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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올린 게시글: 2016-01-25, (월) 6:29 am 

가입일: 2015-01-01, (목) 10:13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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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불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세미나 발제 3
2016년 01월 21일 (목) 16:06:59 박병기(한국교원대 교수)

1. 우리 시대, ‘깨달음’의 풍경들

우리 시대, 깨달음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인터넷 검색을 통해 ‘깨달음’을 찾아보면 매우 다양한 형태의 깨달음과 만나게 된다. 많은 내용이 불교와 관련된 깨달음을 언급하는 것이지만, 그 중에는 일상 속 깨달음을 이야기하는 것들도 적지 않게 섞여 있다.

“‘골프계의 돌부처’ 김경태는 지난해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스윙은 늘 흔들리기 마련이어서 돌아갈 곳, 기본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진정한 앎은 경험에 의한 깨달음에서만이 얻어지는 것’이라며 ‘독서·토론 수업을 활성화하고, 다양한 체험활동을 통해 스스로 체득하는 깨달음을 얻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예술이 미를 추가한다는 근본적 테제에 동의하지만, 편안함과 친근감을 넘어서서 진정한 깨달음, 때로는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깨달음을, 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을 환기시킵니다. 그래서 모든 예술작품이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골프 선수는 골프채를 휘두르는 스윙(swing)이 늘 흔들리게 마련이고 따라서 돌아갈 곳, 기본이 있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고, 한 지역의 유치원과 초·중등교육을 책임지는 교육감은 진정한 앎이 경험에 기반한 깨달음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교육에서 다양한 체험활동의 기회를 제공해주고자 한다고 신년 포부를 밝히고 있다.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두 사람 모두 깨달음을 불교의 고유한 개념이 아닌 일상적인 그것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이렇게 보면 우리 시대와 사회 속에서 깨달음은 더 이상 불교만의 전유물일 수는 없다고 보아야할 듯하다.
물론 깨달음에 관한 담론은 여전히 불교와의 연관성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도 충분히 유념할 필요는 있다. 깨달음은 불교 전통 속에서 마련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고, 그것이 불교계를 넘어서 일반 사회의 영역에도 확산되어 있다고 평가하는 것이 정당한 인식일 것이다. 실제로 해제법어나 신년법어 등의 형태로 선불교 전통의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고, 위의 골프 선수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깨달음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 ‘골프계의 돌부처’라는 별명을 얻고 있는 것도 깨달음이라는 말의 저작권이 불교에 있음을 확인해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이라는 말이 불교, 그 중에서도 선불교 전통 속에서 형성되어 21세기 초반 한국사회에 전승되고 있고, 그것이 불교 고유의 범주를 넘어서는 지점으로까지 확산되면서 사회 구성원들의 일상어로까지 자리 잡았다는 우리의 인식은 그러나 그 깨달음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이르면 상당한 정도의 혼란과 함께 합의의 어려움과 만나곤 한다. 그 혼란과 합의의 어려움은 불교 경전이나 전통에 근거를 둔 개념 정의의 문제에서부터 일상의 개념들을 포괄할 수 있는 개념의 외연(外延)과 내포(內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펼쳐질 수 있다.
우선 깨달음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상황 자체에 관한 논란의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과연 위의 두 사례에서 화자들 스스로 깨달음의 상태 또는 경지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쉽게 동의해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첫 번째 사례에서 화자는 골프채를 휘두르면서 늘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체험을 했고, 그 과정에서 돌아가야 할 곳, 곧 기본이 있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고, 그 생각을 깨달음, 그것도 ‘큰 깨달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작은 깨달음이라면 모를까, 정말 이런 수준의 생각을 큰 깨달음으로 인정해줄 수 있을까? 아마도 그는 우리의 인정과 관계없이 그 말을 계속 사용할 가능성이 높고, 그 말을 듣는 사람들 중에는 우리와 달리 그것이 정말 큰 깨달음이라고 인정해주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 인정에 대한 시비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럴 경우 깨달음을 인정하는 객관적이고 명료한 기준이 정말 있는가에 대한 반론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사례의 경우는 조금 차원이 다르다. 진정한 앎이 경험을 통한 깨달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주장은 앎과 함, 깨달음 등의 개념들을 연속으로 불러내면서 수행론과 교육학의 핵심 쟁점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 쟁점 자체가 오늘 우리의 주된 논점은 아니지만, 다음 이야기에서 주로 몸을 중심으로 하는 체험활동을 통한 깨달음을 강조하고 있어 수신(修身)의 전통이나 일상적 수행을 강조하는 선불교적 전통을 떠올리게도 한다. 다시 말해서 전자에 비해 좀 더 불교적 관점의 깨달음 개념과 가까운 것으로 분류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두 번째 사례에서 우리가 더 주목해볼 만한 사태가 배경으로 숨겨져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교육의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우리 학교교육이 경험을 통한 깨달음의 기회를 주지 못한 채 말로만 주고받는 지식전달의 장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이른바 ‘진보교육감’ 중의 하나로 분류되는 화자는 바람직한 교육은 학생들로 하여금 체험을 통한 깨달음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두 번째 사례의 깨달음은 알음알이와 진정한 깨달음의 구분이라는 선불교적 전통의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구체적인 해석의 국면으로 접어들 경우 상당한 응용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세 번째 인용에서 사용되고 있는 깨달음 개념은 좀 더 우리들의 주제와 가까워보인다. 동양고전에 관한 현재적 인식을 통해 지성의 지평을 열어온 한 지식인(성공회대 고 신영복교수)가 사용하고 있는 깨달음의 의미는 ‘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예술의 의미를 물으면서 그는 예술을 통한 미적 가치의 추구가 시각적인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때로 불편한 느낌을 통해 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으로서의 깨달음을 가져다준다고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좀 더 확장해본다면, 깨달음은 결국 현실과 그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신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 사회에서 사용되고 있는 깨달음 개념은 그 뿌리가 불교의 그것에 닿아있음에도 그 외연(外延)은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왔고, 이제는 불교계 밖의 개념에 대해서도 충분히 고려하면서 깨달음 논의가 진행되어야할 정도의 일반적인 용례를 갖추게 되었음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일상 속에서 얻는 작은 깨달음은 물론 교육 상황 속에서의 체험을 통한 깨달음, 예술 작품 등을 감상하면서 얻을 수 있는 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으로서의 깨달음 모두 불교계의 깨달음 논의에서 포함해야만 하는, 살아있는 깨달음의 의미들인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 세 가지 사례를 통해서 깨달음을 둘러싼 우리 시대와 사회의 풍경이 불교의 그것에 한정되지 않는 광범위함과 함께 개념 정의에 관한 합의에 어려움을 가져올 수 있을 정도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음을 확인할 필요성도 공유하게 된다. 깨달음 개념의 저작권이 불교에 있음을 감안해보면, 불교의 깨달음 개념을 중심에 두면서도 그 외연의 지속적인 확대와 함께 내포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열린 논의까지도 시도해야만 할 것이다. 2015년부터 본격화된 불교계의 깨달음 논쟁은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살펴본 외부의 풍경에 일정한 영향을 받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 교리 자체의 논쟁을 포함하면서 심층적인 내용과 쟁점을 더해왔고 여전히 진행 중이다. 오늘 우리의 담론은 그 중에서도 불교계 내부의 깨달음 논쟁에서 출발하여 사회 전반의 상황을 포괄하는 지점까지 펼쳐져 있고, 특히 논자에게 주어진 역할은 깨달음과 사회의 만남 문제를 조명해보는 것이다.
쉽지 않은 과제이다. 현응스님의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2015.9)는 주지하다시피 그의 저서 『깨달음과 역사』 출간 이후에 전개된 한국 불교계의 깨달음 관련 상황에 대한 비판적 인식의 표출이었고, 이어서 전국선원수좌회의 「누가 조계의 주인인가」(2015.10)라는 반론이 나왔다. 다시 현응스님의 반론인 「대승불교와 조계선풍, 그 현대적 계승과 발현을 위해」(2015.10)와 수불스님의 재반론인 「조계종지의 현대적 구현-현응스님의 발제문을 읽고」(2015.12)가 나온 상황에서 오늘 우리의 담론은 그 논쟁의 맥락을 온전히 벗어날 수는 없을 듯하다. 다만 논자에게 주어진 주제가 깨달음의 사회화라는 대승불교의 기본 지향과 맞닿아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21세기 초반 한국사회와 불교가 어떻게 만날 수 있고 또 만나야 하는지에 관한 논의를 깨달음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것으로 일정한 역할을 대신하고자 할 따름이다.

2.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

불교의 깨달음 전통이 우리 사회와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에 주된 관심을 갖는 논자의 입장에서도 깨달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피해갈 수 없을 듯하다. 왜냐하면 이 물음에 관한 최소한의 답을 찾는 과정을 전제로 하지 않을 경우 전혀 다른 범주의 논의가 혼란스럽게 펼쳐질 가능성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일상어로서 깨달음의 뿌리가 불교에 있다는 전제는 어렵지 않게 수용할 수 있고, 그렇다면 먼저 현재의 한국불교계에서 깨달음 개념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고, 어떤 적용의 맥락을 지니는지에 관한 고찰은 필수적이다.
물론 이 물음을 던지는 일도 생각만큼 만만치는 않다. 먼저 ‘현재의 한국불교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규명해야 하고, 그 바탕위에서 다시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던져지는 맥락과 담론공동체 등을 고찰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과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주로 대승불교적 전제 아래에서 비구·비구니 종단을 중심으로 재가보살까지를 포함하는 사부대중공동체를 표방하고 있는 대한불교조계종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불교계를 보고자 한다. 당연히 염두에 두고자 하는 경전도 소의경전인 『금강경』을 비롯한 선어록 등의 대승경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초기불교 경전인 ‘빠알리 니까야’ 등을 배제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오히려 초기에서 대승에 이르는 회통불교가 현재 한국불교의 주요 특성을 이룬다는 점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깨달음의 사회화라는 주제를 전제로 깨달음과 관련된 경전의 논의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거나 통용될 수 있는 깨달음에 관한 일반적인 논의를 좀 더 정리하고 넘어가보기로 하자. 국어사전에서 깨달음은 ‘생각하고 궁리하다가 알게 되는 것’이라는 뜻을 지닌 명사이다. 한자어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각(覺)과 오(悟)가 거의 유사한 개념으로 제시될 수 있지만, 이 두 한자어는 동사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말의 깨달음과 조금 차이가 있다. 일상어의 깨달음은 이러한 사전적 정의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평상시에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특별한 계기를 통해 마음속 울림을 가져다줄 수 있을 정도의 깊이를 포함하는 앎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일상적 의미의 깨달음 정의에서 주목해볼 수 있는 두 요소는 생각하고 궁리하는 과정과 그 사유의 과정을 통해 알게 되는 것들이다. 이 과정과 결과물은 서로 긴밀한 연계성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두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을 경우에만 깨달음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는 점에서 모두 필수요소이다. 깨달음은 우선 생각하고 궁리하는 과정을 전제로 한다. 생각하고 궁리한다는 것은 어떤 사태 또는 사건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응하기 보다는 일정한 시간을 갖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그 생각에 따라 관점을 형성해가는 과정으로 해석될 수 있고, 그 과정을 통해 이전에는 알지 못했거나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들을 알게 되는 것들이 있을 때 비로소 깨달음이 온전히 성립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사유 과정 중심의 깨달음 정의는 성찰과 실천을 통해 알게 되는 것들을 배제할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우리의 사유는 주로 언어와 논리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그 논리 또한 형식논리학의 그것으로 한정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으로 얻을 수 있는 지적 명료함이 서양철학사의 핵심 목표로 일관되게 설정되어 왔고, 특히 인과율에 근거한 논리적 사유 전개는 과학기술의 발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면서 19세기 이후의 역사가 서양의 지배로 이어질 수 있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플라톤의 이데아를 최종적인 명확함으로 이해하는 펨버턴(H. J. Pemberton)은 플라톤이 지식의 단계를 설정함으로써 단순한 형식논리학의 범주를 넘어서 변증법적인 차원까지 인식하고 있었다고 전제하면서도 그의 최종 목적은 결국 ‘최종적인 명확함’의 추구였다고 말한다. 티벳불교를 중심으로 불교의 지향점을 생사를 뛰어넘는 ‘궁극적 지혜’로 보는 펨버턴에게 최종적인 명확함은 지적인 명료함과 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적인 명료함은 논리에 근거한 사유와 경험적 귀납의 과정 등을 통해 확립될 수 있고, 그것이 최종적인 명확함 자체로서의 이데아와 만나게 되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와 관련된 윤리적 답까지를 포함하게 된다.
서구적 근대를 열망하는 삶을 추구하면서 압축성장에 일정 부분 성공한 21세기 초반 한국인들의 사유는 최소한 표면적으로만 보면 서구인, 특히 미국인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기성(利己性)에 관한 인정을 기반으로 논리적 합리성을 도덕성의 영역으로까지 확장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는 것은 물론, 물질 중심의 가치추구 과정이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서 일반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감정 위주의 판단과 행동, 이른바 성급한 성과에 집착하는 ‘빨리빨리’ 문화 등의 현상과 함께 그 심층에서 발현되곤 하는 가족주의와 왜곡된 공동체 문화 등이 여전히 남아 있어 과연 우리에게 일관된 가치관 체계가 남아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는 경우도 많다.
이런 현실 속에서 최종적인 명확함이나 궁극적 지혜 같은 목표는 비현실적인 것일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사부대중공동체를 전제로 하는 한국불교계에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목표들일 수밖에 없고 우리는 그 중에서도 깨달음의 과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궁극적인 지혜에 기반한 열반을 목표로 삼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당위적 명제 속에는 깨달음의 내용으로서의 궁극적 지혜와 그것을 통해 가능한 열반이라는 핵심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결국 우리는 깨달음을 통해 삶에 관한 궁극적인 지혜를 얻고자 하고, 그 지혜를 통해 다시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열반을 얻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 궁극적인 지혜를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을 것인가의 방법적 실천의 문제로 넘어갈 수 있게 된다.

3. 깨달음의 과정과 자비심 문제

철학의 오랜 주제 중 하나는 죽음이다. 철학을 죽음 연습으로 정의한 소크라테스 이래로 동서양의 주요 철학 전통 속에서 죽음은 핵심적인 과제였고, 그것은 다시 삶의 문제로 이어지면서 실천적인 윤리 문제로 환원되는 순환의 고리를 밟아왔다. 불교가 추구해온 궁극적인 지혜 또한 그 죽음과 삶의 문제와 과정 속에서 빛을 발하고, 특히 고타마 붓다의 출가와 깨달음은 생로병사라는 삶과 죽음의 불이성(不二性)에 초점을 맞추고 전개되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이제 그 불이성의 기반이 되는 연기와 공의 진리를 어떻게 깨달아 삶 속에서 여여한 걸림없음[無碍]의 자유를 얻느냐 하는 실천적인 것이다.

불성(佛性)이 지금 그대 몸에 있는데, 어찌 밖에서 구하겠는가? ......“두루 나타나면 항하사 같은 세계를 다 감싸고 거두어들이면 하나의 작은 티끌에도 있습니다. 아는 사람은 이것이 불성인줄 알지만 알지 못하는 사람은 정혼(精魂)이라고 부릅니다.” 왕이 듣고 바로 마음이 열려 깨달았다[心卽開悟].

‘흐름을 거슬러가는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미묘한 진리를
어둠에 뒤덮이고 탐욕에
불붙는 자들은 보지 못한다.
하느님이여, 나는 이와 같이 성찰하여 진리를 설하지 않고 그냥 있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중략)......
이와 같이 설하자 세존께서는 하느님의 청원을 알고는 뭇삶에 대한 자비심으로 깨달은 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내가 누구에게 가장 먼저 가르침을 설할까? 누가 이 가르침을 신속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서 세존께서 이와 같이 생각했다. ‘그 알라라 깔라마는 현자로서 유능하고 슬기로운 자이며, 오랜 세월 눈의 티끌을 여읜 자이다. 내가 알라라 까라마에게 가장 먼저 가르침을 설하면 어떨까? 그가 빨리 이 가르침을 이해할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불사가 성취되었다. 내가 가르치리라. 내가 가르침을 설할 것이다. 내가 가르친 대로 그대로 실천하면 머지않아 훌륭한 가문의 자제로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그 목적인 위없는 청정한 삶의 완성을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알고 깨닫고 성취하게 될 것이다.’

첫 번째 인용은 지눌스님이 자신의 마음속에 불성이 있음을 알아차리는 과정을 왕의 깨달음 사례를 통해 보여주는 장면을 담고 있고, 두 번째 이후의 인용은 초기율장인 『마하박가』에서 붓다가 가르침을 전하고자 마음을 내는 장면과 그 가르침을 처음으로 전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장면이다. 하느님[梵天]의 간절한 청을 중생에 대한 자비심으로 받아들인 붓다가 맨 처음 가르침을 전하고자 마음을 낸 알라라 깔라마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수행의 동료였던 다섯 수행자들에게 첫 번째 가르침을 펴는 초전법륜의 과정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이 두 장면에서 붓다가 얻은 깨달음의 진리를 무엇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지에 관한 논의가 포함되어 있지 않고 따라서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논란이 가능하기도 하지만, 붓다의 가르침을 전해 받은 제자들이 깨달음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에 관한 여러 가지 함축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첫 번째 지눌의 인용에서는 ‘듣고 마음이 열려 깨달았다.’는 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고, 아래 『마하박가』 인용에서는 붓다의 중생에 대한 자비심이 불교의 출발점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오랜 세월 눈의 티끌을 여읜 자’가 붓다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그대로 실천’하면 출가의 목적인 위없는 청정한 삶의 완성을 이룰 수 있다는 점이다.
먼저 붓다의 뭇삶에 대한 자비심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깨달은 진리 자체가 연기법이라는 점에 기반을 두고 그 진리의 관점에서 중생을 바라볼 경우 자비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는 선순환의 고리 때문이다. 붓다가 수행과정을 통해 도달한 궁극적 지혜가 곧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서로 연기적으로 얽혀 있다는 사실 자체이고, 그 사실로부터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자비심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 초기 전법 과정에서부터 명료하게 드러나 있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런데 그 진리는 흐름을 거슬러가는 심오하고 미묘한 것이어서 ‘오랜 세월 눈의 티끌을 여읜 자’에게 전해질 때라야 비로소 알아들을 수 있게 되고, 그렇게 이해된 진리를 그대로 실천할 때에야 비로소 열반, 즉 위없는 청정한 삶의 완성을 이룰 수 있다.
지눌의 인용에서는 깨달음의 과정이 듣는 과정과 마음이 열리는 과정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담은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열려야만 비로소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거기에 그는 그 깨달음 이후에도 오랜 세월 쌓아온 습기를 제거하기 위한 점수(漸修)의 과정이 필요함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깨달음의 과정은 듣고 마음이 열리고 지속적으로 닦아가는 세 과정이 되는 셈이다. 물론 최상근기를 지닌 사람의 경우는 예외이고, 그 경우가 바로 ‘오랜 세월 눈의 티끌을 여읜 자’에 해당할 것이지만,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중생들에게는 마음이 열린 이후의 실천, 즉 닦음의 과정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그 닦음으로 상징되는 실천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다. 한국불교 전통 속에서 그 닦음은 주로 좌선 중심의 간화선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지만, 붓다의 가르침이 수행의 과정으로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특히 가르침을 듣고 실천하는 과정에 주목해야만 하는데, 그 가르침이 연기법과 공(空)의 진리에 근거한 뭇삶에 대한 자비심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의 존재가 다른 모든 존재하는 것들과 연기적으로 얽혀 있다는 사실 자체에 관한 지혜, 즉 여실지견(如實知見)의 지혜는 그 얽힘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중생에 대한 자비심으로 직결될 수밖에 없다.
그럴게 본다면 붓다가 가르침의 과정에서 강조한 실천은 한편으로 전해 받은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닦음으로서의 그것이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뭇삶의 고통스런 삶에 대한 자비심의 실천일 수밖에 없다. 이 두 차원의 실천은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온전한 열반, 즉 위없는 청정한 삶의 완성으로 가는 방편이 된다. 그런 점에서 지혜와 자비를 보디와 사트바로 연결지으면서 깨달음과 역사 사이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설파한 현응스님의 저서는 여전히 유효성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2600년 불교사상사에서 큰 전환의 과정을 꼽을 때 일반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두 계기는 대승불교의 출현과 그 초기 대승사상에 기반해서 동아시아에서 나타난 선불교 등의 등장이다. 전자가 교리상의 전반적인 변화를 초래했다면 후자는 깨달음의 방법론 측면에서 큰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되었고, 이 두 과정 모두에서 깨달음의 주체이자 그 깨달음을 자비심으로 확산시키고자하는 열망을 지닌 보살의 존재가 전제되어 있다. 이 보살은 출가보살과 재가보살로 나뉘면서 각각이 처한 상황의 차이와 함께 깨달으며 실천하는 삶의 동일한 추구라는 공통점을 지니는 것으로 설정되어 왔다.
중관의 공성(空性)에 관한 인식이나 유식의 유식관(唯識觀) 모두 내가 실체로 여기 존재한다는 생각이 아상(我相)에 불과한 것이고, 모든 존재하는 것들과의 연기적 관계성만이 존재자들의 실상을 묘사할 수 있는 방편으로서의 개념임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이러한 연기적 관계성에 관한 명확한 인식은 곧바로 존재자들의 고통에 관한 동체적(同體的) 인식과 자비의 실천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보살사상의 전개는 깨달음의 과정이 동체자비의 실천과정과 분리될 수 없다는 보살의 실천윤리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우리 시대의 보살이 누구이고, 그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라는 물음을 던져야만 한다.

4. 보살의 깨달음과 자비행, 정의(正義) 문제

우리 시대의 보살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 사이의 동체성에 관한 인식에 토대를 두고 자신을 포함한 존재자들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노력하는 존재라는 불교사의 보편적인 의미와 함께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시대적 이념을 토대로 살아가야 하는 시민이라는 특수성을 지닌다. 21세기 초반 한국사회에서 그 보살은 개체성과 이기성 고립성에 근거한 개인주의를 토대로 하는 시장사회의 생존 명령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시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고, 특히 그것이 문제가 되는 점은 고타마 붓다가 우려했던 것처럼 보살의 지혜와 자비가 이 시대적 흐름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속성을 지닐 가능성이 높다는 데서 생긴다.
개체성과 이기성, 고립성은 기본적으로 존재하는 것들 사이의 관계를 그 개인의 이익 추구라는 관점에서 설정하게 하는 계약론적 토대 속에서 작동한다. 다시 말해서 모든 관계는 각 개인들의 이익을 보장하는 한에서만 정당화 근거를 지닌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서양 근대사상의 핵심 내용으로 포함되어 우리에게 전해졌고, 우리는 그 과정을 압축성장로 상징되는 적극적이면서도 복합적인 것으로 경험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세계사적으로 평가받을 만한 성과를 일정 부분 수반함으로써 외부의 긍정적인 평가와 내부의 절망적인 인식이라는 분열증적 상황과 마주해야 하는 고통으로 오늘 우리 앞에 버티고 서 있다.
우리 시대의 보살은 먼저 이러한 시대의 고통이 지니는 실상을 직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이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당연히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지속적인 수행을 해가야만 하지만, 이 수행이 반드시 출가보살의 간화선 수행만으로 한정될 필요는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시대의 고통이라는 실상을 직시하는 과정과 비동시적 동시성을 지니는 자비심의 실천 과정으로서의 수행이다. 이 두 과정은 서로 구분되면서도 분리되지는 않는 불이(不二)의 관계성을 지니면서 우리 시대의 보살들에게 일상과 수행, 자비행의 연계를 강조하는 배경으로 작동한다.
그런데 우리 시대의 보살은 곧 시민이기도 하다는 사실에서 실천적 곤혹스러움과 만나게 된다. 그는 한 기업의 구성원으로 이윤추구의 과정에 속할 수도 있고, 개별적인 자영업을 통해 이윤을 남김으로써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책임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 어떤 경우든지 일정하게 이익을 남겨야 하고 그 이익을 돈으로 바꿈으로써 생존의 대열에 동참해야만 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런 시민이 동시에 우리 시대의 재가보살로 살아가고자 하는 원을 세울 경우 시대의 흐름과의 접점 모색은 지난한 인식과 실천 과정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출가보살의 경우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일정 부분 독립성을 지니는 승가공동체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우리 불교계의 현실 속에서 출가보살은 오롯이 수행에 전념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더 확보할 수 있다는 차이점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조차도 수행 과정 자체가 내 안의 공성(空性)을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의 연기적 관계성으로 연결 지으면서 깨닫는 과정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점에서 결코 고립적인 독립성으로 이어질 수는 없다. 특히 대승의 출가보살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살아가고자 할 경우 동체성의 인식이 존재하는 것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자비심의 실천 과정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명료하게 깨달아야만 한다.
우리 시대 보살의 이런 인식과 실천, 또는 지혜와 자비의 구현은 당연히 시민으로서 자신의 위상과 역할에 관한 인식과 실천과 분리될 수 없는데, 그 시민은 다시 우리 교육이념 속에서 홍익인간과 민주시민이라는 이중적 속성을 지닌 존재로 규정되고 있다. 민주시민은 기본적으로 이기성과 개체성을 전제로 해서 성립된 개념이고, 홍익인간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이타성을 전제로 해서 성립된 개념임에도 우리 교육이념 논의에서는 당위적으로 홍익인간을 지향하면서 그것이 이기성을 전제로 하는 개인들의 삶의 영역에서 작동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를 상당 부분 결여하고 있거나 단순히 나열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그러다보니 교육이념은 말 그대로 공허한 이념의 영역을 넘어서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고, 그 틈새를 ‘기업이 요구하는 인적 자원‘ 육성이라는 노골적인 목표가 버젓이 끼어들고 있다.
우리 시대 보살의 자비행(慈悲行)은 우리 시대와 사회의 흐름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데서 시작한다. 신자유주의의 무모한 경쟁의 내면화와 그로 인한 피로사회의 정착, 빈부격차의 빠른 확대와 최소한의 안전망에 관한 합의의 지속적인 훼손, 북한과 미국, 중국의 핵과 원자핵 발전소의 위협에 관한 무감각의 확산, 남북 대립구조의 지속 같은 우리 사회와 시대의 흐름은 개인적으로 그 흐름의 원심력 속으로 빨려드는 삶을 강요하고 사회적으로는 관계망의 훼손을 통한 사회정의에 대한 무관심과 구조적인 차별의 심화를 야기하고 있다. 보살은 바로 이와 같은 흐름 속에 존재하면서도 다른 한편 그 흐름의 본질을 직시하며 맞서고자 하는 자비심을 갖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 출발점은 자신과 맞닿아 있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한 인식과 관심이다. 그 인식과 관심의 과정이 곧 깨달음의 과정이기도 하다.
남은 문제는 어떻게 이런 인식과 관심, 실천의 과정을 실제적으로 가능하게 할 것인가이다. 원론적으로 제대로 된 깨달음은 당연히 자비행이라는 실천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지만, 그 깨달음의 완성이라는 목표 자체의 지난함과 함께 깨달음과 자비행 사이의 비동시적 동시성이라는 우리의 명제 속에서 자비행과 깨달음 사이의 역 관계에 관한 논의가 더해질 필요를 느낀다. 윤리학과 도덕교육의 오랜 과제이기도 하고 한 이 문제는 ‘정의로운 행동을 함으로써 정의라는 덕을 갖추게 되는가’, 아니면 ‘정의를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가르침을 통해 정의로운 행동을 할 수 있게 되는가‘ 라는 논쟁을 불러일으켜 왔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과 관련해서 어떤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은 습관에 의해서, 또 다른 사람들은 가르침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본성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은 우리의 노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어떤 신적인 원인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진정으로 운이 좋은 사람에게만 귀속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른 한편 말과 가르침은 아마도 모든 경우에 힘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며, 듣는 사람들의 영혼이 습관을 통해 고귀하게 기뻐하고 미워하는 것으로 미리 준비되어 있어야만 할 것이다. 마치 씨앗이 자리기하기에 적당하도록 땅을 준비하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과 관련된 요소를 본성과 습관, 가르침 등 셋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 중에서 본성에만 의존하는 일은 지나치게 운에 기대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본성과는 독립적으로 습관과 가르침의 두 요소에 의지해서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그것만으로는 안정적인 성과를 기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정당성을 확보한 법률과 그 법률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정의로운 공동체로서의 폴리스를 불러낼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한국불교계의 수행분위기와 관련된 비판 중의 하나인 ‘깨달음에 대한 환상’과 그로 인한 막행막식 문화의 잔존 등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깨달음을 그 자체로 목적으로 삼는 무명(無明)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뭇삶의 고통을 직시함으로써 극복하기 위해 수행한다. 그 극복은 곧 열반일 것이기 때문에 수행의 목적은 깨달음이 아니라 열반이라는 홍사성의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그 깨달음은 온전한 깨달음을 전제로 할 경우 그 자체로 열반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음에도 유의할 필요는 있다.
이런 깨달음과 열반에 관한 정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우리 시대 수행자로서 재가보살과 출가보살은 그 수행의 과정에 간화선을 비롯한 대승의 수행방법에 기반한 정신적인 수행과 일상의 삶 속에서 자비심을 직접 실천하는 몸의 수행을 동시에 포용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한 몸의 수행은 습관화로 이어지고 다시 그 습관 자체에 관한 성찰과 재구성으로 이어지면서 수행의 향기가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드는 결과를 기대하게 할 수 있다. 이러한 몸과 마음의 불이적 관계성이 관한 인식과 실천이 진정한 수행과 그 과정과 결과로서의 깨달음,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자비의 눈길과 손길로 구체화됨으로써 한국불교는 종교이면서 동시에 철학, 더 나아가 이 시대 윤리의 보고(寶庫)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자리매김은 당연히 그 주체이자 대상이기도 한 보살과 시민의 자연스러우면서도 적극적인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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