 단지 이해하는 등의 인식작용뿐만 아니라 마음을 구성하는 8식 전체라고 보았다. 이 말은 깨달음이란 잘 이해함과 같은 6식의 작용을 넘어서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의 마음 저 깊은 곳에 있으면서 “자성을 깨치는 데에 근본적으로 방해되는 아뢰야식부터 뿌리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생의 번뇌를 유발하는 근원적 무명은 제8식이므로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제6식 차원의 ‘인식’이 아니라 제8아뢰야식 차원으로 내려가 무명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이어서 이를 메모리에 비유하여 ROM은 자아정체성의 뿌리가 되는 제8아뢰야식에, RAM은 금생에서만 작동하는 제6식에 각각 비유하여, “마치 보이지는 않지만 모든 프로그램이 ROM에 저장된 BIOS에 의해 좌우되는 것처럼 제8식도 보이지는 않지만 자아의 근원이 되고, 생사를 관통하여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며, 모든 번뇌의 뿌리가 된다. …설사 제6식에 해당하는 의식 차원에서 무엇을 알았다고 해도 그것은 전원을 끄면 사라지는 RAM의 정보와 같아서 생사에 영향을 줄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선에서는 제6식단계의 작용인 ‘잘 이해 함’과 같은 인식으로서는 생사윤회에서 해탈할 수 없다고 말한다.”라고 주장하면서 현응스님이 깨달음을 이해로 본 입장을 비판한다.

거짓의 말로 말미암아 아와 법이 있다고 말하니,
갖가지 형상이 전전하는데
이는 마음의 변화로 일어나는 것이며
이 능동적인 변화는 오직 셋이라.

이는 달리 익는 인식, 헤아리는 인식,
그리고 감각에 따른 인식인데,
처음의 알라야식은
달리 익고 일체 종자니라.

위는 바수반두(Vasubandhu, 世親)가 지은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가운데 제1송과 제2송이다. 착각과 망상으로 말미암아 나와 존재가 있다고 하고 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니 모든 것은 마음이 지은 것이며 마음이 변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감각을 통해 수동적으로 보면 산과 돌과 나무라 하지만 다시 말해 지각하는 주체인 견분(見分)과 지각되는 대상인 상분(相分)으로 변하여 실제처럼 드러나지만, 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능동적인 변화로 바라보면 이숙, 사량, 요별경 셋이다. 제8식, 알라야식(阿賴耶識)은 원래 청정한 것인데, 제7식인 마나스식(末那識)이 아견(我見), 아치(我癡), 아만(我慢) 등으로 오염되기에 인간이 진여실제를 보지 못하고 망상에 사로잡힌다. 연기와 업이 작용하여 알라야식과 마나스식에 마음의 종자를 뿌린다.
처음 알라야식이라 함은 『성유식론』에서 “초능변식은 대소승교에서 알라야라고 일컫는데 능장(能藏) ・ 소장(所藏) ・ 집장(執藏)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함과 같다. 알라야식이 종자를 능동적으로 보존하고 있고 또 싹을 틔우고 있기에 능장이라 한다. 업에 따라 종자들이 모여서 알라야식을 이루므로 소장이라 한다. 제7식에 따라 종자가 집착되기에 집장이라 한다.
알라야식을 이숙(異熟), 달리 익는 인식이라 함은 인(因)과 과(果)가 다르게 익는다는 것을 뜻한다. 같은 씨가 햇빛과 양분과 수분, 바람, 미생물에 따라 다르게 싹을 틔우고 열매로 익듯, 알라야식의 종자들이 업에 따라 달리 작용함을 의미한다. 사량(思量)은 헤아리는 인식, 곧 제7마나스식을 말한다. 요별경식(了別境識)은 감각으로 대상을 인식하는 경계인 제6식을 뜻한다. 처음에 알라야식이 이숙이라 함은 업의 결과로 종자가 달리 익는 것을 뜻한다.
유식삼십송를 풀이한 명욱(明昱)의 『유식삼십논약의(唯識三十論約意)』는 이에 대해 “첫째, 옛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하여 달리 바뀌어서 익는다. 둘째, 앞의 원인과 뒤의 결과에 시간이 작용하여 때를 달리하여 익는다. 이런 업과 저런 업이 작용하여 종류를 달리하여 익는다.”라고 풀이한다. 일체종이라 함은 이런 업의 결과로 인연에 따라 종자가 싹을 내고 일체의 새로운 종자를 발생시킴을 의미한다. 과거 업의 결과가 종자가 되어 알라야식에 머물고, 이 종자는 알라야식에 머물다가 새로운 업과 인연에 따라 종자들이 싹을 틔우고, 그것이 익어서 그 업과 인연에 따라 다른 열매를 맺고 다른 업을 가진 종자들을 발생시키고 이는 다시 알라야식으로 들어가 저장된다.
유식학과 인지과학, 정신분석학을 종합하면, 개인이건, 집단이건, 자연이건, 우주건 업을 행한 결과대로 종자가 만들어지고 그 종자가 알라야식에 있다가 연(緣), 곧 새로운 조건 및 인과관계를 만나서 새로운 싹을 내고 의식을 형성하고 사건을 만들었다가, 마치 꽃이 열매를 맺고 씨를 뿌리듯 새로운 종자를 만든다.
우주기원종자, 생명기원종자와 인류기원 및 집단형성종자, 조상기억종자, 무의식기억종자는 알라야식에 머물고, 의식기억인자와 신경세포인자들은 전6식에 머문다. 종자는 종자일 뿐이다. 흙과 양분, 햇빛, 온도, 물과 공기, 미생물이라는 조건이 성숙해야 씨가 싹을 내는 것처럼, 종자는 조건과 인과관계, 업에 따라 종자로 머물 수도 있고 마음과 행위의 싹을 낼 수도 있다. 종자가 새로운 조건과 인과관계 속에서 일단 싹을 틔우면 새로운 종자와 업을 만든다.
이처럼 인간 두뇌의 신경계는 종자와 인자들이 뿌려져 있는 밭이며, 뇌는 마음의 몸이요, 이들을 나고 자라고 사라지게 하는 것은 업과 연기다. 또, 대상 없이 정신은 작용하지 않으며, 대상 또한 마음에 따라 의미를 갖고 존재한다. 우리의 감각이 대상을 인식하여 감각신경세포를 통해 전하면, 대뇌피질에서 뇌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두뇌 부위, 연합신경세포체제 속의 인자와 알라야식의 모든 종자가 관여하여 마음을 형성하고 해석하고 판단하여 운동신경세포를 통해 육체를 움직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니 마음이란 우주의 탄생과 생명의 탄생에서 나에 이르기까지 업과 연기에 따라 축적된 종자들이 현재의 내가 우주와 자연, 타자들과 찰나의 순간에도 서로 연기를 맺으며 구세가 일념인 시간 속에서 상호주관적으로 감각을 매개로 형성하는 것이다.
스님이라 할지라도 어여쁜 여인의 유혹이라는 조건을 맞아 생명기원종자 가운데 성적 욕동(drive)에 관계된 종자들이 발아하고 무의식기억종자 가운데 성적 욕망(desire)에 관련된 종자들이 발아하면, 본래 청정했던 알라야식이 오염되어 나라는 주체가 있다는 망상을 하여 이 주체의 고통이 내포된 향락인 쥬이상스를 추구하면서 여인과 성행위를 하려는 욕동과 욕망이 마음에 가득하게 된다. 이 순간에 정신을 차리라는 큰스님의 말씀을 듣고 스님이 제6식을 통해 경전의 구절에서 계율에 이르기까지 텍스트를 기억하고 이로 계율의 담론을 형성하여 욕동을 억제하고, 수행을 하면서 마나스식과 알라야식에서 욕동과 욕망의 싹들과 종자와 인자들을 씻어내면 다시 본래 청정한 알라야식으로 돌아가게 된다. “알라야식 전체의 완전한 통제를 해탈이라 부르며, 무의식적 의식의 총체적인 내용의 성취를 깨달음이라고 부른다.” 알라야식에 있는 종자들을 마음대로 부려 언제든 청정한 불성으로 돌아가는 것을 해탈이라 하고, 인간의 의식 저 편의 마나스식과 알라야식이 작동하는 원리를 터득하여 이를 진여 실제와 일치시키는 것이 깨달음이다. 현응스님의 이해는 이런 깨달음의 개념과 결합하지 못한다.

6. 깨달음의 진화와 맥락적 지향성

깨달음은 고정된 것인가. 진화하는 것인가. 현응스님은 “부처님의 원래의 가르침도 아비달마 시대를 거치면서 그 표현이 계속 달라지고, 내용도 덧붙여지고 … 시대별로 다양하게 편찬된 대승경전(반야, 화엄, 정토, 법화, 열반, 해심밀경 등)의 내용, 주요 개념과 용어, 강조 방향은 각각 변화되어 표현됐”(「현응2」고, “선불교에서도 역대조사의 가르침은 시대별로, 가풍별로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현응2」)면서 “깨달음은 단일한 것도 아니며, 고정된 것도 아니며, 완성된 것이 아닌 것”(「현응2」)이며 진화하는 것으로 본다. 이에 대해 수불스님은 ‘깨달음’과 ‘시대적인 진화’는 서로 범주가 다르다. 전자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이며 전후제단(前後際斷)이자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중도불이법인데 비해, 후자는 시종(始終)이 인과에 따라 엄연히 분명하고 전후가 면면히 상속되며 생멸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상대이법의 세계인 것이다.”(「수불」)라며 비판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우주를 창조하고 그것이 연기하며 우주 삼라만상을 생주이멸하게 하는 궁극적 진리가 있으며 이는 돈오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지만, 그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진리와 깨달음은 진화하며 맥락성을 갖는다. 전자의 관점이나 인간이 초월적 존재라는 면에서 보면 수불스님과 수좌회 스님들의 주장이 옳다. 하지만, 이들은 전자에 얽매여 후자를 보지 못하였다. 후자의 관점에서 보면, 현응 스님은 전자를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21세기 오늘 무수한 중생들이 고통 받는 상황에서 볼 때, 깨달음의 진화 입장에서 지혜와 자비, 보디와 사트바, 깨달음과 역사를 종합하며 깨달음을 동체대비의 자비심과 보살행으로 연결 지은 작업과 해석이 훨씬 더 가치를 지닌다.
단 1분 1초 사이에도 인간의 얼굴을 형성하는 세포 가운데 수백 개 이상이 변한다. 그러니 우리가 어느 사람을 볼 때 같은 사람의 같은 얼굴로 보지만 그것은 찰나의 순간에도 유사할 뿐 같지 않다. 그것에 동일성을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착각이다. 공하다. 찰나의 순간에도 얼굴은 변하므로 공하지만 그 얼굴이 미소 짓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이 미소를 짓게 하니, 존재하지 않지만 다른 것에 작용하면서 조건이나 인과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변하고 서로 조건이 되고 인과관계가 되어 변하지만 여기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사람의 몸에 내재된 얼굴을 형성하는 원리다. 수억, 수조 개의 세포가 변하여도 이 원리에 따라 세포가 꼴을 짓고 작용을 하기에 수억 개의 세포가 변하지만 그 세포들은 원래 생김의 구조와 형상에 맞게 그 자리에 놓여 그에 부합하는 기능을 한다. 내 얼굴에 있는 모든 세포가 100% 교체된다 하더라도 내 얼굴의 코와 입, 눈, 그들을 움직이는 근육과 감각을 전달하는 신경세포는 같은 원리에 따라 같은 자리에 같은 형상을 한 채 만들어진다. 들창코를 가진 사람이 뼈와 살을 구성하는 세포가 모두 교체된다 하더라도 매부리코가 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몇 년 뒤에 만나더라도 우리는 그 사람을 알아본다.
이처럼 모든 것이 무상하고 공하지만 허공과 이 원리는 존재한다. 이처럼 단순히 천체나 물질의 작용이 아니라 더 큰 단위에서 물질과 우주의 상호작용을 관장하는 원리가 바로 도(道)이다. 137억 2천 년 전에 양자요동에 의하여 빅뱅이 일어나고 인플레이션이 되어 힉스입자가 질량들을 나누어주고, 물질들이 우주 공간에 성간물질로 퍼지고, 그것이 연기의 원리에 따라 온도 차에 따라 별을 만들고 은하로 뭉쳐져선, 중력과 에너지를 매개로 서로 관계를 맺고 운동하게 하는 것, 그 별에 생명들이 서로 연기 속에서 진화하게 하는 것, 그 진리대로 붓다를 내고 우주 삼라만상이 생주이멸하게 하는 것, 미시와 거시, 소립자와 대우주, 양자역학과 상대성원리를 모두 포괄하는 것, 막을 충돌시키고 초끈을 진동시키고 양자를 요동시켜서 우주를 창조하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근본원리가 바로 도(道)다. 이것이 바로 궁극적 진리이자 진여실제다.
필자는 이와 함께 초월적 영역을 인정한다.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 실존적 존재, 사회적 존재, 미적 존재인 동시에 초월적 존재이기도 하다. “절망에 잠긴 내 눈가로 별이 반짝였다.”라는 간단한 문장 또한 어느 존재를 지향하느냐에 따라 “절망에 잠긴 내 눈 앞에 벼랑이 막아섰다.”(생물학적 존재로서 ‘별’을 즉자적으로 ‘벼랑’으로 해석함), “절망에 잠긴 내가 이상을 추구했다.”(실존적 존재로서 ‘별’을 ‘이상’의 은유로 해석함), “절망에 잠긴 내 눈 앞에 구원자가 나타났다.”(사회적 존재로서 ‘별’을 ‘스타 등의 구원자’로 해석함), “절망에 잠긴 내가 눈물을 흘렸다.”(미적 존재로서 ‘별’을 ‘눈물’이 반짝인 것이라는 시적 의미로 해석함), “절망에 잠긴 내 눈 앞에 신의 계시가 있었다.”(초월적 존재로서 ‘별’을 ‘더 거룩한 것, 혹은 희망이나 이상을 바라며 현재의 절망을 극복하라는 신의 계시’로 해석함) 등으로 해석한다. 신은 “우리가 느끼는 어떤 존재의 떨림, 초월적 힘에 대한 감수성이며, 존재자로서 인간 존재의 심연에서 우러나는 울림, 존재의 소리를 듣는 영적인 지평에 관계된 개념이다.” 초월적 존재로서 궁극적 진리에 다가서고자 할 때 사량분별의 지식과 이해는 오히려 깨달음의 장애다. 모든 의식과 이해와 언어를 초탈한 무분별의 지혜로써만이 이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궁극적 진리를 제외한 나머지 진리들은 진화하며 맥락성을 갖는다. “‘달을 그렸다’라는 간단한 문장이 미술 시간의 맥락에서는 ‘지구의 위성을 그림으로 그렸다’이지만, 한 어린이가 산수 시험을 보고 와서 몇 점을 맞았느냐는 어머니의 질문에 그리 답한 맥락이었다면 ‘산수 시험에서 0점을 맞았다’는 의미인 것처럼, 궁극적 진리를 제외한 모든 진리는 차이와 맥락에 따라 의미를 생성한다. ‘지금 여기’라는 맥락성을 갖지 못하는 붓다의 말씀이란 성인들의 신비한 은유놀이 내지 관념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양자물리학을 공부하면, 경전 가운데 어느 것이 허구인가 금세 알게 되는 한편에 소립자에서 대우주에 이르기까지 우주 삼라만상이 연기론에 따라 운동하며 생성과 소멸을 되풀이하고 있음에 경탄하게 된다. 인지과학과 진화생물학을 공부해도 마찬가지다. 불교는 현대과학이 이룩한 성과와 종합되어야 한다. 사회적 고(苦) 개념을 정립하지 않고서 중생의 고통을 진정으로 덜어줄 수 없다. 구조적 폭력을 없애는 것이 적극적 평화를 수립하는 것이라는 인식 없이 붓다의 평화를 이 땅에 깃들게 할 수 없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인식 없이, 그 체제에서 착취와 억압, 수탈로 인한 불평등과 소외, 불안으로 고통 받는 중생에 대한 공감과 연대 없이 자비심이란 공허한 관념적 유희이거나 자기만족일 뿐이다.
우선 지혜로써 모든 경계를 파악하여 온갖 사념과 망상을 떨쳐버리고 나쁜 욕망을 멈추는 지행(止行), 세계와 타자와 나 사이의 관계를 통찰하는 관행(觀行)을 쌍으로 부려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전제다. 지와 관을 통하여, 임계치 이상의 물리적 충격을 받은 물질이 배열 구조가 바뀌어 화학변화를 일으키는 것처럼, 나의 마음과 몸이 임계점을 넘어 재배열되어 전혀 다른 체계로 거듭나야 깨달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소승의 깨달음이란 원래 깨달을 수 있는 바탕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 어떤 계기를 통해 연기(緣起)와 무아(無我), 공(空)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고 탐욕과 어리석음과 성냄을 완전히 소멸시키고 자신의 두뇌의 신경세포와 몸 안에 간직된 온갖 경험과 기억과 의식, 마나스식과 알라야식에 있는 모든 종자와 인자를 찰나적으로 재배열하여 자신의 존재를 전혀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하고, 악의 종자(種子)를 모두 거두어내고 선의 종자만이 의식과 실천으로 작용하게 하면서 업(業)에서 벗어나고, 이 존재가 새로운 지평에서 진여실제(眞如實際)에 다가가는 것으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자유롭고 평안한 상태에 이른 경지다.
하지만, 불교는 지금 여기에서 고통 받는 중생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홍사성 주간이 갈파한 대로, 수행의 목적은 깨달음이 아니라 열반이다. “불교의 수행은 깨달은 내용을 실천하기 위한 수행이고, 부처로서 살기 위한 수행이고, 열반을 완성하기 위한 수행이어야 하”며,. 그 열반은 나만의 열반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생들이 화탕지옥과 같은 세상에서 무진장의 고통을 겪고 있는데, 선방에서 나홀로 정진하며 평안하면 깨달은 것인가.
원효는 진속불이(眞俗不二)론을 편다. 유리창의 먼지만 닦아내면 맑고 푸른 하늘이 드러나듯, 모든 사람의 미혹하고 망령된 마음만 닦아내면 그들 마음속에 있는 부처가 저절로 드러난다. 깨달음과 해탈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원래 깨달을 수 있는 바탕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 어떤 계기로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고 자신을 전혀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리 깨달아 부처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중생이 고통에 있는 한 나는 아직 부처가 아니다. 고통과 무명 속에 있는 중생을 열반으로 이끄는 그 순간에 나 또한 열반에 이르러 진정 부처가 된다.
중생이 고통 속에 있는 한, 설령 깨달았더라도 나는 아직 부처가 아니니, 먼저 깨달은 자는 항상 큰 자비로써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중생의 의혹을 제거하고 삿된 집착을 버리게 하여 그들을 깨달음에 이르도록 한다. 그럴 때 나 또한 진정한 깨달음의 세계에 이를 수 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가 나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지혜이고 그를 위하여 그리로 가 그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고통을 없애주는 것이 바로 자비행이다.
그러니 대승의 깨달음이란, 연기와 공, 무아에 대해 전혀 다른 차원으로 새롭게 깨달아 거듭난 존재가 세상과 자연과 뭇 생명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인식하고 그들의 고통을 덜기 위하여 자신의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고 선한 욕망과 자유의지, 깨달음의 지향성 등을 억압하거나 왜곡하는 것에 대해서는 저항하면서 알라야식의 종자들을 마음대로 부려 청정한 불성으로 돌아가서 선한 종자들이 타인의 마음 속에서도 싹을 틔우게 하여 그들을 부처로 만들고 그로 인해 내가 부처가 되는 것이다. 타자를 구원하거나 계몽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 속에 숨어 있는 불성을 드러내며, 이 순간 나 또한 부처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기에 참된 깨달음이란 내가 그리로 가 그를 완성시키고 그를 통해 다시 나를 완성하는 행위다. 이때 이 행위가 윤리적인 당위를 넘어서려면 자기를 비우고 중생을 붓다처럼 섬기며 중생의 삶에 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그들과 뒹굴며 그들과 함께 슬퍼하고 기뻐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붓다의 삶이자 자타가 열반에 이르는 진정한 깨달음의 길이다.
결론적으로, 참된 깨달음이란 이 세계의 연기와 공성에 대해 전적으로 이해한 바탕에서, 자신의 두뇌의 신경세포와 몸 안에 간직된 온갖 경험과 기억과 의식, 마나스식과 알라야식에 있는 모든 종자와 인자를 찰나적으로 재배열하여 자신의 존재를 전혀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하여 악의 종자(種子)를 모두 거두어내고 선의 종자만이 의식과 실천으로 작용하게 하면서 업(業)에서 벗어나고, 이 존재가 새로운 지평에서 진여실제(眞如實際)에 다가가는 것으로, 모든 억압과 구속에서 벗어나는 소극적 자유(from freedom), 노동과 창조를 통하여 진정한 자기실현을 하거나 수행을 통하여 자신을 해탈시키는 적극적 자유(to freedom), 타자를 해탈시켜 내가 해탈이 되는 대자적 자유(for freedom)를 모두 쟁취하고 종합하는 것이자 타자를 깨닫게/자유롭게 하여 내가 깨닫는/자유롭게 되어 열반의 환희심에 이르는 것이다.

7. 맺음말

한국 불교는 지금 마구니 소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도층 승려들의 범계와 비리는 종단의 해체를 가속하고 있다. 중생들이 헬조선에서 극단적인 고통 속에 있음에도 가톨릭이나 기독교에 비하여 그 천분의 일도 안 될 정도로 생색내기용 중생구제에만 급급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권종유착에 이르기까지 외부요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간화선이 올바로 행해졌다면 이런 모순과 문제들은 극히 일부 승려들의 파행으로 그쳤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현응스님이 간화선을 종지로 하는 조계종단의 수행방식에 대해 근본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고, 대중들도 이해할 수 있으면서 중생구제로도 확대될 수 있는 문제제기를 한 점은 높이 살 만하며, 논쟁의 초점은 여기에 놓여야 한다.
현실과 이를 반영한 소설의 관계처럼 원본과 재현 사이에는 괴리가 크다. 깨달음의 방식에는 크게 세 가지의 길이 있다. 불법이 원본이고 경전과 화두는 이의 재현이다. 경전을 사티(念)하여 부처님의 말씀에 담긴 진리에 이르려는 ①의 방식은 석존의 말씀과 기억을 통한 재현으로 언어의 한계와 기억에 의한 왜곡이 있다. 선정을 통하여 부처님의 마음에 다다르려는 ②의 방식은 언어와 인식의 한계를 초월하지만 이 또한 화두를 매개로 하는 한 현전이 아니라 재현이다. ② 이후, 곧 중국에서 선불교가 꽃일 피운 이후 1000년이 넘도록 불교의 깨달음의 방식은 더 이상 진화하지 않고 있다. 조계종의 종지인 간화선을 사수하려는 이든, 초기불교에 매료된 이든, 평행선을 달리는 논쟁은 그만 하고, 21세기 오늘의 상황에서 ③의 길, 곧 이해와 선정을 뛰어넘어 불법의 진여 실제에 다다르는 길이 무엇일까 함께 모색하는 것이 한국 불교를 혁신하는 것이자 원본인 불법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다.
인지과학적으로 보면, 두뇌의 신경세포의 네트워크가 확대되는 이해의 방식이 아니라 그 네트워크가 재배열되고 재조직되는 것이 깨달음이다. 바둑의 정석을 배우면 두뇌의 신경세포의 네트워크가 계속 확장하다가 임계점을 넘는 순간에 양의 변화가 질의 변화로 바뀌며 네트워크가 새롭게 재배열되고 이 순간 바둑의 도(道)를 터득하여 눈앞에 몇 수 앞의 바둑판이 그려진다고 한다. 이처럼 임계점을 넘어 물리적 구조만이 아니라 기능적 조직까지 변화시키면서 재조직되는 두뇌의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이 깨달음이다.
궁극적 진리는 언어를 떠나있지만, 우리는 언어를 방편으로 삼아 이에 이를 수 있다. 대신 진리에 이른 다음에는 언어를 버려야 한다. 현응 스님은 전자-遣言-를 수용해서 언어와 의식을 벗어나지 못한 이해로는 궁극적 진리에 이를 수 없음을 인정하고 ‘이해’라는 낱말을 변경하거나 언어와 의식을 초월한 이해로 의미부여를 해야 한다. 수불스님을 비롯하여 간화선을 옹호하는 이들은 후자-因言-를 수용하여 언어와 의식을 사다리로 삼아 궁극적 진리에 이르는 방편을 깨달음의 또 다른 방식으로 용인해야 한다.
돈오와 해오 사이에도 화쟁이 필요하다. 남종선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혜능만이 적통이고『단경』만이 정전이며 나머지는 모두 이단이다. 하지만, 『단경』 또한 ‘혜능의 구법이야기’일 뿐이다. 돈오만으로 구경각에 이르려고 한 남종선은 허구의 문학작품을 모든 사유와 행위를 규정하는 전범으로 삼은 것이 된다. 중도와 공, 연기에 대한 석존의 깨달음도 석존이 몰록 깨달았다 하더라도 대부분은 길게는 인류의 역사 600만 년, 짧게는 인지혁명 1만 년 이후의 사유가 축적해서 얻어진 결과물을 바탕으로 하여 새롭게, 다른 차원에서 재조직하거나 체계화한 것이다. 이는 해오(解悟)나 지해(知解)가 깨달음에 장애가 아니라 사다리일 수 있음을 뜻한다.
마음이란 육체와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두뇌 속의 500조 개 신경세포가 다발이 서로 연기 관계 속에서 화학물질을 주고받는 생성과정에 몸이 작용하는 것이자, 의미와 진리는, ‘듣다聞’가 ‘깨닫다’의 뜻이 되고 ‘맛보다’가 ‘시험하다’의 뜻이 되듯, 인간의 몸이 확장되어 이루어진다. 자비심은 내 몸이 약자의 고통에 접하였을 때 두뇌 속에서 공감을 담당하는 거울신경체제(mirror neuron system)가 타자와 나를 연기관계로 인지하여 그의 고통을 내 것처럼 아파할 때 발생하는 마음작용이다. 유식학과 인지과학을 결합하면, 알라야식에 있는 종자들을 마음대로 부려 언제든 청정한 불성으로 돌아가는 것을 해탈이라 하고, 인간의 의식 저 편의 마나스식과 알라야식이 작동하는 원리를 터득하여 이를 진여 실제와 일치시키는 것이 깨달음이다.
우주를 창조하고 그것이 연기하며 우주 삼라만상을 생주이멸하게 하는 궁극적 진리가 있으며 이는 돈오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지만, 그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진리와 깨달음은 진화하며 맥락성을 갖는다. 전자의 관점이나 인간이 초월적 존재라는 면에서 보면 수불스님과 수좌회 스님들의 주장이 옳다. 하지만, 이들은 전자에 얽매여 후자를 보지 못하였다. 후자의 관점이나 인간이 생물적 존재이자 실존적 존재이자 사회적 존재라는 점에서 보면, 현응 스님은 전자를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21세기 오늘 무수한 중생들이 고통받는 상황에서 볼 때, 깨달음의 진화 입장에서 지혜와 자비, 보디와 사트바, 깨달음과 역사를 종합하며 깨달음을 동체대비의 자비심과 보살행으로 연결 지은 작업과 해석이 훨씬 더 가치를 지닌다.
수행의 목적은 깨달음이 아니라 열반이다. 참된 깨달음이란 이 세계의 연기와 공성에 대해 전적으로 이해한 바탕에서, 자신의 두뇌의 신경세포와 몸 안에 간직된 온갖 경험과 기억과 의식, 마나스식과 알라야식에 있는 모든 종자와 인자를 찰나적으로 재배열하여 자신의 존재를 전혀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하여 악의 종자(種子)를 모두 거두어내고 선의 종자만이 의식과 실천으로 작용하게 하면서 업(業)에서 벗어나고, 이 존재가 새로운 지평에서 진여실제(眞如實際)에 다가가는 것으로, 모든 억압과 구속에서 벗어나는 소극적 자유(from freedom), 노동과 창조를 통하여 진정한 자기실현을 하거나 수행을 통하여 자신을 해탈시키는 적극적 자유(to freedom), 타자를 해탈시켜 내가 해탈이 되는 대자적 자유(for freedom)를 모두 쟁취하고 종합하는 것이자 타자를 깨닫게/자유롭게 하여 내가 깨달아/자유롭게 되어 열반의 환희심에 이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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