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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올린 게시글: 2016-01-27, (수) 6:40 am 

가입일: 2015-01-01, (목) 10:13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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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 자리
2012.11.20.
작년에 어느 큰스님을 친견하는 자리에 어느 비구니 스님께서 친견하는 큰스님을 앞에 두고는 “큰스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질문하는 것을 본적이 있다.즉 그 비구니 스님은 큰스님께 깨달음의 자리,부처 자리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선문답 삼아 여쭈어 본 것이다. 질문에 대한 답으로 큰스님께선 주장자로 바닥을 한번 쿵 때리셨는데, 선문답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은 도대체 무슨 답이 저런가 그랬을 것이다.

우리 불자들은 조석으로 예불을 할때 불상佛像을 향해 한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부처님 법을 공부한 이라면 부처님상은 밖으로 나타낸 상징이지 그 비구니 스님께서 궁금해 하신 깨달음의 자리,부처 자리가 불상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것이다. 그러기에 금강경에서도 상相으로써 부처를 보려고 하면 볼수 없다고 그랬고, 선지식이신 큰 스님을 앞에 두고도 큰 스님 어디 계십니까?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도대체 수행자들이 그토록 도달하고 싶은 깨달음의 자리, 부처 자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사실 가장 큰 아이러니는 그토록 도달하고 싶은, 경험하고 싶은 부처 자리에서 우리는 한번도 떠나 본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즉 수행자가 깨달음의 자리, 부처 자리를 목표 삼아 열심히 수행하더래도 종국에 가서 깨닫는 것은 이미 벌써 도착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보면 세상 도처가 다 부처 자리고 깨달음의 자리이다.하지만 이런식으로 이야기를 해 주면 친절하지 않다. 간절히 궁극을 묻는 사람에게 어떻게 지금도항상 그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 있고, 이미 원하는 종착지에 벌써 도착해 있다는 사실을 차근차근 설명해주지 않으면 아무리 옳은 이야기래도 듣는 사람은 너무도 불친철하게 느낄뿐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처처에 두루 존재하는 부처 자리를 어떻게 알수 있는지 부족하지만 그래도 설명을 한번 해 보도록 하겠다.

깨달음의 자리, 부처 자리는 가장 쉬운 말로 하면 “앎”이다. 예를 들어 깨닫기 위해 조용히 앉아 참선을한다고 해 보자. 보통 가만히 앉아서 생각이 올라 왔을때 위빠사나를 한다면 그 생각을 따라가지 말고 생각이떠 올랐다는 것을 바로 알아채거나, 수식관을 한다면 다시 숨의 숫자를 세거나, 화두를 들고 있었다면 생각을따라가지 말고 화두로 마음을 돌리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생각이 막 떠올랐을때 우리안에 무언가가 “아! 지금생각이 올라왔구나” 하고 안다. 도대체 무엇이 그러면 생각이 올라왔다는 것을 알아챘을까? 생각이 올라왔구나 하고 아는 것은 또 다른 생각인가?아니면 생각이전의 뭔가 다른 놈이 알아채는 것인가? 한번 가만히 들어다보자. 생각이 올라왔다는 것을 아는 “놈”이 무엇인가?무엇이 알아채나?

흔희 생각이 올라온 것을 알아채는 것이 또 다른 생각이다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번 더 자세히살펴봐라. 우리는 무언가가 있거나 없어졌을때 항상 생각을 통해야지만 아는가?예를 들어 배가 고플때 생각으로 “아! 지금 배 고프다”라고 굳이 생각을 내지 않아도,언어화 하지 않아도 배 고프다는 사실을 즉시 알수 있지않는가? 똑같은 이유에서 생각이 올라왔을때 꼭 “지금 생각이 올라왔다”라고 언어화, 생각화하지 않아도 생각이 올라왔다는 것을 무언가가 바로 알지 않는가?혹시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면 자세히 한번 들어다 보면 알수 있다.생각이 떠 올랐을때 “지금 생각이 떠 올랐구나” 라는 생각 없이도,언어의 작용이 없이도 즉시 무언가가바로 고요한 가운데 그냥 안다.

여기까지 확인이 되었다면 그 아는 자리를 좀 더 자세히 들어다 볼 필요가 있다. 왜냐면 그 곳이 바로 우리가 찾는 부처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한번 자세히 보자. 우리가 생각이 올라왔다는 것을 아는 그 자리, 그아는 “놈”은 어떤 특별한 모양이나 형태가 있던가? 언어를 쓰지 않고도,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도 바로 아 지금생각이 일어났구나하고 아는 그 자리,아는 그 “놈”을 자세히 봐라. 대개 우리는 생각을 그냥 따라가는데 생각을따라가지 말고 생각이 일어났다는 것을 아는 그 자리를 봐라. 앎이 일어난 그 자리를 봐라. 그 아는 “놈”이 어떤일정한 모양이 있는가?형태가 있는가?자세히 한번 봐 봐라.

그 다음으로 앎의 자리는 도대체 어디에 위치를 하는지 찾아봐라.그 아는 “놈”이 어디에 있는지 봐라. 물론 처음엔 흔희 잘 살펴보지도 않고 내 몸안, 머리안에 있다고 할것이다.왜냐면 내 몸을 항상 나라고 동일시하던 무시이래의 버릇때문에 그런데 한번 다시 봐라. 하늘에 구름이 지나가는구나 하고 아는 앎이 몸안에 있는가?아니면 구름에 가 있는가? 그 앎이 정말로 몸안에 있다면 구름이 몸안에 위치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않그런가? 내 눈앞의 벽을 봐라. 그 벽이 있음을 아는 앎이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내 몸안에서 일어나는가 아니면그 앎이 내 몸 밖 벽에서 일어나는가?아주 자세히 들여다 봐라. 그리고 나서 또 물어라. 앎의 기준에서만 봤을때안과 밖이 따로 있는가? 내 어깨가 결린것을 아는 앎이나 구름이 지나가는 것을 아는 앎이 하등의 차이가 있는가?

마지막으로 그 앎이 더럽혀 질수 있는지,물들수 있는지 한번 봐라. 내가 예를 들어 단풍 나무를 보고 나서 이어서 핸드폰을 봤다고 해 보자.단풍 나무가 있음을 아는 앎이 핸드폰을 봤을때 핸드폰이 있음을 아는 앎의작용을 물들일수 있는가?물들일수 있다면 핸드폰을 봤을때 그전에 봤던 단풍나무의 모습이 핸드폰 모습위에 중첩이 되어서 눈앞에서 어른 거려야 한다. 그런데 실제는 단풍나무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아주 깨끗이 사라지고,핸드폰이 있다는 앎만 딱 있다.즉 이 앎은 허공 모양을 한 거울과도 같아서 앞에 있는 대상이 사물이든 생각이든 느낌이든 일어났다는 것을 그냥 비추어 바로 알뿐,그 대상들이 거울 자체, 앎 자체를 물들이지 못한다. 그리고 앎은 그 대상들이 마음 거울앞에 나타나기 이전부터 이미 존재했던 것이다. 그래서 앎 자체는 본래 청정한것이고,또한 이 세상이 생기기 이 전부터, 내가 이 몸받기 이전부터 지금처럼 존재해온 것이다.

깨달음의 자리, 부처 자리를 경험하고 싶은가? 지금 이 글을 읽고 아는 그 자리가 바로 수행자가 그토록찾던 자리이다. 멀리 있는 것도 수십년간 고행해서 얻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도대체 뭐가 아는지, 생각을 따라가지 말고 주위를 안으로 회광반조해서, 아는 자리의 모양이 따로 있는지,그리고 어디에 앎이 위치하는지 자세히 살피고 또 살펴봐라.앎 자체의 성품을 깨달을때 그곳에 바로 부처가 있다.

[출처] [수행기] 부처 자리|작성자 혜민

텅빈 것이 느낌이 있다
2012.11.20.
참선 수행을 처음 시작한 분이나 아니면, 오랜기간 정진한 분의 경우에도 가끔식 보면 잘못 오해를해서 수행이 완전히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경우가 있다. 그 가장 큰 오해가 바로 수행을 통한 깨달음을 참선중에느끼게 되는 좋은 느낌이나 특별한 체험과 동일시 하는 것이다. 즉 참선을 하다가 보면 마음이 아주 고요하고집중된 상태에서 느끼게 되는 환희심, 온 몸으로 느껴지는 전율, 내면의 다양한 빛깔이나 천상의 소리, 혹은 부처님이나 보살님의 모습을 본 것을 가지고 뭔가 깨달음이 이런 것이 아닐까하고 착각하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이는 참선을 하는 이유가 초능력, 혹은 신통력을 얻기 위해서 한다는 사람도 보았다. 더 황당한 것은 아예 신통력의 유무를 가지고 깨달음의 정도를 가름하려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깨달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깨닫고자 하는 것은 원래부터 있었던 것을 깨닫는 것이지,새로 생겨난 것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면 아무리 좋고 신비한 경험이라고 하더래도 새로 생겨난 것은 무상하기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게 된다. 예를 들어 마음이 잠시 고요하고 집중이 된 상태라는 조건이 맞으니까 온 몸으로 느끼는 전율감이나 환희심 같은 것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 현상을 일으킨 조건들이 변하게 되면 신비한 체험은 바로 사그러져 버린다.다시 말하면,깨달음은 연기 되어서 일어나는 어떤 상태가 아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들은 연기된 특별한 경험에 엄청난 의미를 두고 집착을 해서 자꾸 그것을 다시 경험하려고 하는데, 이러면 안타깝게도 좋았던 경험 자체가 바로 고통의 원인이 되어 버린다.

우리의 의지처로 삼고자 하는 깨달음, 해탈지는 원래부터 있었던 것을 그냥 바로 아는 것이지 새로 생겨난 신비한 느낌이나 경험이 아니다. 없었던 것을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를 자세히 보니까 원래부터 일체 만물이 다 무자성 無自性 이였구나 하는 것을 그냥 바로 아는 것이다. 좀 더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좀 어둑어둑한 저녁시간에 집에 도착하니까 독사 한마리가 문앞에서 떡하니 길게 있는 것이 보였다고 가정을 해 보자. 분명 두려움에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독사를 보고 놀라서 어쩔줄 모르면서 공포와 온갖 걱정에휩싸일것이다. 그런데 한참을 무서워하면서 걱정을 하다가 다시 한번 좀 더 주위를 기울여 자세히 보니까 독사인줄 알었던 것이 동아줄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해 보자. 독사가 아니고 동아줄이였다는 것을 안 순간 독사로 착각하면서 그동안 느꼈던 온갖 공포, 걱정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게 된다. 전에 느꼈던 공포감이나 걱정을기쁨,환희심의 경험 상태로 어떻해든 바꾸어서 없애는 것이 아니고 독사(자성)인줄 알았던 것이 알고보니 동아줄(무자성)이였다는 있는 그대로를 그냥 알아버리는 것에서 바로 해탈이 된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 예전에 몰랐던 것을 한가지 알게 된 것이 있다. 뭐냐면 “나”를 포함한 만물이 다 무자성임을 아는 앎, 텅텅빈 마음 바탕에서 무지개처럼 모든 만물이 잠시 일어난다는 것을 아는 것에는 뭔가 미묘한 느낌이 같이 있다. 꼭 말로 하자면 자유함, 가벼움, 편안함이라고 밖에 말할수가 없을 것 같다.모든 것이 인연에 의해서 일어났다가 무상하게 사라진다는 것을 아는 앎, 평소에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단점들이 사실그 뒤에 소유자가 따로 없다는 것을 아는 앎,눈앞에 보이는 것들 일체가 마음이라는 거울위에 잠시 비쳐진 영상이라는 것을 아는 앎에는 자유함과 가벼움,편안함이 있다.마치 독사가 아니고 동아줄이였구나를 알고 나서 느끼는 안심이 되는 그 느낌과도 어쩌면 비슷하다. 대상으로 들어난 것들이 무지개와 같아서 딱히 집착할 일이 없음을 아는 앎과, 주인공인 이 앎은 절대로 더럽혀 질수가 없음을 아는 것에서 마음이 쉰다. 그 쉼안에 자유함,가벼움, 편안함이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놀라운 발견은 텅텅빈 마음에서 세상 사물을 바라보면 그안에 자비의 성질이 있다. 즉 지혜와 자비가 따로 따로가 아니고 망상이 완전히 없는 상태에서 관심이 어떤 대상으로 향하면 그안에 모든 것을포용하는 따뜻함과 온화함, 그저 같이 있음이 있다. 자비하려고 인위적인 노력을 전혀 들이지 않아도 망상이 없는 지혜의 마음 원래 성질 그대로가 자비였다. 이 마음은 완전히 열려있고, 그안에 모든 것이 다들어와 있으며,그냥 같이 하려한다. 결국 문수보살과 관세음보살이 이름만 다른 하나의 몸이였다.

혹자는 앞에서 말한 느낌과 뒤에서 말한 느낌이 어떤 차이가 있냐고 물을수 있다. 차이는 간단하다. 뒤에서 말한 텅빈 앎에서 나온 느낌인 자유함, 가벼움, 편안함, 평화로움, 자비함은 앞에서 말한 느낌과는 다르게 변하지가 않는다. 그 점이 다르다.

[출처] [수행기] 텅빈 것이 느낌이 있다|작성자 혜민

텅빈것이 살아있다
2012.09.22.
우리의 불성(佛性)은 텅빈채로 있다. 즉, 아무것도 없는채로 살아있다. 그런데 이것을 경험하지 않고 관념으로, 생각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마치 텅빈 무언가가 따로 있다고 상(相)으로써 잡는다. 그래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무아(無我) 사상과 정면으로 충돌한다고 착각한다. 심지어는 있다, 살아있다는 말에 끄달려 힌두교의 범아론적 가르침과 뭐가 다르냐고 의이를 제기한다. 그래서 본래청정, 본래면목, 주인공을 말하는 선불교를 포함한 대승불교 전체가 다 부처님 초기 근본 가르침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없다는 것은 중생들이 몸을, 생각을, 느낌을 나라고 동일시하는 그 착각을 부처님께서 쳐 내신 것이다. 오온이 홀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연기되어서 아주 잠시 머무러 있는 것이지 스스로 변화하지 않고 따로 존재하는 자성(自性)이 없다는 말씀이다. 실제로 중생들이 나라고 집착하는 몸과 느낌과 생각의 관점에서 보면 틀림없이 무자성이고 무아다. 정말로 그렇다. 그런데 무자성이고 무아인 것을 깨닫고 난 후엔 어떻게 될까? 그 후의 일을 누군가가 진작에 소상히 일러 주었더라면 오랜 시간동안 허송세월을 보내지 않고 고생도 덜 했을텐데 하는 것이 있다.

바로 그 무자성이고 무아이구나 하는 것을 무언가가 살아서 안다는 사실이다. 내가 무아임으로 아무것도 없는줄 알았는데, 이것이 끝인줄 알았는데, 뭔가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살아서 안다. 이것이 가장 큰 신비이다. 아무것도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그 무엇도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분명 생각이 완전히 끊어지고 난 후에도 무언가가 살아서 텅빈 가운데에서도 무아, 무자성이구나 하는 것을 즉시 안다. 지금 바로 텅비여서 아무것도 없구나,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말하듯 얻을것이 아무것도 없는 고로 (이무소득고 以無所得故)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점을 안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절대로 개념으로 생각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배고플때, 아! 배고프구나 하는 것을 생각을 통하지 않고도 바로 즉시 알수 있듯, 그냥 뭔가가 바로 안다. “나”라고 했던 것이 그리고 무자성인 세상이 둘 다 텅비였다는 것을. 그리고 나와 세상을 둘로 나눈것은 오직 생각이였다는 것을.

그런데 여기까지 오게 되면 텅빈 것을 아는 그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찾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잘 찾을수가 없다. 왜냐면 그 텅빈 것을 아는 것이 따로 어떤 형상이나 자성(自性)을 가지고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텅빈 것 자체이기 때문이다. 즉 앎과 텅빔이 둘이 아니고, 텅빈체로 있는 것이 살아서 안다. 즉 아무것도 없는 텅빈 마음이 살아 있고 그것이 엄청난 지성(知性)을 가지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 앎은 허공과 같이 텅비였기 때문에 더럽혀 질수가 없다. 허공에다 아무리 똥칠을 해 봐야 더럽혀 질수가 없는 이유와 같다. 또한 이 앎은 몸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사실 몸 안밖 따로 없이 안다. 앎의 관점에서 보면 내 어깨가 결린다는 것을 아는 것이나 새소리가 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나 하등의 차이가 없다. 정말로 똑같은 앎이다. 즉 나무를 보면 바로 그 앎이 나무에 있다. 산을 보면 그 앎이 산에 있다. 뒤집어 말하면 나무가 있다는 것을, 산이 있다는 것을 아는 마음이 바로 텅빔 그 자체다. 그리고 그 텅빈 앎은 어느 한곳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고 안밖을 다 투과한다. 천지가 그냥 텅벼있고 그러기에 주와객, 나와 세상을 동시에 포섭한다.

분명 여기까지 읽고 나면 어떤이는 또 관념으로 머리로 이해해서 나에게 따질것이다. 부처님은 분명 없다고 하셨는데 어찌해서 있다고 하냐고. 없는 체로, 텅빈 체로 있는 것도 있는 거 아니냐고. 아니면 반대로 텅빈 것이라는 것을 또 다른 상으로 붙잡고나서 노력해서 얻어야하는 어떤 대상, 목표로 만들어 버린다. 사실 둘다 문제이다. 생각속에 갇혀서 이해의 수준에서 바라보면 이처럼 항상 텅빈 마음과 그 텅빈 마음을 경험하는 뭔가가 따로 있다고 자꾸 이분화(二分化)하여 이해하려고 한다. 그래서 텅빈 마음을 관념으로 “내”가 얻으려고 하거나, 텅빈 마음을 경험하고 나서도 “내”가 남아 있다고 생각으로 오해한다. 왜 이렇게 질문이나 오해를 하는지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생각이 완전히 끊어진 후, 의식이 다시 깨어나 주객을 포섭하는 앎을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생각으로, 상으로 자꾸 잡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무자성, 무아임을 바로 아는 앎은 연기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연기해서 일어 났다고 하면 그 앎도 변할수 있다는 말인데 그 깨달음은 변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덧붙이자면 텅빈 앎은 세상에 자기 혼자 밖에 없다는 것을 또 스스로 안다. 텅빈 마음이 깨어나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한다. 이것이 수행의 엄청난 묘미이다. 부처님께서 태어나시자 마자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앎은, 그 텅빈 마음은 부처도 알수 없다는 도리가 바로 여기에 또 있다. 부처가 몸을 구중궁궐(九重宮闕)속에 숨겼다는 도리도 여기에 있다. 이 자리를 누구에게도 보여줄수가 없으므로 시자에게 빗장문을 잠그라는 도리도 여기에 있다. 선불교의 선(禪)자를 파자해 보면 왼쪽에 볼시 示 와 오른쪽에 홀로단 單 으로 이루어졌다. 즉, 선은 혼자밖에 볼수 없다는 말이다. 삼계(三界)안에 그 텅빈 앎만 홀로 가득있다.

[출처] [수행기] 텅빈것이 살아있다|작성자 혜민
혜민스님 블로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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